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대가 뿔났다…'포스트잇 민주주의'

[신지예의 녹색 수첩] '내가 곧 그녀 혹은 그'…사회 바꾸는 힘

2주 전 열 명 남짓한 청년들이 한 테이블에 모여 앉았다. 각자 살아가며 느끼는 사회의 난감함에 관해 이야기하고 공유하는 '난감한 모임'의 참가자들이었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한마디의 시작으로 데면데면할 줄 알았던 첫 모임은 금세 수다 모임이 되었다.

소득, 일자리, 기본 소득, 성 소수자 권리 등 여러 이슈가 나왔고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사회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이어졌고 놀라울 정도로 우리는 닮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몇 가지 대안으로 정치 참여, 이민 등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누군가 농담조로 "현행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하기는 불가능한 것 아닐까요? 범법 행위라도 저질러야 하는 것 아닐까요?" 라는 말을 했다.

모두 깔깔대며 웃었지만, 인상 깊은 한 마디였다. 국가라는 시스템의 부재를 직감하고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안전한 귀가, 개인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 서로 다름에 대한 인정과 차별 없는 평등, 내가 낸 세금이 우리를 위해서 정당하게 집행되고 있을 것이란 믿음, 시시비비를 올바르게 가려줄 수 있는 사법 시스템과 같이 학교에서 배워 온 국가의 의무가 제대로 실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시민들의 의견을 대변할 정치 세력이 눈에 보이질 않는다는 것은, 미래에 대한 작은 희망마저도 사치로 느껴지게 된다.

강남역 여성 살인 사건 이후 10번 출구 앞에서 시민들이 보여주었던 움직임들은 이런 감정의 공유에서 시작된 것은 아닐까.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수많은 시민이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포스트잇을 이용해 '나도 그 자리에 있을 수도 있었다.' '나 또한 삶 속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다.'라는 고백을 이어나갔다. 한 장의 포스트잇은 수천 장의 포스트잇으로 늘어났다. 날마다 포스트잇의 내용은 변화했으며 그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가 탄생했다.

그 속에는 여성, 특히 청년 여성이 일상에서 항상 겪고 있는 불안과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그곳은 추모의 공간에서 참여의 공간으로 진화했다. 플래카드를 들고 거리에서 연설하거나, 즉흥적으로 구호를 외치거나, 행진했다.

이전에 이러한 역할을 했던 것은 바로 대자보와 촛불 집회였다. 대부분 대자보에는 수신자와 발신자가 정확했다. 장문의 글이 그 자체로 완결적이었기 때문에 타자가 낄 여지가 없었다. 촛불 집회 또한 주최자가 있었고 참여하는 사람은 기획에 따라 촛불을 들다가 정해진 시간에 해산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포스트잇은 서로에게 말을 거는 행위였다. 그 대화의 역동적 풍경은 마치 유기체를 보고 있는 듯했다. 누구든 주체가 되어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그곳을 방문했고 다른 이에게 연설할 수 있었다. 행진 등은 페이스북 등을 통해 꼴을 완성해나갔다. 주최자의 행사를 참여자에게 전달하는 집배원(postman), 매개자도 없었다. 개개인이 주최자이자 참여자이자 매개자의 역할을 했다. 포스터(대자보) 민주주의에서 포스트잇 민주주의로 한발 나아갔다.

강남역 현장은 온라인 커뮤니티 여론이 형성될 때 흔히 보여주는 것처럼 서로 다른 의견이 충돌하기도 했다. 여러 에너지가 격돌하여 다소 소란스럽거나 이질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기도 했지만, 덕분에 공론장의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사회시스템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현장을 무르익게 두지 않았다. 아직 설익은 과정을 보전(박제)해 버렸다. 어떻게 변화되었을지 알 수 없으나, 그러기에 빠르게 중단시킨 것이 안타깝다.

다행히 포스트잇 민주주의는 강남역을 넘어 구의역으로 이어졌다. 시스템의 부재로 인한 필연적 사고에 시민들은 "네 잘못이 아니"라며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두 공간에서 이루어진 포스트잇 민주주의가 공통으로 보이는 원동력은 바로 공감이다. 나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공감은 현재 각자가 느끼고 있는 난감을 해결할 수 있는 첫 단계이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야 한다. 이제 경계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나이가 달라도, 피부색이 달라도, 젠더가 달라도, 고통의 근원이 달라도 '내가 곧 그녀 혹은 그'라는 당사자성을 갖게 된다면 공감을 바탕으로 한 측은지심으로까지 발현될 것이다. 그것은 사회를 바꿀만한 힘이다.

누군가의 직감처럼 기존의 방식이나 시스템에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해진 시대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국가나 정치 집단이 없거나 무능한 상황에서는 시민들이 주체가 돼 나설 수밖에 없다. 그런 이유로 서로에게 말 걸기를 통해 새로운 해법을 찾아 나가는 또래 청년들을 지지한다. 나 또한 그 당사자로서 <프레시안>에서 한 꼭지를 맡아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하나의 포스트잇 역할을 맡게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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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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