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면 뭐든지 사다 팔았던 기업
1987년 국내 유명식품회사들이 갑자기 네덜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등 유럽에서 영유아용 식품에 쓰이는 카제인나트륨과 가공식품에 쓰이는 전분 같은 식품원료를 대규모 수입하였다. 당시에는 귀했던 건포도도 대량 수입되어 노점에서까지 판매되었다. 기업들은 왜 갑자기 유럽에서 식품원료를 대량 수입하였을까?
1986년 4월 26일 소련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가 있었다. 사고 이후 방사능 낙진 오염지역 국가들은 자국 소비자 보호를 위해 대부분의 농축산물을 폐기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식품업체들은 가격이 떨어진 방사능낙진 오염지역 생산 원료를 수입해와 이유식과 라면 등을 만드는데 썼다. 당시 수입된 식품에서는 방사능이 검출되기도 했다. 유럽에서는 버려졌을 식품을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돈 내고 사 먹었던 것이다. 이들 업체들은 여전히 국내 식품시장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리콜 될 제품을 들여다 파는 기업
1990년 초 유럽 장난감 수입이 갑자기 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제품에 비해 유럽에서 제조된 제품 가격이 훨씬 비쌀 때였다. 그 해 유럽 17개국에서 생산된 어린이 장난감의 국내 수입량이 예년 같은 기간보다 최고 1000% 이상 늘었다. 왜였을까? 갑자기 유럽 장난감 붐이 불었을까?
유럽공동체(EC)가 어린이 안전을 위해 장난감의 중금속 잔류기준을 포함해 안전기준을 대폭 강화하고 1990년 1월 1일부터 시행했다. 예를 들어 당시 국내 장난감의 납 기준은 500ppm 였고 강화된 유럽 기준은 90ppm 였다. 유럽에서 못 팔게 된 장난감들이 기준이 느슨한 우리나라에 싼 값에 흘러들어온 것이다. 유럽에선 안전기준 부적합으로 리콜 되었을 어린이 장난감이 우리나라 매장에서 부활한 것이다.
이중기준
이중기준(double standard)의 사례들이다. 위해하고 불량한 상품은 부도덕한 기업과 이를 방치하는 정부를 통해 기준이 허술한 곳으로 흐른다. 제품만이 아니다. 선진국에서는 함부로 처리 못할 전자쓰레기(Digital Dump)가 아프리카지역 저개발 국가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그 지역 소비자들이 건강과 생명을 잃는 재앙(E-Waste Disaster)이 심각하다.
우리나라 소비자들도 꽤 오랫동안 이중기준의 피해자였다. 다른 나라에선 먹지 않고 쓰지 않을 제품이 버젓이 수입되어 유명 브랜드 표시를 달고 좋은 제품, 안전한 제품인양 팔려도 국내 기준이 없거나 허술해서 막을 방도가 없었다. 정부는 무책임하게 소비자를 보호하지 못했다. 소비자는 무방비로 손해를 보고 피해를 입었다. 피해를 당한지도 모르거나 알아도 보상을 받지 못한 채 살아왔다. 국가가 힘 없고 어렵다는 이유로 소비자는 피해를 감내해왔던 것이다.
지금은 달라졌을까?
이중기준으로 소비자의 생명도 팔아치운 기업 앞에 국가가 들이대는 법의 잣대는 무력하고 빈약하다. '고의성' 입증의 문턱을 넘어야 제조자 처벌이 가능하고, 소비자가 피해를 입증해야 보상을 받는다. 죽음으로 피해를 입증하고도 미덥지 않은 '과학적 인과관계'에 의존해야 한다. 정부도 국회도 우습게 아는 무소불위의 기업 권력과 횡포 앞에 개개인의 소비자는 정말 먼지조차 안 되는 힘없는 존재이다.
누가 기업 권력을 다스려 소비자를 보호해 줄 것인가? 거대 기업과 소비자 관계에서 정의(justice)나 공정성(fairness)이 존재할 수는 있을까? 정부는 거대 기업 눈치 안보고 소비자를 보호할 수 있을까? 그래도 매달릴 곳이 무기력하고 무책임한 정부밖에 없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은 오늘도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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