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을 위한 나라는 없다

[프레시안 books] <정세현의 외교 토크>

이 서평의 제목은 천재 감독 코엔 형제(Coen Brothers)의 2007년도 작품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패러디했다. 이 영화는 전 세계 총 110개 영화제 가운데 80개 가까운 영화제에서 수상했으며, 까다롭기로 손꼽히는 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10점 만점을 부여할 정도로 걸작으로 알려진 영화다.

영화의 제목은 살인마를 쫓는 늙은 보안관 벨이 산전수전 다 겪고 나이가 들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 여기고 살았지만, 예측은 틀렸고,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는 무기력함만 확인한다는 것에 착안했다.

사실 이 역시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윌리엄 예이츠가 자신의 작품 속 이상향 '비잔티움'조차 현실과 다름없는 고통의 세계임을 고백하는 '이곳은 노인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를 살짝 비튼 것이다.

이 영화 제목을 패러디한 이유를 말하자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신작 <정세현의 외교 토크>(서해문집 펴냄)와 영화가 가진 두 가지 연결 지점 때문이다. 하나는 영화 전체에서 느껴지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불예측성과 부조리에 대한 절망감이며, 다른 하나는 절망감 속에 그럼에도 스스로 살아남지 않으면 아무도 챙겨주지 않는다는 차가운 현실감이다.

지정학적 저주와도 같은 외교 환경에서 '한국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자각과 함께 결국 우리가 스스로 개척하고 살아내야 하는 시시포스적 명제를 확인한다. 책의 끝에서 저자가 말한 "외교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듯이 '나' 외에는 모두 남이라는 투철한 인식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자기 중심성 바탕에서 냉철하게 국가 이익을 판단해야죠"라는 고백은 영화의 주제와 닿아있는, 책의 핵심 주제다.

▲ <정세현의 외교 토크>(정세현 지음, 서해문집 펴냄). <정세현의 외교 토크>는 정치학 박사이자,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에서 연속으로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던 저자의 '토크 3부작'의 마지막 완결판이다. 따라서 2010년 <정세현의 정세 토크>, 2013년 <정세현의 통일 토크>와 함께 읽으면 더 좋은 것은 불문가지다. ⓒ서해문집
책장을 넘기면 금방 알 수 있듯이, 한 가지 주제를 놓고 집필한 것이 아니라 질문하고 답하는 인터뷰 모음집이다. 2013년 4월부터 2016년 2월까지 <프레시안>에 연재한 '정세현의 정세 토크'에서 한국 외교와 관련된 내용을 묶어 놓았다. 일반 외교서는 아니며, 저자가 평생을 매달려온 남북 관계와 통일 문제를 외교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다.

남북 분단 해소와 함께 통일과 평화에 이르기 위해 한국 외교가 어떤 원칙과 비전 그리고 수단을 가지고 나가야 하는지를 말한다. 남한을 중심에 놓고 동북아 4강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와의 이해관계의 맥락에서 대북 정책을 논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마오쩌둥(毛澤東) 연구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은 중국 전문가이자, 박정희부터 노무현까지 일곱 정부를 거치며 통일부에서 잔뼈부터 주무 장관까지 지낸 남북 관계 전문가다.

논의의 중심을 구성하는 것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벌어졌던 북한 핵 실험과 로켓 발사, 개성공단 중단, 목함 지뢰, 전시 작전권 전환 연기 등 대북 관련 주요 사건과 사드, 평화 협정, 통일 등 주요 이슈에 대한 해석과 함께 우리가 선택해야 할 대안들을 제시한다.

책은 3부로 나뉜다. 1부에서는 동북아 역내 국가의 외교 관계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기의 생존을 지키려고 오히려 도발을 통한 긴장을 조성하는 북한, 강국의 꿈을 꾸는 중국의 굴기 전략과 북-중 관계,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북핵 문제를 활용하고, 한국과 일본과의 동맹을 통해 아웃소싱하는 미국, 그리고 미국의 필요를 채우면서 중국의 부상에 대비하고자 재무장에 나선 일본을 차례로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강대국 역학 관계 안에서 한국 외교가 행한 잘못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저자는 박근혜 정부가 중국 견제라는 전략적 의도를 지닌 미국의 북핵 정책을 한미 동맹 강화 차원에서 관성적으로 추종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 경제의 대중 의존도를 고려하여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아닌 외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2부는 분단국의 외교는 곧 통일 문제일 수밖에 없다는 대전제 하에서 남북 관계 개선의 중요성을 지적한다. 저자의 삶의 이력을 규정했던 것은 대학 시절 은사로부터 분단국에서 국제 정치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곧 통일 문제를 잘 풀어나가려는 것이라는 말이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에게 대북 외교는 한국 외교의 출발점이다. 대북 외교는 한국 외교의 걸림돌이자 디딤돌인데, 이명박-박근혜 정부로 대표되는 보수 권력의 북한 몰이해로 인해 전자로만 쏠린다는 것이다.

즉, 보수 정권은 북한에 대한 심각한 인식 장애와 국내 정치적 고려로 말미암아 북한 붕괴론과 흡수 통일에 매몰되어 있다. 북한이 도발하면 북풍 공작을 하고, 북한이 어렵다고 하면 붕괴론을 말하는 사이에서 한발 짝도 벗어나지 못한다.

3부는 한국의 외교 부재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특히 대미 종속적 외교로 말미암아 벌어진 여러 사건을 다루면서 이 책의 핵심 주제이자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외교에서 자기 중심성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거듭 지적한다. 전시 작전 통제권 재연기와 사드 배치 논란에서 한국 외교는 없고, 전적으로 대미 의존뿐이었다는 것이다.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는 국제 정치에서 한미 동맹을 신성시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저자는 대북 정책을 포함해 외교에서 한국이 중심성을 회복하면 미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북한도 설득해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모든 면에서 북한보다 앞선 남한이 대범하고 포용적인 태도로 남북 관계를 선도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정자 또는 촉진자로서 동북아 4강을 조율하는 역할을 해내야 한다는 것이다.

▲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 ⓒ프레시안(최형락)

오늘날 한국의 '정량적 위상'은 과거 우리의 비극적 역사에서 수차례 반복되었던 '고래 사이의 새우'는 분명 아니다. 그러나 한국 외교의 중심성이라는 '정성적 위상'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박근혜 정부의 자화자찬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고래 사이를 헤엄치며 자기의 생존을 지키고, 바다의 안정을 유지하는 영민한 돌고래에 전혀 미치지 못한다. 한국 외교의 중심성이 부재하기 때문에 기껏해야 몸집만 불린 왕새우에 불과하다.

저자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듯이 미-중 관계는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가장 핵심적인 변수이며, 북한 핵 문제 해결의 열쇠는 미국이 가지고 있다. 이런 인식 자체는 사대주의가 아니라 정확한 현실 인식이다. 정말 사대주의는 지금처럼 다양한 외교적 카드를 내팽개치고, 외교 중심성을 상실한 채 미국의 그림자에 숨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239쪽에 등장하는 평화 유지(peace keeping)와 평화 만들기(peace making)의 구별은 지나칠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저자는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의 안보론은 적극적으로 평화를 만들어가면서 자동으로 안보를 보장하는 후자였던 반면, 박정희 정부 이래 보수 정권들은 대북 적대 의식에 매몰되어 북한 핑계만 대는 전자에 머물렀다는 평가를 내렸다.

평화를 만드는 것이 평화를 지키는 것과 병행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안보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주장에 동감하면서도, 보수 정부들이 과연 평화 지키기는 제대로 해왔던가를 되묻고 싶어진다. 특히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평화 유지조차도 제대로 하지 못한 무능한 정부들이다. 그들의 안보는 국민을 불안하게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이득을 챙기고, 민족의 미래를 저당 잡혀 왔을 뿐이다. 평화를 안보의 대척점에 있는 반대 개념으로 만들어버린 안보 포퓰리즘의 책동 속에 우리의 평화적 미래의 가능성은 점점 떨어지고 있다.

<정세현의 외교 토크>는 학자들의 중요한 연구 자료와 정치인의 외교 교본은 물론이고, 일반 독자에게도 쉽고 흥미로는 읽을거리다. 촘촘한 콘텐츠에다 풍부한 사례와 배경 설명을 덧붙여 결코 이해의 차원에서만 가볍게 넘어갈 수 없게 만들고, 중간중간 펜을 들어 아껴둔 다이어리에 차곡차곡 쟁여놓고 싶어진다.

가까운 지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강연이나 방송을 통해서 많이 접해왔던 저자의 사이다 멘트는 마치 음성 지원이 되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종이 밖으로 살아 오르는 것 같다. 촌철살인의 정확한 묘사와 적절한 속담과 격언이 어우러져 때로는 격문처럼, 때로는 경고문처럼, 때로는 세밀한 자문처럼 다가온다.

문제는 세상일이 늘 그렇듯이 이 책을 가장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대통령을 비롯해 현 정부의 외교 관료들이겠지만 십중팔구 아마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한국 외교가 처한 안타까운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2010년에 작고한 미국의 전설적인 외교관 리처드 홀부르크는 생전에 "외교는 한 가지 주제이지만 수많은 변주가 가능한 재즈 음악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주제는 국익이며, 국익이라는 대전제 아래 이를 달성하는 수단은 얼마든지 유연하게 동원할 수 있다는 말이다.

탁월한 정치학자이자, 30년간 한국 외교의 현장을 누벼왔고, 70대에 막 접어든 원로로서 지금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선두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세현의 인생과 이 책에서 홀부르크의 언급이 겹쳐진다.

외교는 어떤 이데올로기의 포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어떤 동맹도 국익보다 결코 앞설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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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의회산하 평화재단 연구원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평가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한미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치경제 등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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