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레이건이 될 수 없는 이유

[정욱식 칼럼] '흡수 통일' 꿈꾸는 박근혜, 글렀다

2000년 이 맘 때의 일이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졌고, 북미 관계에도 커다란 변화의 조짐이 보이던 시점이었다. 당시 나는 이러한 분위기에 환호하면서도 김대중 정부의 '4대 전략 증강 사업'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4대 사업은 차세대 전투기, 이지스함, 패트리어트, 공격형 헬기 도입 사업을 일컫는다.

나는 이들 사업 가운데 이지스함과 패트리어트 도입은 미국 주도의 미사일 방어 체제(MD)에 편입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물론이고 동북아에서 군비 경쟁이 촉발될 것이라는 주장을 폈다. 물론 정부는 이러한 문제 제기가 기우에 불과하다며 일축했다.

그런데 사석에서 만난 국방부의 한 고위 관료로부터 주목할 만한 얘기를 들었다. 그는 "북한과 군비 경쟁에서 우리가 완승할 수 있다"며, 미국 레이건 행정부의 예를 들었다. 도널드 레이건이 MD의 원조에 해당하는 전략 방위 구상(SDI)을 발표해 소련을 군비 경쟁으로 유도했고, 소련이 군비 부담을 못 이겨 결국 몰락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북한이 한미 동맹에 맞서 군비 경쟁에 나서면 북한도 망할 것"이라며 "그건 곧 통일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건 그의 사견이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 내에 이런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걸 접하곤 적지 않게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대통령의 뜻은 '흡수 통일'에?

이 얘기를 꺼낸 이유는 16년 전 이 관료의 생각이 박근혜 정부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현 정부의 통일 정책은 사실상 흡수 통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 인권 문제도, 핵 문제도 "궁극적인 해법은 결국 통일"이라는 대통령의 발언 속에 이 망상이 어른거리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통일이 되면 "어떠한 차별과 불이익 없이 동등하게 대우" 받게 될 것이라며 북한 주민과 간부에게 통일에 동참해줄 것을 호소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그 최신판에 해당된다.

▲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발표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청와대

대통령의 마음이 흡수 통일에 쏠리자, 관련 부처도 충성 경쟁을 벌이고 있다. 국가정보원은 북한 체제의 불안정성을 극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여념이 없다. 국방부는 북한 급변 사태 시 한미연합군을 투입해 통일을 시도할 것이고 북핵 사용 징후 시 '김정은 참수 작전'에 나설 것이라고 말한다.

통일부는 '탈북발표부'라는 오명을 얻을 정도로 집단 탈북과 고위층 탈북을 공개하면서 "북한 체제가 이미 한계에 이르고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지배계층의 내부 결속이 약화하고 있지 않느냐"는 평가까지 내놓는다.

나의 착각이길 바라지만, 사드 배치 결정도 흡수 통일 전략의 일환으로 나온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경제적으로 궁핍한 북한이 사드와 같은 전략 무기에 맞서 군비 증강에 나서면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붕괴하지 않겠냐는 막연한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바다의 사드'라는 이름을 붙이곤 사드보다 요격 고도가 높은 SM-3 도입설까지 흘리고 있는 걸 보면 이러한 의구심은 더욱 증폭된다.

앞서 소개한 국방부 고위 관료의 발언 말고도 이런 사례도 있다. 2008년 8월 김정일 당시 국방위원장이 뇌 관련 질환으로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 이명박 정부는 갈팡질팡하던 대북 정책의 목표를 잡았다. 바로 흡수 통일이었다. 그리곤 미국 정부에게 북한이 곧 망할 것이라며 같이 통일을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미국은 통일 코리아에 대한 일본의 우려를 불식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MD를 고리로 삼아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나가야 한다고 요구했다. MB 정부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비교적 충실히 받아들였다.

당시 MB 정부 내에 퍼져 있는 생각은 이랬다. '경제적으로 거의 망한 북한이 군비 경쟁에 나서면 붕괴를 재촉하는 것이고, 김정일의 와병은 정치적 붕괴도 다가오고 있다는 걸 의미한다.'

이걸 포착한 미국은 MD를 앞세워 한국을 미=일 동맹에 편입시키려고 했다. 그 결과 북핵 협상은 유실되었고 한-미-일 삼각 동맹이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과 핵 실험에 나서면서 이러한 퇴행적인 흐름은 더욱 탄력을 받고 말았다.

'레이건의 신화'가 위험천만한 이유

레이건은 미국 네오콘의 우상이다. '스타워즈(전략 방위 구상의 별칭)'에 힘입어 총성 한방 울리지 않고 소련을 무너뜨려 미국이 냉전에서 승리자가 되었다는 자기만족적인 해석을 가지고 말이다. 이명박 정부는 물론이고 박근혜 정부 역시 '코리안 네오콘'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이들과의 세계관이 너무나 흡사하다.

그렇다면 '레이건의 신화'가 북한에도 통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대단히 비현실적이고도 위험천만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우선 정부는 북한 붕괴론에 사로잡혀 있지만, 북한 사정에 밝은 사람들의 얘기는 전혀 다르다. 북한 민주화 및 인권 운동을 하는 보수적 인사조차 "김정은 시대의 북한 주민의 만족도는 김정일 시대보다 훨씬 높다"고 말할 정도다.

자존심 상하는 얘기일지 모르지만, 군비 경쟁에서도 남한이 불리하다. 국방부에 따르면 남한은 북한보다 30배나 많은 군사비를 쓰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도 군사적으로 열세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군사비를 써야 북한을 압도할 수 있고, 뱁새(북한)가 황새(남한)를 따라오다가 가랑이가 찢어지게 될까?

북핵과 MD의 경쟁에서 남한이 압도적으로 불리하다는 것도 자명하다. 자체적으로 자원과 기술력을 보유한 북한은 큰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핵과 그 운반수단 능력을 지속적으로 강화할 수 있다. 그런데 이걸 막겠다며 사드를 비롯한 MD 능력을 강화하는 것에는 이보다 수십배나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런데도 북핵을 막을 수 없다. 그 이유는 간명하다. 한반도는 종심이 짧아 북핵을 막을 수 있는 거리와 시간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이 신형 방사포에 핵탄두를 장착하면 군비 경쟁은 남한의 완패로 끝나고 말 것이다.

이게 바로 미소 간의 군비 경쟁과 남북한 군비 경쟁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소련이 미국의 SDI에 맞서 증강한 무기는 주로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이었다. 수량도 비약적으로 늘렸지만, 하나의 미사일에 10개 안팎의 핵탄두를 장착하기도 했고, 진짜 탄두와 가짜 탄두를 섞는 방법도 고안했다. 여러 개의 탄두가 대기권 재진입시 낙하 지점을 달리하는 'MIRV'도 선보이려고 했다. 이러다 보니 1986년 소련의 핵탄두는 무려 4만 개까지 치솟았다. 오늘날 북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군비 부담에 시달렸던 것이다.

설사 북한이 망할 가능성이 높아지더라도 그 결과는 코리아 냉전에서 한국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코리아 아마겟돈'을 야기할 공산이 훨씬 크다. 소련이 몰락해도 미국이 소련을 흡수통일할 일은 없었다. 그래서 전쟁도 없었다. 하지만 한국이 북한 붕괴 징후시 통일을 하려면 어떠한 형태로든 전쟁을 감수해야 한다.

이러한 점들이 바로 미소간의 '대륙 간 지정학'과 남북한의 '휴전선 지정학'의 본질적인 차이다. '레이건의 신화'는 결코 한반도에선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첨언하자면, 미=소 냉전이 평화적으로 종식된 데에는 SDI '강행'이 아니라 사실상의 '포기'가 더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미국은 당시 가치로 약 500억 달러를 투입하고도 기대했던 성과가 나오지 않자 관련 예산을 급격히 줄였다. 그리고 결국 레이건은 고르바초프와의 협상을 선택했다. 레이건의 'SDI 철회'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新思考)가 냉전 종식을 향한 '케미'를 일으킨 것이다.

박근혜 정부가 레이건으로부터 배우고 싶은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허망한 '스타워즈'가 아니라 적대국 지도자와의 유대를 만들어가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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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식

정욱식 평화네트워크 대표는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군사·안보 전공으로 북한학 석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9년 대학 졸업과 함께 '평화군축을 통해 한반도 주민들의 인간다운 삶을 만들어보자'는 취지로 평화네트워크를 만들었습니다. 노무현 정부 대통령직인수위원회 통일·외교·안보 분과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저서로는 <말과 칼>, <MD본색>, <핵의 세계사> 등이 있습니다. 2021년 현재 한겨레 평화연구소 소장을 겸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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