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 죽음은 해답처럼 보인다. 천수를 다한 죽음이 아니라 스스로 택한 죽음일 때 그럴 확률이 높다. 자살에 해당하는 다른 말이 자결(自決)인 데서도 짐작할 수 있다. "스스로 결정짓다"는 게 자결이다. '결(決)'에는 제방 같은 걸 끊어버린다는 어원을 찾아낼 수 있다. 둑을 허물어 모든 걸 물로 덮어버리는 것이다.
이인원 롯데쇼핑 부회장의 죽음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자결에 해당한다. 롯데 2인자로 불리는 이 부회장은 검찰 출석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평생을 바친 조직과 신동빈 회장에 대한 '의리'를 지켰고 스스로 수모를 당하는 상황을 모면했다.
어느 매체는 이 부회장의 죽음을 다루며 "辛의 충신으로 일생 마무리"란 제목을 달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면서 자살을 택한 그의 행태를 보면 사실 '충신'이란 표현이 과하지 않아 보인다. 나아가 '2인자'로서 합당하게 처신하였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충신'다운 유서를 남겼다. "롯데에 비자금은 없다. 이렇게 어려운 시간에 먼저 가서 미안하다.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고 적었다. 고인이 되기 전까지 나는 이 부회장을 알지 못했지만 고인이 된 이후 그에게서 인간적인 동감을 느끼게 된다. 신동빈 회장은 모르겠고, 어쩌면 그가 '훌륭한 사람'이지 싶다.
'1인자' 신 회장은 애통해하며 이 부회장 빈소를 찾았다. 언론은 그의 눈물과 슬픔을 기사와 사진으로 전했다. 4분이나 묵념했으며, 30초 가량 영정을 응시하였고, 1시간 정도 빈소를 지켰다고 보도했다. 신 회장이 들어오고 나가는 동안의 표정과 대꾸까지 상세하게 전했다.
기자 시절 부음을 쓰는 것보다 어려운 기사는 없었다. 한국적 정서에서 망자에 대해선 애도가 기본으로, 공과에 관해 엄격하기 힘들다는 정리가 작용했기 때문이다.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해도 비슷했다. 이 부회장에 대해서는, 부음 기사를 쓰는 건 아니나 큰 갈등 없이 사건을 논할 수 있어 보인다. 비자금 등 짐작되는 롯데의 부패가 향후 사실로 밝혀진다면 엄밀하게는 이 부회장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겠지만 이번 일로 사실상 면책되었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애초에 논할 대상이 망자가 아니라 생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번 사건은 그 자체보다 주변에서 씁쓸한 맛을 남긴다. 검은 양복을 입고 일단의 무리를 대동하고 조문한 신 회장의 동정에서 전근대적 풍경을 떠올렸다. 롯데그룹의 모태가 일본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문상 온 신 회장에게서 할복한 사무라이의 빈소를 찾는 영주 또는 조직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던진 조직원을 문상하는 야쿠자 보스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충신'이란 자극적인 언론 보도의 제목 또한 매우 적절했지만 그럼에도 그 적절함으로 인해 불편했다. 이 부회장이 충신이라면 신 회장은 군주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근대 사회에서 자본가와 피고용인의 관계는 계약에 의거하지 군신 관계처럼 의리에 바탕하지 않는다. 이 부회장의 죽음과 신 회장의 조문은, 우리 사회가 자본주의라는 근대적 하드웨어에 전근대적 소프트웨어를 탑재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고 이인원 부회장이 생전 그룹 2인자였다는 표현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부회장은 '2인자'가 아니라 '1인자'였다. 자본이든 군주이든 고용인과 신하에 대해서는 서수(序數)를 쓰지 않는다. 고용인과 신하는 기수적으로도 1과 2를 논할 존재가 아니며 별개 위계에 속한 대체 가능한 '단위'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부회장은 롯데그룹의 '2인자'가 아니라 롯데그룹 '피고용인 집단의 1인자'였다.
"모든 종류의 상해나 손해를 입었을 때, 좀 더 저급하고 조잡한 영혼이 좀더 고귀한 영혼보다 더 형편이 좋다. 후자의 위험은 더 클 수밖에 없으며, 더군다나 그들의 생존조건이 복잡하기 때문에 재난을 당하고 파멸할 개연성이 엄청나다. 도마뱀의 경우에는 없어진 꼬리가 다시 자라나지만,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선악의 저편>(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김정현 옮김, 책세상 펴냄, 2002년))
망인의 명예를 훼손할까 매우 조심스럽지만, 신 회장에게 이 부회장에 어떤 존재였는지는 인용문을 숙독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된다. 자본은 인간이 아니며, 그 본성은 저급하고 조잡하여 꼬리의 부재나 변동이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 꼬리를 떼어버림으로써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주체는 도마뱀이다. 당연히 꼬리는 도마뱀의 주체가 아니다. 자본가에게 피고용인이 그렇다. 제 아무리 높은 서열의 피고용인이라 하여도 자본은 피고용인을 주체로 수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신 회장이 도마뱀일 수는 없으니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은 것으로 하고 넘어가자.
신동빈 회장과 이인원 부회장의 '의리'를 지켜보면서 곁가지로 드는 다른 생각은 박근혜 대통령과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관계의 본질은 무엇일까 하는 점이었다. 우 수석이 '자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사퇴를 택하지는 않았으니 '충신'은 아니겠다. 우 수석이 '충신'이 아니므로 박 대통령 또한 '군왕'이 아닌 것이니, 다행이다. 경제와 달리 우리 정치가 근대적임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우 수석의 비리 여부는 논외로 하고 오랜 관행과 정치적 맥락에 의하면 어떻게든 이미 거취가 결정지어졌을 우 수석의 자리가 여전히 온전한 데에 수많은 해석이 나온다. 조선일보, 산업은행, 친박·비박까지 난마처럼 얽힌 복잡한 상황에서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들만이 알 것이고 나는 추측조차 못하겠다. 다만 우 수석이 고 이 부회장처럼 꼬리는 아니라는 점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지금 형편에선 어불성설이겠지만, 아무튼 '일개' 수석이 대통령에게 대체 가능한 공직자가 아니라 정권의 명운을 걸어야 할 무엇인가가 되었다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니체 인용문에 준하면, 신 회장과 고 이 부회장 관계의 대비로서 박 대통령과 우 수석의 관계가 "좀더 고귀한 영혼"들의 관계가 아님은 자명하지만 "그들의 생존 조건이 복잡하기 때문에 재난을 당하고 파멸할 개연성이 엄청나다"는 점에서 '합체'가 일어나고 있음은 부인되지 않는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어떻게 해도 해석이 되지 않지만 선출직 최고위 공무원인 대통령과 대통령이 임명하는 비선출직 공무원 정무수석이 명운을 같이하는 사태가 현실인 것이다. 두려운 것은 그들이 '그들만의 정부'를 꾸려나가는 데 일말의 주저함이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함과 확신을 결부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전근대적 자본을 경영하는 신동빈 회장은 근대적 정부를 운영하는 박근혜 대통령에 비해 '훌륭한 사람'일 수도 있겠다. 숨진 이 부회장 없어도 신 회장은 앞으로 롯데를 잘 끌고나가겠지만 박 대통령은 이제 우 수석 없이는 정권을 지탱하기 힘들어졌으니 말이다. 이 부회장의 유서 중 "신동빈 회장은 훌륭한 사람이다"는 언급은 그 앞에 "박근혜 대통령보다"를 추가한다면 맞는 말이 된다. 전근대적 자본보다 못한 근대적 정치권력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훌륭한 사람'의 명단은 신동빈, 이건희 같은 재벌들로 채워지고 있다.
(안치용 교수는 한국사회책임네트워크 집행위원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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