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박원순, 메르스 때처럼 돌파하라!

[홍일표의 시민/풍/파] 박원순 시장이 남겨둘 '몇 개의 파일'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이 한국을 떠난 지 어느 새 일주일이다. 유엔 사무총장은 세계가 직면한 기아와 전쟁, 기후 변화와 불평등, 에너지와 테러리즘 등 수많은 난제들의 해결을 진두지휘한다. 최고난도의 정치와 정책 고차 방정식을 풀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반기문 총장은 짧은 방한 일정 동안 더하기 빼기 수준의 정치 산수 실력을 자랑하기 바빴다.

김종필 전 총리를 찾았고, 안동과 경주를 연이어 방문했다. "충청+영남=대권"일 것이며, 안철수나 박원순으로 옮겨 간 중도 보수층을 빼 올 수 있을 거라는 정치 기사가 넘쳐 났다. 유엔 사무총장의 대권 의지 표출조차 한국 정치에서 너무나 익숙한 더하고 빼는 정치 셈법으로 이뤄진 셈이다.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전 대표도 총선 직후 하의도 방문을 시작으로 김해 봉하 마을, 부산, 안동과 청주, 인천까지 광폭 행보를 진행 중이다. 정치인의 일정은 그 자체로 메시지이다. 문 대표의 최근 일정은 자신에 대한 지지를 더하고, 다른 후보의 영향력을 막으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총선 결과로 문재인 전 대표의 대선 후보로서 당내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지만 '본선 경쟁력'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호남 빼고, 안철수 빼면 아무리 더해도 '1위'가 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간단한 더하기 빼기 결과를 두고 다른 해석이 경합 중이다.

5월부터 박원순 시장의 발언과 행보는 이례적으로 강해졌다. 5월 13일 광주 일정에서 사실상 '광주 선언'이 이뤄졌고, 봉하 마을 추도식엔 못 갔지만 5월 26일 SNS(사회 연결망 서비스)를 통해 "서울에 노무현 루트를 만들겠다"고 발표했다. 구의역 사고 수습 때문에 취소되긴 했어도 원래 6월 3일부터 1박 2일 일정으로, 반기문 사무총장의 고향이자 본인 처가가 있는 충북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박 시장 역시 일정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지와 목표를 드러내고 있다고 해석되었다. 어쩌면 당연한 박 시장의 '일정 정치'에 대해 만족과 불만이 교차하는 양상이다.

더하기 빼기 식 정치 연산은 한국 정치에서 가장 익숙한 셈법이다. 정치면에서 종종 등장하는 '복잡한 셈법'이라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곱셈 정도 수준의 정치 셈법도 잘 없다. 정치가 해결해야 할 문제의 복잡성과 복합성은 고차 방정식 정도로 어려워져 가는데도 겨우 더하고 빼고 있는 정도다.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유엔 사무총장도, 시민 정치의 실험을 주도하는 서울시장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정치에선 익숙한 것이지만 박 시장에게선 여전히 낯설다.

사실 박원순 서울시장의 그간 발언이나 행보는 한국 정치의 전형적 문법이나 셈법과 많이 달랐다. "아무 것도 안 한 시장으로 기억되겠다"는 박 시장의 취임 일성이 대표적이다. 그것은 '토건형 개발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고, 혁신 시정을 위한 선언이었다. 메르스 사태 당시 시민 안전을 위해선 "과잉 대응이 늑장 대응보다 낫다"며 정부와 맞섰다. 서울시의 정보 공개와 기록물 관리 수준은, '정부 3.0'을 내걸었지만 '정부 0.3'에 그치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그것과 극명히 대비되었다. 참신한 정치와 꼼꼼한 행정의 절묘한 조합에 시민들은 환호했다.

박원순 서울시장에게는 조직화된 세력 기반이 없다. 특정 지역의 '대망'을 내세울 수도 없고, 어떤 세대를 대표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가 서울의 시장이기 때문에 유력한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건 아니다. 박원순 시장만의 '무언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아마 그것은 박원순 시장 집무실을 가득 채운 수천 개의 업무 파일들일 수 있다. 시장 집무실을 처음 방문한 이들은 수천 개의 파일에 놀란다. 엄청난 숫자에 놀라고, 시장 본인이 직접 관리하고 있다는데 다시 놀란다. 그는 어떤 정치인(이나 행정가)도 흉내 내기 어려운 그만의 가치, 해법, 콘텐츠를 가지고 있이 분명하다. 수천 개의 파일이 상징하는 참신함과 꼼꼼함은 그만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그런데 최근 발생한 몇 가지 사건들은 균열의 조짐, 위기의 징후를 보여 주었다. 지난 5월 17일 박원순 시장은 강제 철거가 진행되던 종로구 옥바라지 골목을 전격 방문했다. 시장은 "손해 배상을 당하더라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이 공사는 없도록 하겠다"며, 조합 측 관계자와 담당 공무원을 현장에서 질타했다.

옥바라지 골목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던 활동가들과 지지자들은 환호했다. 박원순 시장이기에 가능했다며. 그런데 그것은 환호가 아니라 걱정을 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당시 촬영된 동영상을 보면 서울시 관료들의 시장에 대한 상황 보고와 지시 사항 이행 모두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구의역 스크린 도어 사고도 마찬가지다. 서울메트로 관계자는 서울시의회에 대한 보고에서 "시장에게 사고 발생 즉시 보고한 사실이나 핫라인은 없다"고 밝혔다. 시장 본인도 "위에서만 보고를 받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사건 이후에야 서울시에도 관피아가 있다는 걸을 알게 되었다"고 했다. 서울시의 '무대책'이 문제가 되고 있다. "과잉 대응이 늑장 대응보다 낫다"며 메르스 사태를 진두지휘했던 박원순 서울시장이 "아무 것도 안 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다. 예견된 사고일 수는 있어도 의외의 상황이다. "몰랐다"라는 답변이 더욱 놀랍다.

'재발 방지 대책'이 발표되었고, 서울메트로 간부 두 명의 사표가 수리되었다. 서울시 교통본부장도 바꿨다. 재탕삼탕이란 비판도 이미 뒤따른다. 근본적인 지하철 안전 대책, 서울시 기관들의 갑질과 '관피아' 근절 대책, 비정규 대책도 추가 발표될 것이다. 차제에 서울시 관료 사회 전반은 물론, 시장의 정무적 판단과 실행을 돕는 (광의의) 정무 라인에 대한 점검도 필요하다. 시장 본인도 변해야 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과감한 결별이 필요하다. 구의역 사고 이전과 이후로 시정 운영이 달라져야 할 정도로 엄중한 상황으로 보는 것이 맞다.

상상해 본다. 시장 집무실의 수천 개 업무 파일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 시장실을 비우는 것을. 제안해 본다. 시장이 반드시 챙겨야 하는 최우선의 업무 파일 몇 개만 시장실에 남겨둘 것을. 또 다시 수천 개 파일에 새로운 파일 하나 더하는 정도로는 안 된다.

우리는 더하기 빼기 능력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와 정책의 고차 방정식을 풀 수 있는 정치 지도자를 기대한다. 아니 절실하다.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이미 그런 차원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많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풀었나가 더 중요하다. 시장실에 남겨 둘 '몇 개의 파일'이 뭘지 궁금하다. 박 시장에겐 파일이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여전히 기대가 더 크다는 얘기다.

▲ 지금 박원순 시장에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어려운' 문제를 풀었나가 더 중요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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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표

시민의 바람과 물결이 만드는 '새로운 정치'를 꿈꿉니다. 시민적 기풍과 세력이 만드는 '다른 정치'를 기대합니다. 홍일표 박사는 참여연대, 희망제작소, 한겨레경제연구소, 국회 등에서 일했고, <기로에 선 시민입법>, <세계를 이끄는 생각 : '사람'과 '조직'을 키워라-미국 싱크탱크의 전략> 등의 저서와 시민운동과 싱크탱크, 정치 관련 논문을 다수 발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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