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사적인' 죽음을 택하다

[건축신문] 청년 자살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불과 13년 전만 해도 나는 'P세대'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다. 그게 다 노무현 때문이다. 물론 월드컵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길바닥에서 빨간 옷 입고 소리 좀 질렀을 뿐이었다. 인터넷에서 이른바 '수꼴'들 좀 비웃고, 방 밖으로 기어나가 고작 투표나 했을 뿐이다. 헌데 그런 독박을 썼다. 연유는 이렇다. 난데없이 한 광고회사는 이런 일련의 사건을 보고는 열정(passion), 참여(participation), 잠재력(potential power)을 갖고 있는 P세대라고 나한테 그랬다. 민주주의를 걸쳐만 입었을 뿐 권위주의 꼰대이긴 매한가지였던 '386세대', 마냥 시니컬하기만 하고 자기 에고를 감당 못하는 철없는 'X세대'가 아니었다.

P세대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대를 열어갈 포텐 터지는 세대'라고 한다. 물론 그 기대를 광고회사한테만 받은 것은 아니었다. 어떤 양반들은 고답적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레드콤플렉스도 없이 '빨강'이라는 색깔로 광장을 새롭게 점유하는 열정적 청년/시민 주체로 호명하기도 했다. 정치도, 사회도, 문화도 우리가 참여해서 새롭게 바꿀 거라고 했다. 하지만 P세대는 지난 13년간 그들의 붉은 피만 제대로 빨을 뿐이다. 열정은 노동 착취의 명분이 되었고, 참여는 잠깐의 정부이름이었을 뿐이며, 잠재력이란 잠재를 시키는 능력 혹은 모든 것이 잠식된 채 은둔형 외톨이가 된다는 말이었을 뿐이다. 그동안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기대 이상으로 순조롭게 악화되었고, 그 사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희망과 기대를 담아 P세대라고 호명한 게 2003년이었는데, 4년 만에 '88만원세대'로 전락했다. 그리고 그 몇 년 후, 우리는 서로를 혐오하며 찌질하게 잉여질이나 하고 있는 벌레들이 되었다. 물론 '살아 있다'라는 전제 조건하에서 말이다.

ⓒ이말년월드

난민이 된 청년세대

이곳에서 나는 난민이 된 청년을 얘기하고 있다. 냉전 시대의 분단 상황에서 피난민 국가로 시작해, 단군 이래 가장 부유하며 전 세계에서 방귀 좀 낀다는 나라가 됐다는 데도 불구하고, 청년들이 난민이 됐단다. 전쟁통에 피난을 가야 하는 상황도 아니다. 굶주림과 폭압에 못 견뎌 사선을 넘어 여러 나라를 떠돌다 들어온 탈북난민도 아니다. 맛집에 환장하고 쓸데없이 인터넷질이나 하고 앉아 있으며 SNS에 쿨내가 진동하는 사진으로 칠갑하는 인생들에게 '난민(難民)'이라는 거창한 말을 붙이는 것은 무도한 일일 수도 있다. 일찍이 이렇게 풍요로우면서도 나르시시즘으로 가득한 난민은 지구 역사상 딱히 본 적이 없을뿐더러, 우리가 난민에 대해서 갖고 있었던 범주에 딱히 맞아떨어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넘쳐나는 청년 담론들에서 사람들은 모두 청년의 위기와 그들의 암담한 현실과 미래에 대해서 알고 있지만, 개별적으로 만나는 청년들은 마냥 이기적이고 속물적이면서 빤한 데다 심지어 게으르고 무식하다. 게다가 '기생한다'는 말 빼고는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서는 발전주의 한국의 도덕적 가치였던 근면/성실과 '노오력' 따위는 찾으려 해도 찾아볼 수 없다. 윗세대가 피땀으로 일궈온 이 땅의 풍요를 단물만 쪽쪽 빨아 먹고는, 미래가 없다며 어리광에 가까운 불평만 하고 있게 들릴지도 모른다. 이에 작금의 현실이 청년세대에 가혹하다는 것은 머릿속으로 이해해도 개별적으로 청년을 만나게 되면 복장이 터지고야 만다. 이런 그들에게 대한민국의 국가가 엄청난 폭력에서 도망쳐 한국으로 피난 온 이주민들에게도 부여하기를 극도로 꺼리는 난민이라는 지위를 청년들에게 주는 것은 정말이나 껄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동안 한국 사회를 견뎌낸 청년들은 어떤 면에서 충분히 '난민'이 되었다. 물론 어느 정도는 은유적으로 말이다. 또한 주변에서 개별적으로 보게 되는 '한심한' 청년들 말고도, 고립무원 상태에서 피어나지도 못했는데 인생막장으로 치닫는 걸 매일 느끼면서 사는 청년들도 많다. 이들은 대게 '비가시적'인 곳에 놓여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볼 수 없었을 뿐이다. 어쨌든 대부분의 청년들은 그동안 난민화되고 있고, 아직 난민은 '충분히' 되지 않았을지라도, 삶은 이미 완벽하게 '난민적'이다.

전쟁과 같은 큰 사건이 있어서 누구에게나 동의할 수 있는 난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 대한민국 청년들은 '시나브로'라는 부사만이 적합할 정도로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난민이 되었다. 은유로서 난민이라는 증거들은 다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청년실업률은 사상 최악을 기록했다. 일자리는 없지만 빚은 있다. 역사상 최초로 이 나라의 청춘들은 '빚'을 가진 채 성인이 됐다. 어마어마한 학자금 대출은 젖혀두고, 생활비로만 은행에서 꾼 돈이 2015년 기준으로 1조 원이 넘었다. 미래는커녕 지금 당장 버티기도 버겁다. 그렇다고 사회안전망이나 복지가 있는 것도 아니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도 버겁다. 게다가 그 둘은 '매우 비싸다'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심리적으로 든든한 사회적 관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수저'가 인생의 대부분을 결정한다는 진실, 노력은 보상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착취의 다른 이름이라는 진리, 사람은 키우는 것이 아니라 걸러내고 대체해버리는 것일 뿐이라는 사실을 간파해버렸다. 공정함이란 눈 씻고 찾아볼 순 없지만, 계속해서 무한 경쟁의 구도에 내몰린다.

P세대라고 한참 떠들었던 그즈음, 2004년 노동석 감독의 독립영화 <마이제너레이션>은 빚으로 허덕이는 절망적 상황의 청춘을 기민하게 그렸다. 이 영화의 카피는 이러했다.

"행복은 자꾸만 비싸지는데… 우리도 꿈을 살 수 있을까? 청춘의 조난신호-마이제너레이션."

하지만 이 나라에서는 10년 넘게 청년이 보내는 조난신호를 철저히 무시했다. 리들리 스콧 감독의 <마션>에서는 화성에 홀로 던져진 우주비행사의 조난신호를 알아차리는 데도 2주가 걸리지 않았는데 말이다. 되려,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몹쓸 말로 모르핀이나 한 방 놓아주려고 했다. 그 사이 청년들은 알아버렸다. 우리는 꿈은커녕 현재도 살 수가 없다.

조난신호가 닿지 않고 구조는 꿈도 꿀 수 없는 '헬조선'의 상황에서 선택지는 '탈조선'밖에 없다. 사회의 약속과 개인의 전망이 부재한 곳에서 생존 자체의 불안을 느끼며 탈출만이 답이라면, 그곳이 바로 난민수용소이다. 물론 한국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자유주의가 안정적인 삶의 구조를 파괴해버리고 모두를 불안정한 삶의 경쟁으로 몰아놓을 때 일상은 난민주의화되어 버린다고, 어떤 인류학자는 말한다. 하지만 한국은 경제 성장도 기적적인 속도로 했듯이 청년, 더 넓게는 일반 시민들을 난민으로 만드는 것도 경이로운 속도로 하고 있다. 샴페인을 일찍 터뜨렸다고 한 지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인제 보니 깨져버린 샴페인 병 위에서 발바닥에 피를 흘리고 있을 뿐이다.

▲ 영화 <마이제너레이션> 중 한 장면. ⓒ노동석

되풀이되는 사적 죽음

누구 하나 자신을 도와줄 사람 없는 고립무원의 사회적 난민 상태, 미래를 담보로 현재를 채무로 버텨내는 경제적 난민 상태만으로도 이 사회의 청년들은 충분히 난민의 조건을 갖춘 듯하다. 나는 여기에다 한 가지를 더 말하고 싶다. 바로 죽음이다. 난민의 삶이 사실 죽음이라는 것이 근접하게 있는 삶이라면, 우리 사회의 청년들도 정도는 다를지언정 굉장히 죽음과 근접한 삶을 살고 있다. 모두들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한국의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매해 30명이 넘는 사람들이 스스로 삶을 마감하며 세계적으로도 13년째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 안을 좀 더 살펴보면 노인과 청년의 자살이 굉장히 높으며 청년들의 사망원인으로 1위가 자살이다.

돌이켜 보니 그간 죽음이 참 흔해졌다. 자살로 떠난 사람들이 참 많다. 얼마 전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그동안의 안부를 묻던 중 대화는 어쩌다 보니 누구누구가 몇 년 사이에 저세상으로 떠났는지, 어떤 이유로 떠났는지, 어떤 방법으로 떠났는지로 흘렀다. 물론 대부분의 사인은 '우울증'이라고들 했다. 자살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라고 한 게 120년 전인데, 여전히 사인(死因)은 개인적이고 사적이다.

천성이 학교 교사였던 동창은 몇 년을 계속 임용고시에서 낙방한 후 고층 건물에 올랐다. 한 후배는 인터넷에서 조리돌림을 당한 후 우울증으로 고생하다 산에서 목을 맸다고 한다. 성 정체성으로 우울했던 어떤 이도 세상을 혼자 떠났다. 전 애인의 스토킹으로 고생하던 친구의 동생도 그렇게 떠났다.

몇 년 전 나는 한 친구의 부탁을 받았다. 그 친구의 친구가 죽겠다며 집을 나갔는데, 온라인 행적을 찾아봐 달라고 한다. 본의 아니게 사이버상에서 신상을 털어야 했던 그때, 그가 한 자살 카페에 가입한 것을 찾아냈고, 얼마나 자살을 하고 싶은지 의지를 확실하게 보여야 하는 등업(커뮤니티 내 회원 등급 업그레이드)을 통과하여 동반 자살할 동료들을 모아서 지방의 한 도시에서 사라졌다는 것을 찾아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그 카페의 사람들이 차 안에서 번개탄을 피우고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지인의 자살 소식을 들었을 때 마음의 황망함이 아주 오래갔지만, 지속적으로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내 또래 사람들의 자살 소식에 어느덧 마음에 굳은살이 생겨버린 것 같기도 하다. 무엇이 그들을 우울하고 삶의 극단으로 내몰았는지는 생략된 채, 대부분의 죽음은 우울이라는 개인의 심리적 차원으로만 귀결되어 버린다. 누구나 마음속에 상처 하나 즈음 있는 거라고 했지만, 그 상처가 일련의 자살들 때문에 죽음에 대한 굳은살이었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는 못했다.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굉장히 위태로우며 죽음이라는 것이 너무나 가까이 있는 삶을 난민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이렇게 난민이 된 청년들은 연애와 결혼을 포기하거나 자기 삶을 스스로 끊으면서 이 사회의 재생산을 거부하고 있다. 어떤 이는 왜 화염병을 던지지 않느냐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왜 투표를 하지 않느냐고 한다. 시민은 미처 되지 못했지만 확고하게 '국민'이었던, 하지만 '난민'은 아니었던 이들이 난민이 된 지금의 청년들에게 던지는 질타다. 어디에다 화염병을 던져야 할지, 어디에다 투표해야 이 상황이 조금이라고 개선될지 전혀 보이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이 투표권이나 있는지조차 의심이 드는 상태인데 말이다. 화염병과 투표 대신 이들이 선택한 것은 자신의 혹은 이 난민수용소의 조용한 '사적인' 죽음인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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