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까마득히 잊혔던 동요의 가치를 새삼 일깨워준 프로그램이 있다. 최근 종영된 케이블 채널 Mnet의 어린이 노래 경연 프로그램 <위키드>(WE KID)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어린이들이 보여준 천진한 모습과 노래는 팍팍한 현실에 지친 많은 이들에게 휴식과 위로가 되었다. 대다수 언론이 엠넷 오디션프로그램의 특징인 작위적 편집과 사연팔이에서 벗어난 '착한 경연'이었다고 긍정적인 평가를 내놓았다. <위키드>의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는 시즌2를 요구하는 댓글이 올라오고 있고 해외에서도 구매문의가 이어지는 등 국내시장 확대는 물론 글로벌 콘텐츠로도 개발될 전망이다.
그러나 <위키드>가 차려낸 어린이들의 재롱이 아무리 예쁘고 깜찍하다 해도 덥석 받아 안고 즐거워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이 쇼는 할아버지, 할머니 앞에서 펼치는 손주들의 재롱잔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꿈의 동요공장" <위키드>가 가공해낸 것은 무엇인가?
어른과 아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동요공장?
<위키드>라는 제목은 '우리 모두 아이처럼 노래하라(WE sing like a KID)'의 준말로 어른과 아이 모두를 감동시킬 새로운 스타일의 창작 동요를 생산하겠다는 기획의도를 담고 있다. 연출은 '슈퍼스타k' 시즌 1~3를 연출한 김용범CP와 김신영PD가 맡았다. 어른과 아이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의도대로 18명의 어린이 참가자 외에 박보영, 유연석, 타이거JK, 윤일상 등 최정상급 스타와 음악가들이 멘토로 출연해 기존 엠넷 경연프로그램의 무게를 갖추었다. 어린이들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잔혹함을 피해갈 수 있도록 중도 탈락자가 없는 팀별 대항전이라는 방식을 취하였고, 어른존과 아이존으로 나뉜 방청석에서 준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각 존에 불이 켜지는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됐다. 8번의 미션을 거친 최종 평가에서 레전드 동요상, 베스트 하모니상, 창작동요상이 각 팀에게 돌아갔다.
어른과 아이 모두를 만족시키는 동요잔치를 통해 뉴스타일의 동요를 생산하겠다는 <위키드>의 설정은 매력적이다. 창작동요의 산실이었던 KBS의 '모이자 노래하자', '누가누가 잘하나', MBC의 '창작동요제'와 같은 어린이 노래자랑 프로그램이 폐지되거나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신들의 감성에 맞는 노래를 찾지 못한 어린이들은 동요를 버리고 아이돌의 노래를 선택했다. 어린이가 음악적 재능과 끼를 펼쳐 보이기 위해서는 '스타킹'과 같은 성인 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해 눈요깃거리가 되거나 '슈퍼스타K'같은 오디션프로그램에서 섹시댄스를 추어야하는 실정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위키드>의 출현은 어린이는 물론 음악에 재능 있는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도 환영할 만한 소식이었다.
성인 시청자들도 <위키드>의 무대가 반갑다. '반달', '오빠 생각', '과수원 길' 같은 국민 동요를 듣고 자란 성인 세대에게 이 무대가 들려주는 어린이들의 노래는 순수한 감성과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출산율 저하로 집집마다 어린 아이가 귀해진 상황에서 화려하고 세련된 무대 위에 펼쳐지는 아이들의 재롱은 보기 또 얼마나 좋은가. 팍팍한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 어린이들의 진정어린 목소리와 깜찍한 율동은 감동과 위안이 되었다.
위키드, 어린이들도 즐거웠을까?
그러나 <위키드>가 어른들에게 준 즐거움만큼이나 어린이들에게도 좋은 선물이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짚어볼 것들이 있다.
우선, 프로그램 편성의 문제다. 어린이 오디션 프로그램임에도 불구하고 <위키드>는 밤 9시 40분에 방송을 시작했다. 밤 11시가 다 되어야 끝나는 프로그램을 어린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시청자들의 항의로 5회부터는 8시 30분으로 방송시간이 변경되었지만 이 역시 어린이들이 시청할만한 시간대는 아니었다. 최연소 어린이가 5세, 참가 어린이들의 평균 나이 7.5세, 7세 이하의 취학 전 유아가 5명이나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을 보면 편성에 있어 유아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프로그램 진행에 있어 어린이의 특성을 얼마나 고려했는지도 따져볼 문제다. 8번에 걸친 미션 무대에는 성인가요와 팝송, 뮤지컬에 이르기까지 어린이가 감당하기 힘든 노래들이 던져졌다. 팝송을 완벽한 발음으로 소화해내고, 어려운 뮤지컬 곡도 원곡 못지않게 부르는가 하면, 6살 유아가 성인가요 '나의 옛날이야기(조덕배)'를 놀라운 감성으로 불러내기도 했지만 이것이 정말 아이들이 부르고 싶은 노래였을까? 선곡의 문제뿐 아니라 팀 결정 등 프로그램 진행 전반에 있어 어린이들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되었는지 의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방송 출연 자체가 어린이의 진정한 의사였는가?
시청자 게시판에 가장 많이 올라온 불만은 감상에 방해가 되는 평가방식과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것이었다. 어른존과 아이존으로 나뉜 방청석에서 준 점수가 일정 점수 이상이 되면 각 존에 불이 켜지고 두 개의 존 모두 불이 켜지면 미션이 완료되는 방식으로 평가가 진행됐다. 각 존에 불이 켜질 때마다 패널과 방청석에서 환호가 터지고 리액션 장면이 화면에 비춰졌다. 무대 위에 노래하는 어린이도, 방청객과 시청자도 노래에 집중할 수 없는 시스템이었다. "노래에 집중하는데 중요한 부분에서 1존에 불 들어오고, 2존 되면 시끄럽고, 안 들리고...(이현승)", "너무 (반응)자주 비추다보니 무대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 제가 아이들 노래 들으려고 이 방송 보는 거지 사람들 반응 보려는 것은 아니잖습니까(st2333)","제발 패널들 중간 중간 안 비추면 안 되나요?(Lalalaladay)", "노래 집중하고 싶은데 패널 억지 반응 보면 오글거림... 계속 중간에 추임새 와~ 이딴 거 보여주지 마세요.(Hit330)"
일부 매체에선 작위적 편집과 스토리텔링 등 기존 오디션프로그램의 문제가 반복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아이의 노래를 들려주기 전에 한껏 감정을 부추길 아이의 사연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사연에 걸맞은 노래를 선정하여 시청자와 관객을 몰입하게끔 한다.(오마이뉴스 02.20)","사연 있고 끼 많은 어린이의 동심은 철저하게 어른들의 눈요기로 전락해버렸고 '감성을 건드려봐'라는 기준으로 평가되고 있다.(스포츠동아 02.29)", "위키드는 순수한 아이들의 동요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지만, 반면 과한 편집이 의심되는 장면이 반복돼 '악마의 편집' 의혹도 받고 있다.(조선일보 03.04)", "'기승전 오연준'이라고 할 수 있다. 아이의 인기에 편승해 낚시 예고를 한 것은 아닌지 우려를 얻고 있다.(TVREPORT 03.25)"
동요공장 '위키드'가 가공해낸 것은 무엇인가?
<위키드>의 무대는 TV 뒤로 사라졌던 동요를 다시 전면으로 불러냄으로써 시청자들에게 동요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시청자의 관심이 왜 다시 '동요'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이 무대에서 찾아보기는 어렵다. 현란하고 선정적인 아이돌 그룹의 무대와 노래를 매개로한 생존 게임에 지친 시청자들은 가공되지 않은 순수하고 진정어린 노래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이 시대 어린이의 감성에 맞는 창작 동요의 탄생을 기대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만족시키는 그러한 꿈의 무대는 <위키드>에서 펼쳐지지 않았다.
'동요'란 어린이의 꿈과 정서가 담긴 노래다. 그러나 동요 창작을 목표로 한 이 쇼에서 어린이는 여전히 객체였고 어린이다움은 존중받지 못했다. 어린이들의 진정어린 노래는 어른존과 아이존의 불이 모두 켜지고 대중의 환호를 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가치를 확인받을 수 있었다. 8번에 걸친 미션 무대는 어린이의 성장을 이끌어내기보다 대중의 취향에 영합한 화려한 포장으로 아이들의 꿈과 재능을 가공했다. 동요공장 <위키드>가 생산해낸 것은 어린이의 꿈이 담긴 동요가 아닌, '어린이'라는 새로운 상품이었다.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이 호명하는 '어린이'
최근 몇 년 사이 어린이가 주요 출연자인 예능 프로그램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 어린이 예능의 물꼬를 튼 SBS의 '스타주니어쇼-붕어빵', MBC '일밤- 아빠 어디가',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 JTBC '키즈돌직구 쇼- 내 나이가 어때서', '위키드'의 전신 격인 엠넷의 '보이스 키즈' 등 공중파와 종편, 케이블을 가릴 것 없이 다양한 포맷의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들이 개발되며 '어린이'는 하나의 새로운 방송 콘텐츠가 되고 있다. 기존의 예능이 구태의연한 웃음코드와 자극적인 소재, 한정적인 출연자로 외면을 받는 사이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은 삶에 지친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웃음을 주며 꾸준히 시청률을 확보했다.
어린이 예능 프로그램이 만들어내는 어린이는 순종적이고 예쁘고 귀엽고 순진무구하면서, 때로 당돌하고 영악하고 천재적이고 속 깊고(어른들의 상담자가 되어줄 만큼) 심지어 섹시한 존재로서의 양가적 이미지의 어린이다. TV는 발달단계에 있는 어린이가 지닌 특성과 성장의 고통을 가린 채 어른들의 필요에 따라 보고 싶은 모습만을 모자이크한 허구의 어린이상을 만들어 냈다.
'어린이-순수-힐링' 또는 '어린이-천재성(똑똑함)-학습'으로 코드화 된 어린이상은 어린이를 하나의 방송 콘텐츠화 하며 방송 산업의 안정적인 수익 창출 수단이 되고 있다. 특히 수많은 PPL로 포장된 어린이 예능은 방송과 동시에 해당 상품의 판매고가 올라가는 효자 프로그램으로 출연 어린이들을 광고 모델과 아역 배우로 진출시키며 어린이 스타 탄생의 등용문이 되고 있다.
어린이는 TV를 통해 그들이 호명하는 방식으로 주체를 형성한다. 가치관과 비판적 사고 능력이 아직 확립되지 못한 성장기의 어린이들은 TV를 통해 세상을 보고 정체성을 형성하며 사회적 역할을 학습한다. 학교에서 학원으로, 학원에서 또 학원으로 전전하며 경쟁과 경쟁을 이어가는 팍팍한 현실의 어린이들은 그 '천재적이고 귀엽고 예쁜' 가공의 어린이상을 롤모델로 그들을 모방하고, 또 그들과 경쟁해야 한다. 잘못된 어린이 이미지의 소비는 어린이에게 어린이다움을 빼앗고 실존하는 어린이들이 처한 현실의 어려움과 문제들을 가려버린다. 동심의 순수함과 어린이의 꿈을 TV가 지켜주는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희망일지 모른다. 애초에 자본의 첨병 역할을 하는 방송에서는 질 수 없는 무게일지 모른다. 그러나 '어린이'를 하나의 상품으로 '다루는' 사회가 꿈꿀 수 있는 미래는 무엇인가? 자본의 논리 속에 가공되어 성인의 오락물로 소비되고 있는 '어린이'라는 상품은 우리의 자녀이고, 우리 모두가 상실한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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