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성 데이터 없이 화학물질 사용 못해!

[의료와 사회] 화학물질, 이렇게 유통된다

1. 한국의 화학물질 유통 현황

2010년까지 환경부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에 의거하여 4년에 한 번씩 유통량조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2014년부터는 '화학물질관리법'이 시행되면서 2년에 한 번씩 화학물질통계조사를 하게 되었다.

이 조사는 1톤 이상 취급하는 물질(유해화학물질은 0.1톤 이상)에 대해 조사한다. 이 조사는 각 사업장에서 1톤 이상 취급하는 물질만 조사한다는 제한이 있고, 정확성이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다른 자료가 없기 때문에, 한국의 화학물질 제조·수입·수출·사용 현황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 이 자료가 많이 이용된다.

환경부에서는 약 4만 4000종정도의 화학물질이 국내에서 유통되고 있다고 추정한다.1) 이 중에서 1톤 이상 유통되어 통계로 잡히는 물질은 '표 1'과 같이 약 1만 종정도이다.2) 즉, 국내에서 유통되는 물질 중 1톤을 넘지 않는 소량 유통물질이 3만 종 이상 된다는 뜻이다.

또한, 통계조사가 이루어지는 1만 종의 화학물질 중에서도 다수는 1톤 언저리의 소량으로 유통될 가능성이 높다. 유통량의 95% 이상을 1000톤 이상 대량 유통되는 물질들이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소량으로 유통된 화학물질 중에는 가습기 살균제 성분도 해당된다.

▲ 표 1. 2010년 화학물질 유통량 조사 결과

1000톤 이상 대량 유통되는 물질의 대부분은 석유나 가스 및 그 부산물들이다. 관세청에서는 수출입 무역통계자료를 제공한다. 이 자료를 보면 2010년 당시 수출과 수입에 있어서 원유를 포함한 광물성 연료(석유와 그 정제 산물 및 가스)의 비중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 표 2. 2010년 수출입통계 자료

전 세계적으로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을 겪던 194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화학물질 생산이 증가하였다.4) 우리나라의 경우 1960년대 이후 중화학공업 등 산업발전과 함께 화학물질 생산 및 사용량이 본격화하였을 것으로 예상된다. 환경부의 유통량 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가 시작된 1998년부터 지금까지도 지속적으로 유통량과 유통물질의 수는 여전히 증가하고 있다.

2. 독성정보의 파악 현황

1976년 미국에서 '유해화학물질관리법(Toxic Substances Control Act)'가 제정될 때, 이미 시장에서 사용 중이던 화학물질의 독성까지 모두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등장한 개념이 기존 화학물질과 신규 화학물질이다.

당시에 6만 종 이상의 화학물질이 이미 유통 중이었기 때문에 이들의 독성 정보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기존 화학물질 외에 새로이 시장에 진입하는 신규 화학물질을 중심으로 화학물질의 독성을 파악하기로 한다. 이때부터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이 방식으로 나라별 화학물질 규제를 수립하게 되었다.

유럽에서도 1981년부터 신규화학물질에 대한 신고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건강피해를 유발하는 물질들은 대부분 기존 화학물질들이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기존 화학물질에 대한 독성정보를 모르고서는 사람들의 건강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정부가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았다. 결국 기존 화학물질과 신규 화학물질을 나눠서 독성을 파악하는 방식은 2007년 유럽에서 '화학물질의 등록, 평가, 허가 및 제한에 관한 법률(REACH)'을 시행할 때까지 30년간 도입되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유해화학물질관리법'이 1990년 제정되었고, 1996년에 기존 화학물질 목록을 고시하였다.5) 미국의 방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환경부는 지금까지 국내에서 유통된 기존 화학물질이 약 4만4000종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신규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제조 수입 기업에서 독성 정보를 정부에 제출해야 하지만, 기존 화학물질은 그럴 의무가 없다. 그래서 정부는 걱정되는 기존 화학물질에 대해서는 정부가 직접 안전성 검사를 한다. 지금까지 약 600개 정도의 물질에 대한 안전성 검사가 이루어졌고, 이 중에서 10% 정도는 유독물이나 관찰물질로 지정되었다. 정부의 예산과 인력의 한계로 인하여 1년에 10~20개 정도 되는 화학물질에 대해서만 독성을 확인한 셈이다.6) 그래서 정부의 평가 결과와 기업이 제출한 결과를 종합할 때, 전체 유통 물질의 15% 정도에 대해 독성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환경부는 보고 있다.7) 즉, 85%의 화학물질은 독성을 모르고 사용 중이라는 뜻이 된다. 물론, 이러한 문제는 기존 화학물질과 신규 화학물질을 구분한 관리체계를 가진 대부분의 국가에서 발생한 것으로 한국만의 특수한 문제라고는 할 수 없었다.

ⓒ프레시안

3. 유럽의 화학물질 관리 노력 변화에 비춰본 한국의 문제점

하지만 이제는 그런 면죄부를 한국 정부에게 줄 수 없게 되었다. 화학물질 독성 정보의 파악과 관리에 있어서 새로운 질서가 확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기존 화학물질의 문제에 대해 1990년대 말부터 본격적인 대책 수립에 나섰다. 1998년에 화학물질제도의 작동 현황에 대한 검토를 하였다. 기존 화학물질의 독성 분류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문제는 당연히 지적되었다.8) 2001년 유럽 정부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이 내용은 'REACH'라는 새로운 법률의 출발이 된 '미래전략 백서(White Paper)'에 담겨 있다.

"기존 화학물질은 시장에 유통되는 화학물질의 99% 이상을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테스트 요구를 받지 않는다. 1981년 보고된 기존 화학물질의 수는 10만106개이다. 현재 1톤 이상의 기존 화학물질은 약 3만 개 정도 된다. 이 중에서 140개는 중요한 화학물질로서 우선 순위를 부여받아 회원국이 진행하는 포괄적인 위험성 평가를 실시하였다. 기존 화학물질의 성질과 용도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는 상황이다. 위험성 평가 절차는 매우 느리고 자원을 많이 소비한다. 그래서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기업은 화학물질을 생산· 수입·사용하는데, 정부에게 화학물질을 평가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도 문제였다."9)

유럽연합(EU)은 기존 화학물질과 신규 화학물질을 구분하지 않고 모든 화학물질에 대해 독성과 용도를 파악하기로 한다. 이 정보는 정부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정부에게 등록하도록 하였다. 화학물질로 돈을 버는 기업이 정보를 생산해야 할 의무를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었다. 독성과 용도에 대한 데이터 없이 화학물질은 사용할 수 없다(No data, no market)! 이것이 2007년 시행된 'REACH'라는 새로운 제도의 핵심이었다.

이 사건은 전 세계의 화학물질 관리 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당연히 우리나라에서도 'REACH'와 같은 법률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시민사회는 물론 정부 내부에서도 제기되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2013년에 제정된 '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하 화평법)이다. 환경부는 유럽이 1톤 이상 사용되는 화학물질에 대해 등록하도록 하였으니, 우리나라는 0.5톤 이상의 물질을 등록해야 규모면에서 비슷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화평법의 초안을 이렇게 작성하였다.10)

ⓒ이하

그러나 정치적인 상황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환경부의 안은 즉각적으로 기업의 공격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는 '기업 프렌들리'를 넘어서서 '기업의 민원처리 창구'로 움직였다.

결국 환경부는 유럽에 없는 새로운 틀을 제출하였다. 기업이 제조 수입하는 화학물질에 대해 간단히 보고만 하고, 이 중에서 환경부가 등록 대상으로 지정한 물질만 기업에게 독성과 용도 정보 제출을 요구하기로 한 것이다. 1차 500여 개, 2차 800여 개, 3차 1000개 정도 해서 앞으로 10년간 2300개의 기존 화학물질만 등록하는 것으로 최종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렇게 모든 기존 화학물질의 독성을 파악하려던 환경부의 계획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기업은 여기에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2013년 화평법이 제정되었고, 9월 3일 시행령과 시행규칙을 제정하기 위한 협의체가 첫 회의를 열었다. 나는 이 자리에 시민사회를 대표해서 참석하였다. 회의 분위기는 기업이 압도하고 있었다.

여기에 힘을 더 실어준 것이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9월 25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며 화평법을 공격했다. 기업을 망하게 하는 '망국법'이라는 뜻이었다. 그 이후 나는 화평법 하위법령 제정을 위한 협의체에서 기업들의 민낯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만한 기업들이 회의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되었는데, 갑자기 법을 지키라고 하면 기업더러 망하라는 얘기 아닙니까?"

가습기 살균제 사고가 2011년 발생하였고, 그 대책의 일환으로 제정된 것이 화평법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화평법과 그 시행령 및 시행규칙은 무력화되었다.

2007년 'REACH' 제정 이후, 유럽사회는 더 많은 화학물질을 등록하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등록된 물질에 대해 유럽의 관리 노력을 평가 중이다. 발암물질이나 생식독성물질 같은 고독성물질에 대해서는 사회의 관리 노력이 부실하다고 판단될 경우, 기업이 함부로 쓰지 못하도록 허가 제도를 강력히 추진할 계획이다. 비로소 모든 화학물질의 독성과 용도가 파악되고, 그에 맞는 관리가 본격화되고 있는 셈이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우리 국민의 피해는 호흡 독성을 모르면서 호흡기로 노출될 수 있는 용도로 마음대로 기업이 전용한 것에서 문제가 출발하였다. 또한 기업이 화학물질의 독성을 모르고도 사용할 수 있었던 제도적 한계로부터 그 뿌리가 자라났다.

2016년 가습기 살균제를 둘러싼 기업들의 민낯을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지금 '화평법'을 다시 바로잡아야 한다. 모든 화학물질의 독성과 용도를 파악함으로써 국민을 예측하지 못한 위험에 빠뜨려서는 안된다는 기본 철학이 화학물질 관리제도에 단단히 뿌리내리게 해야 한다.

각주

1) 환경부. 제1차 화학물질 평가 등에 관한 기본계획(2016-2020). 2015. 10쪽.
2) 통계청. 국가통계포털. kosis.kr.
3)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 https://unipass.customs.go.kr:38030/ets/index.do
4) Davis DL, H. MB. Cancer and Industrial Chemical Production. Science. 19790;206:1356–8.
5) 환경부. 환경부고시 제1996-170호 신고대상에서 제외되는 화학물질. 1996.
6) 감사원. 유해화학물질 관리실태 및 문제점. 2013. 26쪽.
7) 환경부. 제1차 화학물질 평가 등에 관한 기본계획(2016-2020). 2015. 10쪽.
8) Commission of the European Communities. Commission Working Document: Report on the operation of Dir. 67/548, Dir. 88/379, Reg 793/93 and Dir. 76/769. Luxembourg. 1998.
9) European Commission. White paper: Strategy for a future Chemicals Policy. 2001.
10) 이한웅. 현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에 관한 법률의 문제점 및 성공적 정착을 위한 해결 방안. 한국경제연구원. 2013. 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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