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잠든 사이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 브리핑] 한국 쳐다보지 않는 미국과 중국, 존재감 사라진다

미국 배우 산드라 블록 주연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 <당신이 잠든 사이에(While You Were Sleeping)>는 20년 전 많은 인기를 끌었다. 영화의 내용은 이렇다. 외롭게 살아가던 여주인공이 짝사랑하던 남자의 사고를 목격하고 도와준다. 그런데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남자를 돌보다가 뜻밖에도 그의 동생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스토리다.

그런데 우리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다. 영화처럼 '한국'이 잠든 사이에 한반도를 무대로 벌어지고 있는 미-중 간의 치열한 세력 싸움과 관계 설정이 우리 미래의 운명을 우리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지난 6~7일 양일간 베이징(北京)에서는 미-중 경제전략대화(S&ED)가 열렸다. 2009년부터 미-중 양국이 돌아가면서 개최해왔는데, 이번이 8번째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임기 내 마지막 전략 대화였다.

언론들은 이번 전략 대화가 이전 어떤 회의보다 양국이 남중국해 문제부터 무역 문제, 환율 문제 그리고 인권 문제 등에서 이견과 갈등을 노정했다고 전한다. 미국이 중국의 철강과 알루미늄 등의 과잉 생산 문제를 집중 성토하고 반덤핑 관세 부과와 WTO 제소 카드를 꺼내 들자, 중국 역시 미국의 조치들을 '보호 무역주의'라고 반발하면서 WTO에 맞제소 방침을 표명했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이 구두로 개선을 약속함으로써 일단 봉합은 되었지만 해결된 것은 아니다.

정치 외교 부분에서의 갈등도 첨예했다. 미국은 무엇보다 중국이 지난 2년간 남중국해에 7개의 인공섬과 3개의 활주로를 건설하면서 동남아 국가들과 영유권 분쟁을 벌여온 것을 두고 강하게 비난했다. 애슈턴 카터 미국 국방장관은 "이런 행동을 지속할 경우 중국은 만리장성 안에 고립될 것"이라고까지 했다.

미국은 국제법상 '항해의 자유' 문제를 거론하는 동시에, 동남아 국가들을 회유하면서 일대일로를 포함한 중국의 핵심 대외 정책에 맞섬으로써 지정학적 불안이 증가하고 있다. 미 군함들이 인공섬의 영유권을 결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12해리 내로 항해하고, 수시로 정찰기들을 보내고 있다.

이에 중국도 핵잠수함과 전투기들을 추가로 배치하는 등 강경 대응하고 있으며 방공 식별 구역 선포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전략 대화 기간인 7일에도 중국의 J-10 전투기 2대가 미국 정찰기에 초근접 비행으로 위협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미국의 대중 압박이 수위를 높여가는 양상이다. 미국은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중국이 가진 예상외의 강력한 영향력을 확인한 이후 대체로 수세적이었으나 최근 공세로 전환되었다. 대조적으로, 세일 가스 혁명과 더불어 미국의 경제 회복, 그리고 중국의 경기 악화가 맞물리면서 2015년 이후 중국의 수세가 눈에 띤다. 미국이 전체적으로는 무역 적자가 감소함에도 대중 적자는 작년에 3657억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는 것도 작용했다.

미국 내 강경파들은 오바마 정부의 유화적 자세를 비판하며, 남중국해의 인공섬 건설을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막았어야 했다면서 제2차 세계 대전 직전 독일의 공세에 굴복해서 맺은 뮌헨 협정에 비교했다.

▲ 지난 6~7일 이틀 일정으로 베이징에서 열린 제8차 미-중 전략경제대화. ⓒwikimedia.org

이렇듯 미-중이 갈등 상황으로 기우는 것은 맞지만, 여기에 디스카운트해야 할 요소들은 물론 있다. 먼저 11월 대선을 앞둔 미국 내 정치적 요인이 갈등을 부추기는 이유로 제기된다. 미국의 대선 국면이라는 점에서 중국은 우려하고, 미국은 이를 대중 압박의 계기로 삼고, 대중 강경론자인 공화당 트럼프 돌풍을 견제하려는 것이다.

또 언론들의 선정주의 경향이 더해진다. 1980년대 말 일본의 경제적 부상에 호들갑을 떨던 것처럼, 수년 전부터 중국의 부상에 대한 의심과 공포 마케팅이 성행하고 있다. 이번 전략 대화만 해도 160개의 합의가 있었고, 존 케리 국무장관은 역대 최고의 생산적 대화였다고 평가했음에도 언론은 갈등에만 초점을 두었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따라서 미-중의 갈등과 대립 양상에도 불구하고 결코 군사적 충돌로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세력 전이 과정에서 패권 전쟁을 벌였다는 소위 '투키디데스의 덫(Thucydidies' Trap)'이 미-중에는 적용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미-중의 상호 의존은 거의 결착의 수준으로 미국은 중국의 수출 시장의 3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중국은 미국에게 1.2조 달러를 빌려줬다. 중국에게 빌린 돈으로 미국은 중국 물건을 사고 있는 현실이다.

정치 외교 영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남중국해 문제가 대결의 상징처럼 부각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국제 문제에서 미국과 중국은 협력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식 세계 질서의 최대 수혜자다. 2013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미-중 정상 회담에서 중국은 자국의 핵심 이익을 건드리지 않는다면 미국의 패권 질서에 도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무엇보다 미-중은 현 국제 체제의 안정적 관리가 양국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에 대해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 이를 두고 미-중 협치를 뜻하는 콘도미니엄 체제 또는 심지어 카르텔 체제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중은 갈등과 협력의 이중 구조를 지닐 수밖에 없고, 이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다. 몸집이 불어난 중국은 시간이 갈수록 미국과 쌍무적으로, 아시아 역내에서, 그리고 글로벌 무대에서 지속적으로 부딪칠 것이다. 때로는 구조적인 동인에 의해 초래되기도 하고, 또한 자발적인 정책 의지에 의해 갈등과 협력을 오갈 것이다. 진정한 우호 관계도 어렵고, 그렇다고 충돌을 불사한 대립도 어려운 상황에서 비대칭 양극 체제를 형성한 상태에서 서로의 의도를 살피며 가장 유리한 위치 잡기에 골몰할 것이다.

서로 협력적 관계를 약속하고, 충돌할 경우 모두 피해를 입는다는 당위는 수용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현실에 적용될지는 미지수다. 왜냐하면 이는 상대의 수용과 양보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결코 달성하기 쉬운 목표는 아니기 때문이다. 안정된 양강 체제 또는 G2 체제가 아니기에, 자리 잡는 과정이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중국의 지역 리더십에 대한 확장 욕심과 미국의 기존 리더십 방어, 그리고 그로 인한 중국의 세력권에 대한 침투의 지가 상승 작용을 일으킬 때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

또 다른 문제는 양국 세력권의 경계 설정이다. 한반도, 센카쿠 열도(尖角列島, 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그리고 남중국해가 바로 그런 지점들이다. 미-중 양국이 일방적으로 아시아의 패권을 독점하려 하지 않는다면 전면적 대결은 피할 수 있겠지만, 어떤 경우에도 세력권이 만나는 지점에서 소위 치열한 '간 보기'와 전초전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지점들은 합의와 신뢰를 쌓기보다는, 공포와 불신을 축적하게 만든다. 남중국해를 포함한 이런 예민한 지점들이 미-중 관계의 전부는 아니지만, '판다를 껴안는 사람들(panda huggers)'과 '드래곤을 죽이는 사람들(dragon slayers)'을 구별하는 수단이다. 결국 글로벌 리더십을 가진 미국이 역외와 역내의 경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가 핵심이 될 것이다.

특히 아시아에서의 영향력 감소에 대한 미국의 공포와 의심이 중국의 욕심보다 더 크다는 것과, 미국이 더 깊은 관여를 할수록 역내 안정성은 떨어진다는 점은 미래를 불안하게 만드는 요소다. 중국은 2013년 미-중 정상 회담에서의 신형대국관계를 성공적인 합의라고 보는 반면, 미국은 당시의 회담을 실패라고 판단하고 있다. 게다가 결정적으로 미국은 중국의 공산당 독점 체제에 대한 가치판단이 작동함으로써 중국의 국내 정치에 자기 가치를 부과하려는 유혹을 어떻게 뿌리칠 것인가가 관건이다.

정작 우리가 처한 상황이 훨씬 더 어렵다. 또 다른 경계 지대인 한반도는 남중국해보다 훨씬 더 큰 함의를 가지고 있고, 훨씬 더 딜레마적이다. 미-중 관계가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할 가장 핵심적인 변수다. 이를 인정하는 것은 주체 의식의 실종이 아니라 현실과 인식의 정합이다. 30%에 육박하는 무역 의존도를 보이고 있는 중국과 60년 이상 안보를 의존해 온 미국사이에서 한국에게 미-중의 전략적 관계 설정은 당사국 이상으로 핵심 사안이다.

물론 미-중 갈등이 우리에게 가장 큰 어려움을 줄 것이지만, 콘도미니엄 체제 역시 우리에게 반드시 유리하다고 볼 수 없다. 특히 지금처럼 우리가 가진 외교적 카드가 없을 때는 배제되고 소외될 수밖에 없다.

미-중이 지난 2월 23일 합의한 대북 제재는 한국 외교의 부재를 보여준 단적인 사례다. 미-중이 북핵과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배치를 놓고 첨예하게 갈등하기보다는 일종의 콘도미니엄 체제를 구축해 상황을 안정시킨 것은 우리에게 다소간의 숨 쉴 여유를 준 것은 맞지만, 우리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한국이 한반도 및 동북아에서 이해상관자(stakeholder) 역할을 전혀 못한 것이다.

사드 배치 논란에서도 한국은 미국보다 앞서 강경하게 나갔지만 오히려 미국이 유연성을 보임으로서 한국의 입장만 곤란하게 되어버렸고, 향후 대중 관계에 큰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 재현된 사드 배치 논란에 소극성을 보이자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압력을 받고서 입장을 뒤집었다.

팽팽한 미-중 관계 속에서 양국은 한국의 효용성과 가능성을 점점 낮게 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중국은 다시 북한을 전략적 자산으로 챙기기 시작했고, 미-일 관계는 최상을 달리고, 한국에게 더 얻어낼 것이 없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오히려 한국이 남중국해 문제에 관해 소극적이라고 압박한다. 우리 외교가 잠든 사이에, 미-중이 간을 보는 사이에, 우리의 존재가 한반도의 현실로부터 사라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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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김준형 한동대학교 교수는 조지워싱턴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뒤 미국 의회산하 평화재단 연구원을 지냈고 노무현 정부에서 정책평가위원회 외교안보분과 전문위원 등을 역임했습니다. 한미관계를 포함한 국제정치경제 등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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