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사 시인' 김남주, "조국은 하나다"

[기고] 반외세 통일 문학의 대표, 시인 김남주

김남주 시인에 관한 글 한 편 써보겠다고 마음먹은 게 1년 전인 2015년 8월이었다. 2014년 10월부터 2015년 7월까지 <프레시안>에 한국의 반미 문학 예술에 관해 연재한 것을 계기로 2015년 8월 <계간 창작21>과 '창작21 작가회' 주관으로 강원도 인제 만해 마을에서 열린 '2015 만해 축전 : 세계 작가 초청 평화 문학 심포지엄'에서 "해방 70년 분단 70년 민족 문학의 흐름"이란 글을 발표하게 되었다.

바로 이틀 뒤 광주에서 "분단과 통일"에 대해 강연했는데, 나를 초청한 단체의 대표가 김남주에 관한 일화 몇 토막을 들려주었다. 1988년 김남주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출판했던 분으로, 한국의 '반미 문학'이나 '민족 문학'을 다루며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전사(戰士) 시인'의 작품 몇 편을 소개한 내 글을 읽었던 모양이다.

연필 한 자루 종이 한 장 주어지지 않는 감옥에서 "물밀듯 솟아오르는 시상이 떠올라도 한 편의 시도 적어두지 못한다"고 슬프게 호소하며, 못으로 우유갑이나 은박지에 쓴 수백 편의 시가 감옥 밖에서 시집으로 출판된 과정이 흥미로웠다.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더 많은 일화를 부탁하며, 내가 한 때 심취하며 존경했던 시인에 관한 글 한 편 써보겠노라고 약속했던 것이다.

마침 2015년 11월 김남주의 고향 해남에서 '동북아 정세'에 관한 강연을 요청받았는데, 해남문화예술회관에서 강연하고 고향집에 자리 잡은 김남주문학관을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된 것은 행운이었다.

자료를 찾고 모으면서 구상했던 글을 쓴다는 게 쉽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꼈다. 김남주 시 전집과 산문 전집을 포함한 다양한 책과 논문이 그의 20주기인 2014년 전후로 쏟아지다시피 나온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그에 관한 석사 논문은 적어도 10편 넘게 검색되었고, 2012년엔 박사 학위 논문까지 나왔다.

2014년엔 "그의 시 세계를 총체적으로 조명하는" <김남주 문학의 세계>가 출판되었고, 2016년엔 "그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온 삶을 되짚어보는" <김남주 평전>도 출판되었다. 자료가 풍부해져서 글을 쓰기 쉽게 된 게 아니라, 내가 새롭게 덧붙일 내용이 없어져버린 것이다.

참고로 1970년대에 김남주를 '남조선민족해방전선(남민전)' 전사로 이끌었던 분은 <김남주 평전>에 부족한 면이 좀 있다고 귀띔해줬지만 그것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이 나에겐 없다. 굳이 변명하자면, 문학 평론가나 전기 작가가 아니라 통일 운동을 하는 정치학자로서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외쳤던 전사 시인의 반외세 통일 문학을 중점적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글과 강연으로 통일 운동에 한쪽 발이나마 담가온 내가 김남주의 반외세 통일 문학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은 이 자체를 자주 통일 운동으로 삼기 때문이다. 한반도가 미국에 의해 분단된 지 70여 년이 흘렀지만 미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은 채 통일은 여태 문턱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다.

김남주가 자주와 통일을 추구하다 감옥에 갇혔던 1970년대로부터 30여 년이 훌쩍 지나고, 1994년 세상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흘렀어도 미국에 대한 의존이나 종속은 줄어들지 않고 남북 관계는 진전되지 않고 있다. 그가 시를 통해 애타게 부르짖고 간절하게 바랐던 반외세 민족 통일을 되짚어보면 우리가 자주적으로 통일을 이루어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학이란 한 시대를 그리며 시대정신을 담아내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를 이끄는 역할까지 맡아왔는데, 특히 그의 시문학이 그랬기 때문이다.

김남주의 반외세 통일 문학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소개가 간단하게나마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는 1945년 몹시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머슴이었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머슴으로 살던 주인집의 딸이었는데 한쪽 눈이 멀었다. 그는 이러한 불우한 가정사를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는 시에 너무도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았다.

그래 그는 머슴이었다
십년 이십년 남의 집 부잣집 머슴살이였다
나이 서른에 애꾸눈 각시 하나 얻었으니
그것은 보리 서 말에 얹혀 떠맡긴 주인집 딸이었다

그는 내가 커서 어서 어서 커서
면서기 군서기 되어주길 바랐다
손에 흙 안 묻히고 뺑돌이 의자에 앉아

펜대만 까닥까닥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주길 바랐다
그는 금판사가 되면 돈을 갈퀴질한다고 늘 부러워했다
금판사가 아니라 검판사라고 내가 고쳐 말해주면
끝내 고집을 꺾지 않고
금판사가 되면 골방에 금싸라기가 그득그득 쌓인다고 했다

그는 죽었다 화병으로
내가 부자들의 모가지에 칼을 들이대고
경찰에 쫓기는 몸이 되었을 때.

김남주는 고향에서 초중학교 재학 시절 집안일을 하느라 낮에 공부해본 적이 없었단다. 아침에 학교 가기 전에나 오후에 집에 돌아와서는 소를 먹이거나 꼴을 베어야 했다. 밤엔 호롱불 기름이 닳아지니 어서 불 끄고 자라는 부모의 성화에 공부하기 어려웠다. 김남주는 해남중학교 다닐 때 자기 하고 싶은대로 공부할 수 있는 읍내 아이들을 가장 부러워했는데, 이런 환경에서도 그는 항상 1등이었단다.

▲ 김남주 생가. ⓒ해남군청

김남주는 1964년 해남군에서는 1년에 한 명 들어갈까 말까 한 광주제일고등학교에 합격했다. 그러나 "광주 학생 운동의 전통에 빛나는" 학교에서 획일적으로 대학 입시 위주의 교육을 시켰으며, 당시 한일 국교 정상화를 앞두고도 "반민족적 한일 굴욕 외교 반대 투쟁을 일으키지 못했다"면서 1965년 자퇴했다.

그는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어 했지만, 면서기나 산감지기라도 되어 가문의 울타리 노릇을 해야 한다는 아버지의 강권과 소원을 무시할 수 없어 대입 검정 고시를 거쳐 1969년 전남대학교에 입학했다. 대학에서 도서관의 책을 가장 많이 이용하면서도 수업엔 가장 많이 빠진 학생이었다.

수업에 관심과 흥미를 갖지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 아버지의 농사를 거들다, 1972년 10월 박정희의 이른바 '대통령 특별 선언'을 듣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며 급히 광주로 갔다. 죽마고우이자 전남대학교 동기생인 이강과 '10월 유신' 반대 투쟁을 결의하고, 1972년 12월 비상 계엄 상태에서 전국 최초의 유신 반대 지하신문 <함성>을 만들어 광주 시내 대학교와 고등학교들에 배포했다. 1973년 서울로 피신해 신문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해 <고발>로 이름을 바꾸어 살포하려다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8개월 만에 집행 유예로 풀려났지만 전남대학교에서 제적되었다.

이후 김남주는 1974년 해남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창작과비평>에 시 몇 편을 발표함으로써 시인이 되었다. 그 때 심사를 맡았던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그의 시가 "칠흑 같은 어둡고 깊은 밤중의 잠속에 빠져 있는 혼수상태의 문단에 칼을 들이대는 섬뜩함으로 다가온다"고 평했다.

그 후 광주에서 서점을 운영하기도 하고 민중 문화 운동에 몸담기도 하다가 중앙정보부에 쫓겨 서울에서 피신하던 중 1978년 김남주는 '남민전'에 가입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국제 제국주의의 일체의 식민지 체제와 그들의 앞잡이인 박정희 유신 독재 정권을 타도하고 민족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연합 정권을 수립한다"는 것과 "7.4 남북 공동 성명의 원칙과 토대 위에서 남북 관계를 조속히 개선하고 조국의 평화적 재통일을 촉진한다"는 것을 포함했다.

그는 '남민전'의 '전사'로 활동하다 1979년 체포되어 15년 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9년 만인 1988년 풀려났다. 이른바 1973년의 <함성> 사건과 1979년의 '남민전' 사건으로 두 번에 걸쳐 10년 간의 옥살이를 한 것이다. 석방된 후 옥바라지하던 '남민전' 동지와 1989년 결혼해 1990년 아들을 낳고 '김토일(金土日)'이라 이름 지었다. 월, 화, 수, 목 4일간 열심히 일하되 금, 토, 일 3일간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라는 뜻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좋은 세상의 문턱에도 이르지 못한 채 김남주는 1994년 옥중에서 얻은 췌장암으로 쉰 살도 채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그가 남긴 약 500편의 시 가운데 약 400편은 감옥에서 쓴 것이었다.

이러한 김남주의 시에 나타나는 반외세 자주정신은 지나칠 만큼 강하고 투철하다. 특히 미국에 대해서는 이런 말까지 해도 될까 싶을 정도다. '양키'와 '원흉', '압제'와 '착취' 그리고 '제국주의' 등의 말을 나무도 자연스럽게 내뱉는다. 예를 들면, <희망에 대하여 2>에서는 다음과 같이 직설적으로 거침없이 외친다.

양키야말로 학살의 숨은 원흉이고
양키야말로 이 땅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양키가 이 땅에 온 것은 해방군으로서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왔다고
가르쳐주는 선생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그리하여 한일 관계는 협력 관계가 아니라 모순 관계에 있고
이 모순의 고리를 끊어버리지 않는 한
이 땅에는 자유도 통일도 평화도 없다고
씌어진 책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해방 투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준비하고
그것을 내부적으로 조직하고 활성화시키는
혁명 단체 하나 없는 이 나라에서
도대체 어떤 희망을 가져야 하나

<방>에서는 아래와 같이 '압제'와 '착취'를 일삼는 '양키 제국주의'에게 사라지라고 호통친다.

허가 없이 도서를 열독해서도 아니 되고
허가 없이 집필 도구를 소지해서도 아니 되는
그렇다고 펜과 종이를 허가해 주지도 않는 이 방
(…)
아무것도 남지 말거라
마루 위에 벽에 또는 허공에
증오의 손톱으로 내가 새겨놓았던 말들-
압제여 착취여 양키 제국주의여
그 흔적마저 사라져 없어져버리거라

1980년 5월 광주 항쟁을 계기로 한국에서 반미 운동이 폭풍처럼 일어나기도 했지만 그는 훨씬 이전부터 강한 반미 감정을 품어왔던 모양이다. 사실 1980년 이전까지 미국은 우리에게 해방을 가져다주고 전쟁에서 구해주었으며 경제 성장을 이끌어준 고맙고 아름다운 나라라는 인식이 널리 퍼져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죽마고우 이강에 따르면, 김남주는 "천성적으로 타고난 것처럼 보일 만큼 (1960년대 중반) 고등학교 때부터 반미 감정이 유별났다"고 한다.

김남주는 문학 평론가 김희수의 표현대로 "외세로부터 탈피해야 하는 이 땅의 앞날을 누구보다 먼저 간파하고 그 실천의 대열에 서서 아메리카의 허상을 읽었던 사람"이었다. 1960년대 말부터 대학 다닐 때는 "양키 용병인 군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여" 1970~80년대 대학에서 필수 과목이었던 교련(敎鍊 : 군사 훈련)을 한 시간도 받지 않았단다. 짓궂기도 했던 모양이다.

친구들과 광주 시내 미국공보원 주위를 지나갈 때 앞에 서양인 청년과 한국 여자가 팔짱을 끼고 걸어가자 뛰어나가 서양 청년의 엉덩이를 냅다 차버렸다고 한다. 어느 한 겨울 폭설이 내리고 칼바람이 휘몰아칠 때 전남대학교 인문 대학의 미국인 영어 교수가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있었는데, 김남주가 눈뭉치를 몇 개 만들어 그에게 힘껏 던져 눈자위에 명중시켰단다. 그 교수가 수업 시간에 질문하면 김남주는 일부러 엉뚱하게 대답하거나 욕설을 섞어 대꾸하기도 했단다.

"주둔군의 백성으로서 우월감에 젖어 약소국의 대학생을 가르친다는 뻔뻔한 모습"을 김남주는 "살모사를 본 듯 싫어했다"는 것이다. 또한 영어영문학과 학우들이 그 미국인 교수 앞에서 알랑거리는 모습을 보면 김남주는 "피가 거꾸로 솟는 듯" 분노하기도 했단다. 그래서 교련 과목처럼 교양 필수 과목인 그 교수의 과목을 수강하면서도 시험은 거부했다니 학점 미달로 졸업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시인 김남주. ⓒ연합뉴스
이와 관련해 한국 문학계에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일이 나타나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부터 국내외 문인들이 그의 석방을 촉구해왔는데, 특히 9년째 감옥에 갇혀있던 1988년 절정에 이르렀다. 다양한 민중 운동 단체와 문인 단체 그리고 인권 단체들이 나섰다. 문학인 500명이 탄원서를 내기도 하고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는 가운데, '반외세 민족 자주화의 선봉' <김남주론>과 그의 '대표 시집' <조국은 하나다>가 출판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소설가 이윤섭은 그를 기리며 3권짜리 장편 소설 <공존의 그늘>을 썼다. 감옥에 있는 저항 시인의 이름을 그대로 따 '남주'를 주인공으로 삼았다. 카투사(KATUSA)가 되어 부대 안에서 미국이 "정의의 사도라는 미명 아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종종 다양한 방법과 전술을 사용하는 것을 비판하며 미국은 결코 한국의 동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김남주는 "양키 용병인 군대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여" 대학에서 필수 과목이었던 교련을 한 시간도 받지 않았다는데, 주한 미군을 지원하기 위해 주한 미군에 파견된 한국군 병력의 주인공으로 그를 삼은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측면이 있지 않을까. 비록 그를 내세워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미군 부대의 문제점을 파헤치지만 말이다.

아무튼 김남주는 1960~70년대 대학을 다닐 때부터 미국을 비판하며 거부했기에 특히 1980년 5월의 광주 학살 이후엔 유난히 강한 반미 감정을 담아낸 시를 무수하게 쏟아냈다. 먼저 <학살 1>에서는 한반도를 분단시킨 미국의 죄악과 위선을 다음과 같이 폭로한다.

누가 너를 남과 북으로 갈라 놓았느냐
누가 네 마을과 네 도시를 아비규환의 아수라로 만들어 놓았느냐
누가 허리 꺾인 네 상처에 꽃잎 대신 철가시바늘을 꽂아 놓았느냐
판문점에서 너를 대표한 자 누구이며
도마 위에 너를 올려놓고 초치고 장치고 포치고 차치고
내 조국의 운명을 요리하는 자 누구냐
입으로는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고
뒷전에서는 원격조종의 끄나풀로 꼭두각시를 앞장세워
제 조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싸우는 민중들을
계획적으로 학살하는 아메리카여
보아다오, 너희들과 너희들 똘만이들이 저질러 놓은 범죄를
음모와 착취로 뒤덮인 이 땅을
보아다오, 너희들이 팔아먹은 탄환으로
벌집투성이가 된 내 조국의 심장을

<학살 2>에서는 광주학살을 미국 관리들이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는 것을 아래와 같이 반박한다.

밤 12시 나는 보았다
미국 민간인들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을

<학살 3>에서는 광주 학살에 대한 미국의 책임과 음흉함을 비판한다.

학살의 원흉이 지금
옥좌에 앉아 있다
학살에 치를 떨며 들고 일어선 시민들은 지금
죽어 잿더미로 쌓여 있거나
감옥에서 철창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그리고 바다 건너 저편 아메리카에서는
학살의 원격조종자들이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다

그리고 <매국노>를 통해 미국과 그 하수인 남한의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에 대해 다음과 같이 통렬하게 꾸짖는다.

피 묻은 칼로
제 나라 허리를 잘라 그 아랫도리 반쪽을
이민족의 코앞에 발아래 바치고 그 대가로
제 동포의 머리 위에 군림한 자
(…)
이민족의 용병으로 미8군의 고용살이로 노예살이하면서
나라의 다른 반쪽 그 독립의 가슴에 괴뢰의 총칼을 들이대는 자
그 총구 그 칼로 반공 쿠데타로 일어나
(…)
무엇이라 불러야 하나 그런 자를 나는
아메리카의 우방에서 흔해빠진 이름 독재자라 불러야 하나
백악관에서 입안되고 CIA에서 변조되고 미8군에서 급조되어
제국주의의 총구에서 튀어나온 상품의 이름 새 시대의 새 지도자라 불러야 하나
(…)
이 아무개 박 아무개 전 아무개를 독재자라고도 부르지 않겠다
신식민지에서 무슨 놈의 대통령이고 독재자냐 괴뢰면 괴뢰고 하수인이면 하수인이지
(…)
나는 부르겠다 놈들을 이렇게 이렇게 부르겠다
민중의 고혈이나 취해 뒤우뚱좌우뚱 흔들리다가 여차하면
한보따리 챙겨들고 나라 밖으로 도망치는 산적들이라고
민족의 이익을 팔아 제 뱃속을 채우다가 들통나면
허겁지겁 미군 비행기를 타고 나라 밖으로 줄행랑치는 매국노라고.

나아가 이토록 암담한 현실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시인의 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힌다. 시인으로서 나라와 사회의 죄악을 폭로하고 만인에게 선전하며 민중들을 고무해 자유를 위한 투쟁에 나아가자고 선동하는 일을 하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한 것이다.

수천의 시민을 학살하여
양키의 이익을 지켜주고
그 대가로 세자책봉의 영광을 누리는 것이
장군인 너의 일이라면
(…)
홀랑 까진 마빡 위에 지르르 기름기가 흐르고
그 위에 학살과 저주의 낙인이 찍힌 채
양키의 부름으로 바다를 건너는 것이
반역자인 너의 일이라면
(…)
시인인 나의 일은?
이 자가 저질러놓은 죄악
그 하나하나를 파헤쳐
만인에게 만인에게 만인에게 고하고
일깨워 민중들 일어나 단결하게 하고
자유의 신성한 피의 전투에
나아가자 나아가자 앞으로 나아가자 노래하는 일.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김남주는 대학에 들어가며 왜 영어영문학을 전공으로 택했을까. 1960년대 고등학생 때부터 미국과 일본을 비롯한 외세를 거부하고 미국인을 혐오하면서도 굳이 영어영문학과에 입학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중학생 때부터 영어 단편 소설을 읽을 정도로 영어를 잘해서였을까. 물론 영어는 미국인들의 언어에 앞서 영국인들의 언어였고 세계 공용어가 되었지만 말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아야 싸워서 이길 수 있기에(知彼知己 百戰不殆), 적으로 간주한 미국을 제대로 알고 싸워서 이기기 위한 것이었을까.

그의 고향 후배로 해남고등학교 교사이며 김남주 기념사업회장을 맡고 있는 김경윤은 <선생님과 함께 읽은 김남주>에서 그가 영문과에 들어간 이유가 "외국의 진보적인 책들을 직접 읽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남주의 가장 가까웠던 친구 이강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남주가 영어영문과를 선택하면서 두 가지 이유를 대더구만. 하나는 당시에 영문학과가 타 학과들보다 커트라인이 높아서 머리 좋고 예쁜 여자애들이 많이 몰린다는 점이었지. 내가 알기로 남주가 영문학과를 때려치우지 않고 그럭저럭 4년을 다닌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 같아."

이를 인용해 언론인 겸 평론가인 김삼웅은 <김남주 평전>에서 "그 역시 한편으로는 평범한 청년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라고 했는데, 김남주가 친구 이강에게 건넨 말엔 농담이 섞여 있지 않았을까. 일찍이 사회와 나라 문제에 관심 갖고 고등학교를 자퇴하기까지 할 정도로 강한 의식을 지니고 조숙했던 청년이 "머리 좋고 예쁜 여자애들"을 만나기 위해 영어영문학과를 택했겠느냐는 뜻이다.

참고로, 지난날 북한에서는 미 제국주의를 '철천지 원쑤'로 삼고 거의 모든 미제(美製)를 거부하면서도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교육을 중시했다. 김일성은 "만일 청년들이 일어와 영어를 한 마디도 모르면 앞으로 전쟁마당에서 적을 붙잡아놓고도 처리하기 곤란할 것이다. 청년들은 누구나 다 영어나 일본말로 '손들어!', '총을 버리고 투항하면 쏘지 않는다' 등의 간단한 군사 용어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교시했던 것이다. "철천지 원쑤 미국과 숙적 일본 제국주의자들"을 잡기 위해서는 그들의 말부터 알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이에 반해 남한의 일부 대학생들은 1980년대 중반 이후 남한에서 반미 감정이 폭발적으로 고조될 때 영어 사용을 될수록 자제하거나 거부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반미 투쟁의 효과적 무기"로 일상 생활을 통해 반미주의를 발전시킨다는 '생활 문화 운동'을 전개하면서 미제 청바지를 입지 말고 미국 팝송을 부르지 말자고 했다. 미국 담배를 사지 말고, 코카콜라를 마시지 말자고도 했다. 내가 1980년대 말 서울에서 영어 학원 강사로 잠시 일할 때 한 대학생이 "요즘 우리 운동권 친구들은 영어공부 하지 않는데 수강생들이 있느냐"고 묻는 일도 있었다.

여하튼 태생적으로 반미 감정을 지닌 듯했던 '독서광' 김남주는 대학의 영어영문학과에 들어가 영어로 써진 책을 많이 읽었던 모양이다. 일어책도 많이 읽었던 것 같다. 1980년 12월 감옥에서 형님에게 보낸 편지 끝엔 집에 있는 책 중에서 일어로 된 시집을 부쳐달라고 부탁하고, 1984년 9월 여동생에게 보낸 편지는 "집에 있는 시집을 있는 대로 보내라. 국어판이건 일어판이건 영어판이건 가릴 것 없이"라는 구절로 끝낸다.

사실 자주 통일을 위한 그의 전투적 시문학은 1985년 2월 연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듯, 외국인 작가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10년의 감옥살이를 끝낸 뒤 결혼했던 연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인용한다.

"6년째 접어들고 있는 징역살이입니다.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문학책 중에서 내가 관심을 가지고 읽었던 것은 발자크, 셰익스피어, 하이네, 푸시킨, 레르몬토프, 네크라소프, 고리키, 고골리, 톨스토이, 숄로호프, 브레히트, 네루다, 체르누이세프스키, 루이 아라몽, 마야코프스키, 루카치, 게오르그, 뷔히너 등의 제 작품입니다. 브레히트의 시와 희곡은 목적 문학으로써는 큰 효과를 거둔 것 같지만 문학의 예술성의 측면에서는 좀 떨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참된 문학을 내가 분별할 수 있도록 지도해준 사람은 게오르그 루카치 선생입니다. 나는 그 사람의 저작을 통해 하이네를 새로 알고, 톨스토이를 다시 읽게 되고, 에밀 졸라, 카프카, 브레히트 등의 실험 소설, 전위 문학을 비판적인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의 가르침으로 게오르그, 뷔히너를 알게 되었고, 현실을 인식하는 기초과학으로써의 경제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의 리얼리즘론에서 작중 인물의 목적의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있지 않은 점에 불만이 있기는 하지만 문학 작품에서 작중 인물이 어떤 이데올로기를 의식적으로 들고나올 경우의 약점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김남주가 위 편지를 썼던 1985년은 한국에서 운동으로서의 '민중 문학'이 전개되기 시작할 무렵인데, 그는 이미 감옥 안에서 민중 문학의 선구자나 이론가들을 두루 섭렵했던 것 같다. 1980년대 민중 문화 운동을 이끌었던 분야 가운데 하나가 연극이었고, 그러한 연극 운동을 이끌었던 게 독일 출신 연극 작가이자 연출가였던 브레히트(Brecht)의 연극론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그의 시와 희곡이 운동성은 크지만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시인의 비판에 숙연해진다. 이와 반대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는 헝가리 출신 루카치(Lukacs)의 '비판적 현실주의 (critical realism)'는 운동성이 부족하다는 지적도 깊이 새길 만하다.

김남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며 이러한 문학 공부를 통해 '불퇴전의 실천 시인'이 되었다. 특히 반외세 통일 문학 분야에서는 작품의 양으로든 내용의 강도로든 그를 앞지를 시인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해방과 통일을 부르는 걸판진 무당"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을 시인이라기보다는 전사라고 했던 그에게 시는 자유와 민주주의 그리고 자주와 통일을 위한 무기였던 셈이다.

▲ 시집 <조국은 하나다>(김남주 지음, 남풍 펴냄, 1988년). ⓒ남풍
1988년 그가 감옥에 있을 때 그의 대표 시집 <조국은 하나다>를 편집했던 문학 평론가 염무웅은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반제(국주의) 민족 해방과 조국 통일에의 열망을 누구보다도 정열적으로, 가장 격정적으로, 노래하고 싸우는 김남주 시인"의 "문학은 압제와 착취에 신음하는 전 세계 민중의 가장 귀중한 예술적 재보이며 자유와 해방을 지향하는 전 인류적 투쟁의 가장 빛나는 무기로 되고 있다."

또한 그의 시는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직설적이고 선명하다. 군더더기 없이 단순하고 간결하다. 단호하고 투쟁적이다. 나 같은 정치학자도 문학 평론가나 해설자의 도움 없이 그의 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다. 가수 안치환이 2000년부터 그의 시에 곡을 붙인 '헌정 음반'을 만들어 대중을 상대로 발표해올 수 있었던 배경도 될 것이다.

김남주가 <나의 이름은>에서 "일제가 뒷문으로 쫓겨갈 때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고 / 미제가 앞문으로 쳐들어올 떼 세상에 나왔습니다"고 밝혔듯, '소위 해방둥이'로서 통일을 위해 절규했던 시 2편을 결론삼아 소개한다. 통일 문학의 역할을 보여주는 시요, 우리가 나아가야 할 통일 운동의 방향과 목표를 가리켜주는 시다. 30여년 전에 쓰인 글이지만 오늘의 현실에도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강산이 세 번 변하고도 남을 시간이 흘렀지만, 외세는 변함없이 그대로 머물러있고 남북 관계 역시 변함없이 꽉 막혀있지 않은가. 문학 평론가의 해설도 필요 없고 통일 운동가의 설명도 필요 없기에 조금 줄여서 그대로 옮긴다.

조국은 하나다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꿈속에서가 아니라 이제는 생시에
남 모르게가 아니라 이제는 공공연하게
"조국은 하나다"
권력의 눈앞에서
양키 점령군의 총구 앞에서
자본가 개들의 이빨 앞에서
"조국은 하나다"
이것이 나의 슬로건이다
(…)
나는 또한 쓰리라
인간이 세워놓은 모든 벽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남인지 북인지 분간 못하는 바보의 벽 위에
남도 아니고 북도 아니고
좌충우돌하다가 내빼는 망명의 벽 위에
자기기만이고 자기환상일뿐
있지도 않은 제3의 벽 위에
체념의 벽 의문의 벽 거부의 벽 위에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
나는 또한 쓰리라
노동과 투쟁의 손이 미치는 모든 연장 위에
조국은 하나다라고
(…)
아메리카 카우보이와 자본가의 국경인 삼팔선 위에도 쓰리라
조국은 하나다라고
(…)
그리고 나는 내걸리라 마침내
지상에 깃대를 세워 하늘에 내걸리라
나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키가 장대 같다는 양키들의 손가락 끝도
언제고 끝내는 부자들의 편이었다는 신의 입김도
감히 범접을 못하는 하늘 높이에
최후의 깃발처럼 내걸리라
자유를 사랑하고 민족의 해방을 꿈꾸는
식민지 모든 인민이 우러러볼 수 있도록
겨레의 슬로건 "조국은 하나다"를!

민족 해방 투쟁 만세

10년 전 오늘 그대는 외쳤지
두 팔 번쩍 치켜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세 번 외쳤지
민족해방투쟁 만세! 민족해방투쟁 만세! 민족해방투쟁 만세!
그러자 당연하게도 경찰이 와서 두억시니 같이는 와서
그대를 채갔지 솔챙이가 병아리를 채가듯 그렇게
그리고 당연하게도 신문과 텔레비전은 일제히 떠들어대기 시작했지
그들은 이렇게 떠들었지 미친놈 날궂이한다고
해방된 지가 언제적인데 자다가 봉창두드리는 소리한다고
'자생적 공산주의' 운운하면서 '배후에 고정간첩'이 없나 눈알을 두리번거리는 놈도 있었지
(…)
벗이여 10년 전의 해방자여
이제 모든 것이 확연해졌다네 그 동안 40년 동안
우리의 눈과 귀를 가려왔던 제국주의의 가면은 벗겨지고
놈들이 이땅에서 저질러 놓은 모든 범죄가 드러났다네 청천백일하에
이제 알고 있다네 세 살 먹은 삼척동자도
누가 조국의 허리를 두 동강 냈는가를 무엇때문에
미국은 이승만을 사주하여 이남에 꼭두각시정권을 세웠는가를
이제 알고 있다네 부엉이의 마을 한낮의 소경도
귀머거리에 입달린 벙어리도 그가 조선의 아들이고 딸이라면
제 땅에서 뿌리 뽑혀 오갈 데 없는 가난뱅이라면
알고 있다네 제국주의의 살인청부업자 군장성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는 한 민주주의란 개좆나발이라는 것을
제국주의 군대가 이땅의 언덕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자유고 통일이고 미국놈 좆대강이나 빨아지는 것을

자유주의 환상은 깨지고 벗이여
투쟁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고 있네 그것은
10년 전의 그대가 외쳤던 만세 민족해방투쟁이네
민족해방 없이는 민족의 자유, 민족의 통일이란 있을 수 없다는 민족의 자각이네.

김남주는 이렇게 미국이 분단의 원흉이고 통일의 걸림돌이라고 외쳤다. 그리고 양키 제국주의에 종속되어 있는 한 민족의 해방과 통일도 이룰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이 절규한 때로부터 한 세대가 흐른 지금까지 미군은 여전히 주둔하고, 미국에 대한 남한의 종속은 변함없으며, 자주와 평화통일의 길은 멀기만 하다. 심지어 1950년대 한국 전쟁조차 아직 끝내지 못하고 있다. 60여년이 흐르도록 어정쩡한 정전 또는 휴전 협정을 고수하며 종전 또는 평화 협정을 맺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을 악마로 만들고 주적으로 유지하며 이를 핑계로 급속하게 떠오르는 중국을 견제하고 봉쇄하기 위한 미국의 아시아 정책 때문이다. 30여년 전 자주와 통일을 향한 '전사' 시인의 '함성'이 오늘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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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봉

이재봉 교수는 1983년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94년 미국 하와이대학교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1996년부터 원광대학교 정치외교학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18년 현재 '남이랑북이랑' 공동대표, '통일경제포럼' 공동대표, '함석헌학회' 회장 등을 맡고 있습니다. 저서로 <두 눈으로 보는 북한>, <이재봉의 법정증언>, <문학과 예술 속의 반미>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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