영국의 실험, 건강 관리를 병원에서 지역으로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 영국의 건강 정책 변화 : 의료 기관에서 생활 공간으로

장애인이 스스로 건강을 관리하고 지킬 수 있을까? 현재까지도 비장애인 사회는 신체적·정신적 손상이 장애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장애를 비정상적인 상태로 보고 이를 치료를 통해 고쳐야만 한다는 재활 의료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는 '(장애인의) 건강은 의료(인)를 통해서 지켜진다'라는 인식을 심어준다. 지역 사회에서도 일상적인 건강 관리를 통한 질병 예방보다는 질병 발생 이후의 치료, 수술, 약 처방 등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영국의 학자이자 건강 불평등 조사 분야의 국제적인 권위자인 마이클 마모트(Michael Marmot) 팀은 2016년 건강한 삶이란 직장, 안전한 주거, 유년기부터의 풍요로운 건강 환경, 질병 예방, 사회 활동 참여, 가족 관계, 지역 주민들과의 원활한 소통 등이 영향을 준다는 보고서를 냈다.

특히, 이 보고서는 건강을 결정하는 요인 중 의료적 요소는 전체의 30%에 불과하며, 나머지 70%는 오히려 비의료적 요소들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 연구에 의거해 보면 장애인의 건강을 의료만으로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은 그 진위성을 철저히 따져봐야 한다.

2007년 금융 위기로 촉발된 심각한 재정 적자를 이유로 영국 중앙 정부는 2010년을 기점으로 대대적인 긴축 재정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복지 재정이 대폭 삭감되었고, 이러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그나마 유지되던 복지 국가(welfare state)의 근간마저 흔들리는 건 아닌지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다급해진 장애인과 노인을 비롯한 영국 시민들은 길거리로 뛰쳐나와 시위에 동참하고 있다.

▲ 2011년 5월 영국 장애인이 장애 급여와 서비스 삭감에 항의하며 거리 시위를 벌였다는 내용을 보도한 <가디언>.

하지만 당분간은 상황이 호전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가령, 2015년 영국의 국가 건강 서비스인 NHS(National Health Service)는 건강 및 사회적 돌봄 예산이 2020년까지 약 250억 파운드(약 36조8000억 원) 적자가 날 것으로 추산했다. 참고로, 2014~2015년 영국 NHS의 예산은 1150억 파운드(약 164조 원)이며, 같은 시기 한국 국민건강보험공단 지출 총액은 약 44조 원이다. 게다가 지난 6월 23일 국민 투표를 통한 브렉시트(Brexit) 결정 여파로 파운드화 가치가 하락하여 공공 지출 압박이 가중될 전망이다.

영국의 건강 정책 개혁 : 의료 기관 중심성을 넘어서라

이 같은 위기의식 속에서 영국 정부는 2012년 '건강 및 사회적 돌봄 법(Health and Social Care Act)'을 제정하고 대대적인 건강 정책 개혁에 나섰다. 이 법의 핵심은 중앙 집권적으로 운영하던 건강 서비스 업무를 지방으로 대폭 이양하고, 병원-기반 건강 정책을 포기하고 장소-기반 건강 정책을 선택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국은 중앙 정부에서 관할하는 NHS 조직을 통해 전국에 같은 기준과 수준으로 건강 및 돌봄 서비스를 제공해 왔다. 중앙 정부의 건강부(Department of Health) 산하에 10개 전략 건강국(Strategic Health Authorities)을 두고 그 아래에 151개 필수 돌봄 트러스트(Primary Care Trusts)를 설치하여 모든 서비스를 직접 관장하였다.

하지만 2012년 법률이 제정된 뒤로는 지방 정부와 계약으로 건강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의료 위탁 계약 기관(Clinical Commissioning Groups)을 221개 설치하여, 이 기관이 최종적인 건강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존의 중앙 정부 기능이 지방으로 대폭 이전된 것이다. 이제 지방 정부는 의료 위탁 계약 기관을 선정하고 관리할 뿐 아니라, 건강 서비스의 유형, 제공 방식, 대상자 등을 결정하는데 많은 자율성을 가지게 되었다.

한편, '장소-기반 건강(place-based health)'이란 시민의 건강 문제를 의료 시설/기관(institution)에만 맡겨둘 게 아니라, 지역 사회의 다양한 일상 공간, 즉 장소(place)에서 해결하자는 것이다. '건강 상태'는 개인 특성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환경(편의성, 주거 조건, 환경 오염, 범죄율, 빈곤율, 사회적 인프라 수준 등)의 영향도 받기 때문에 의료적 접근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사회 모형(social model)이 장애를 넘어 건강 쟁점에도 적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전문가들은 장소 기반 건강을 지속 가능한 시스템으로 정착시키려면 세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첫째, 의료 기관에서 사람과 장소로 관점을 이동해야 한다. 오늘날 건강 및 돌봄 제공 기관들은 많은 권한을 갖고 서비스 전달 방향을 결정한다. 하지만 그들은 사람을 자산으로 생각하지 않고 대상으로 여기며 장소라는 지역 사회 자원을 등한시한다. 건강 서비스 시스템이 치료가 아닌 예방 위주로 이동하고 건강이 사회적 쟁점이 되려면, 시민들의 자기 관리 역량과 지역 사회 자원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동원해야 한다.

둘째, 서비스의 사일로(Silo, 곡물 저장 창고 : 부서나 조직 간의 분리된 칸막이 안에서만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에서 시스템 결과물로 변화해야 한다. 현재는 서로 분리된 서비스들이 우선순위에 따라 작동하도록 설정되어있다. '건강'과 '돌봄'이 서로 분리된 수직적인 사일로식 전달 체계에서 벗어나 수평적인 장소-기반 시스템으로 이동하는 것은 종전의 문화와 행동이 완전히 새롭게 변모하는 것이다. 서비스들이 서로 섞이지 못하게 방해하는 칸막이들을 제거하고 서비스 간 통합과 융합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이다. 이 변화의 촉진 요인들(enablers)을 제대로 인식하고 발전시키고 지원함으로써 내부에서 외부로 향하는 새로운 시스템을 창조해야 한다.

셋째, 국가에서 지방으로 이동해야 한다. 중앙 정부의 건강 정책 기조는 기존 관행에서 탈피하여 지방 정부가 실천과 행동을 바꾸도록 지원해야 한다. 국가 기관들은 최종적인 건강 서비스 제공자이자 감독자의 역할에서 벗어나 장기적인 예방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사일로를 강화하기보다 종합적인 시스템을 통해 지역 사회 장소에 접근하고, 지방 현장 실무자들의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장소-기반 건강을 위한 노력

지금 영국은 장소-기반 건강 시스템을 정착시키기 위해 중앙 정부, 지방 정부, 민간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우선, 영국의 중앙 및 지방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을 살펴보자.

환자의 자기 관리 프로그램으로 '전문가 환자 프로그램(Expert Patient Program)'이 있다. 장애인, 만성 질환자 등이 자기 몸에 관한 지식 획득, 질환 감소를 위한 건강 관리 계획 수립 및 실천, 건강 관련 정보 확보 및 이용법, 의사와 환자의 관계 재구성 등에 관한 훈련을 받아 자기 질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환자가 자기 몸과 건강에 대한 전문가라는 인식에서 출발하였다.

또한 NHS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개인 건강 예산(Personal Health Budgets)'을 지급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건강 예산을 개인에게 지급하여 장애인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병원 서비스를 줄이자는 의도에서 시작한 제도다. 이 제도는 기존에 사회 서비스에서 운영되는 장애인 '개인 예산 제도(Individual Budgets)'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리고 영국 정부는 새로운 건강 정책이 지역에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추진 중인지 모니터링하기 위해 기초자치단체마다 '건강 감시 기구(Health Watch)'를 설치하였다. 이 기구는 퇴원한 환자가 섭생 문제 때문에 재입원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점을 발견하고 지원 방안을 제시했고, 환자가 병원 문밖을 나가면 아무런 지원을 않던 NHS가 관행을 바꾸어 퇴원 환자 섭생 프로그램에 예산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특별하게도 런던시 해크니 자치구는 부동산 경기가 호황을 맞자 조례를 개정하여 건물축 시공 이전에 건강 영향 평가(Health Impact Assessment)를 시행하고 있다. 평가 기준에 미달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는 건강 부담금을 납부해야 한다. 장소-기반 건강 개념에 따르면 의료적 조치만으로는 천식 환자를 치료할 수 없으니 천식에 유해한 건축 자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여 사전에 예방하자는 논리다.

정부뿐 아니라 비정부기구(NGO)도 NHS나 기업의 기금을 받아 독자적으로 장소-기반 건강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지역 사회 건강 챔피언(Community Health Champions : 지역 주민과 건강 관련 경험을 공유하는 프로그램), 액티브 퓨처(Active Future : 만성 질환자의 건강한 생활을 돕는 프로그램), 메리 시크릿 가든(St Mary's Secret Garden : 지역 사회 정원 가꾸기 프로그램), 액티브 라이프(Active Life : 건강한 생활 방식을 지원하는 프로그램) 등의 자기 주도의 건강 관리를 지원하는 사례가 있다.

▲ 메리 시크릿 가든(St Mary's Secret Garden)이라는 '정원 가꾸기'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건강한 여가 생활을 즐기고 있는 영국의 노인. ⓒstmaryssecretgarden.org.uk

병원은 건강 관리의 최종 개입 기관이어야

2015년 '장애인 건강권 및 의료 접근성 보장에 관한 법률(이하 장애인 건강권법)'이 제정되면서 우리나라도 장애인 건강 정책의 변화를 목전에 두고 있다. 이 법률은 건강 보건 관리 종합 체계 수립, 건강 주치의 제도 도입, 재활 의료기관 지정, 중앙 및 지역 장애인 보건 의료 센터 운영 등을 주요 골자로 한다.

현재 보건복지부와 국립재활원은 '공공 의료 재활 포럼'을 구성하여 아래 그림과 같은 전달 체계(안)을 마련하였다.

▲ 보건복지부가 국립재활원이 수립한 건강 보건 관리 사업 모형. ⓒ보건복지부

위 그림에서 확인하듯이 우리나라 장애인 건강 정책은 의사와 전문가의 역할과 기능에 완전히 의존하는 구도다. 병원과 재활 센터에 의료 모형이 단단하게 구현되고 있다.

앞서 영국의 사례에서 보듯이 병원은 최종적으로 건강에 개입하는 기관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지역 사회에서 건강한 생활양식을 통해 건강 문제를 예방하고, 되도록 병원을 찾지 않는 것이 우선이다. 따라서 국가와 자치단체는 건강 문제를 야기하는 사회적 환경과 조건부터 개선해야 한다. 물론, 영국의 NHS 개혁 조치는 예산 절감을 위한 시도지만, 그 방향성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우리나라 장애인 건강권법은 "장애인들이 병원을 잘 찾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출발하였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이러한 장애인 건강권법의 시행은 장애인에게 발생할 수 있는 2차 질병 등을 예방, 치료하는 공공 의료 서비스의 확충이라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장애인을 의료적 치료 대상에 얽매어놓고 의사들의 돈벌이 수단으로 전락시킬 가능성도 예견되고 있다. 또 그로 인해 국민건강보험 재정에서 장애인의 치료 비용 비중이 많은 폭으로 증가할 수도 있다(현재도 장애인 관련 진료비는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약 10%를 차지한다).

건강 관리의 시작은 지역 사회에서

그렇다면, 장애인들이 병원을 찾지 않고도 지역 사회에서 건강하게 살 수 있는 방안부터 마련하는 것이 정부가 할 일이 아닐까? 건강을 해치는 지역 사회에서 건강하지 않은 생활습관으로 질병을 키워 병원을 찾는 한, 장애를 가진 개인의 건강 문제는 반복되고 국가는 그만큼 재정 부담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정부의 건강 정책이 지역 사회 건강 프로그램을 활성화하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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