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는 기업이 구조 조정에 나설 수 있도록 한국은행이 발권을 통해 산업은행의 채권을 인수해주자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가계 부채의 구조 개선을 위해 한국은행이 발권해 조성한 자금으로 시중 은행들의 주택 담보 대출 증권을 인수해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공약은 부실에 대한 책임이 있는 기업과 투자자들의 손해를 발권이라는 방식을 통해 국민이 나누어지도록 하는 나쁜 정책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그래서 야권도 반대했고, 지난 총선 당시에는 대중의 관심을 별로 얻지 못하고 지나왔다. 그런데 선거 이후 이 문제가 다시 등장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가계 부채에 대한 시중 은행들의 주택 담보 대출 부분은 빼고, 기업 구조 조정을 위해 필요한 은행의 채권만을 한국은행이 발권을 통해 인수하도록 하자는 '선별적 양적 완화' 정책을 국무회의를 통해 제안하면서 다시 쟁점이 된 것이다. 지금 당장 기업 구조 조정은 필요한데, 여기에 필요한 재원을 어떻게 조달할지 문제가 우리 사회의 큰 쟁점으로 등장했다.
양적 완화와 경제적 효과
미국이나 유럽 각국의 양적 완화(Quantitative Easing, QE)는 이미 금리를 '0(제로)%' 수준으로 낮춘 상태에서 더 이상 금리 인하 등 금융 정책이 한계에 도달했을 때 발권을 통해 시중의 유동성을 늘리는 정책으로 도입됐다. 특히 이런 정책을 사용하는 국가의 공통점은 대부분 국제 통화 시장에서 기축 통화 역할을 하는 나라들이다. 당장 우리나라의 경우 환율을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한 환율 방어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도 '환율 조작'으로 매도된다. 미국 의회는 ('환율 관찰국'으로 그 수준을 완화하기는 했지만,) 문제가 계속될 경우 한국에 경제적 제제를 가하겠다는 압박을 공공연하게 가하고 있다.
대대적인 양적 완화를 단행할 경우, 원화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낮아지므로 수출 대기업들의 국제 경쟁력 제고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일반 국민은 물가가 인상되는 부담을 지게 된다. 그러면 일반 국민은 매달 받는 월급의 액면 금액이 변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는 월급이 줄어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기업들에도 수입해야 하는 원자재의 가격이 상승하는 등 부담이 될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한국은행이 기준 금리를 아직 더 인하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데도, 또 여러 가지 부작용이 동반될 수 있는데도 굳이 기업 구조 조정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다. 특히 공적 자금으로 산업은행이나 수출입은행 등 부실 국책 은행의 채권을 매입해서 해운과 조선 등의 구조 조정을 지원하려면 국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그럴 경우 현 정부의 무능과 실책이 드러나고 정부 여당이 책임을 져야 하는 부담을 피하기 위한 것은 아닌지 의심되기도 한다.
최근 코스피지수는 2000 내외에 형성됐는데, 제조업 지수는 4000대를, 은행업 지수는 220대를 기록하고 있다.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 부실이 발생하면 우선 은행의 부실로 수습하지만, 은행들의 손실이 확대되면 경제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 그래서 외환 위기 시기나 경제 위기 때 지금까지는 국민의 세금인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이들 은행을 살렸고, 이 과정에서 은행들의 구조 조정이 단행되면서 은행업의 주가가 떨어지는 과정을 반복해 왔기에 우리나라는 제조업 지수에 비해 금융 관련 지수가 낮다고 한다.
금융 정책이나 산업 정책으로 풀어야 할 문제를 통화 정책으로 해결하려고 할 경우, 이에 따른 부작용과 피해는 대부분 국민이 감당하게 될 텐데, 그에 대한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 물론 정부는 필요한 경우 동원 가능한 모든 수단을 사용하여 국민 경제를 살리고 산업을 육성할 책임을 지고 있다. 또 적절한 시점에서 적절한 수준의 정부 개입은 이후에 올 경제의 부정적 파급 효과를 줄이고 국민이 감당해야할 피해를 줄일 수 있다면, 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누구를 위한 정책인지, 무엇을 위한 정책인지, 궁극적으로 누가 피해를 보고 비용을 부담하는 정책인지를 분명히 하고 추진해야 한다.
규제 완화를 통해 자율적인 경쟁이 이루어지고,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잘 작동되도록 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세력들은 이러한 정부의 시장 개입에 대해 어떤 입장인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자유 시장을 통해 비효율적인 참여자가 정리되거나 퇴출되어야 경제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고 외치던 시장 만능주의자들은 지금 다들 어디로 숨었을까?
부실 산업 구조 조정과 자유 시장 정책
실제로 울산과 거제의 상황은 심각하다. 조선 산업의 부진은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이미 몇 년에 걸쳐 매년 상당한 수준의 구조 조정이 단행되어 왔다. 울산의 백화점이나 성형외과, 피부과에도 조선업을 담당하는 현대중공업 종사자 가족들의 발길은 끊어진 지 오래라고 한다.
후발 산업 국가의 경우 초기에 많은 투자를 필요로 하는 기간 산업은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정책 자금 융자와 연구 개발비 등 정부의 각종 지원을 통해 상당 기간 의도적으로 육성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이루어진 기업의 성장은 해당 기업뿐 아니라, 연관 산업 분야를 포함하여 하청 관계에 있는 다양한 중소기업들까지 혜택을 보게 해야 한다. 근로자와 경영자 등 기업 종사자들은 임금으로, 투자자들은 배당과 주식 가격의 상승으로 보상을 받는 식이다.
그리고 이들 기업이 벌어들이는 이익 중의 일부를 정부가 세금으로 징수하여 다양한 복지 정책을 통해 다수의 국민에게 그 혜택이 돌아갈 수 있도록 배분하는 것이 경제와 복지의 선순환 구조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특정 산업 분야가 어려워질 때 다시 한 번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이 선진국들에서도 보편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나라는 이러한 선순환 과정의 곳곳에서 균열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각종 특혜와 정책 자금을 통해 육성된 거대 기업들의 이득은 재벌 대기업 소유주들의 자산 증가와 계열사의 증가로 이어졌고, 경영인들의 엄청난 연봉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직접 하청 관계에 있는 일부 기업들 이외의 다양한 중소기업들의 육성이나 대다수 직간접 관계자들의 이득과는 거리가 멀어진 지가 오래이다.
부럽지 않은 높은 연봉으로 인기 있는 정규직 근로자도 있지만, 이들의 절반도 안 되는 임금으로 같은 업무를 하는 비정규직이나 파견 근로자들은 기업들이나 노동조합도 애써 외면해 왔다. 사내 유보금은 증가하였으나, 이것이 고용이나 투자의 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엄청난 주가 상승과 이익 배당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금은 감면되었고, 국민에게 주어지는 보편적 복지는 여전히 오래 전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
그렇게 해 놓고는 이제 와서 해당 산업 분야가 어려워지니 고통 분담을 요구하고 있다. 그 동안 고액의 연봉을 받으면서 기업을 운영하던 경영자가 책임을 진다거나, 기업을 소유하던 재벌이 얼마나 손해를 보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정책 자금을 지원하는 대신 낙하산으로 내려갔던 정부의 관리들은 이미 퇴직금까지 챙겨서 회사를 그만둔 지 오래라서 책임을 묻기도 쉽지 않다. 부실 투자를 한 국책 은행에 대해서도 절차에 따라 합법적으로 시행한 것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북유럽에서 온 나쁜 사장 : 복지 국가 구조 조정 사례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반영하듯이 TV의 코미디 프로그램에서도 각종 패러디가 나오고 있다. 특히 최근 인기 있는 한 프로그램에서 '북유럽에서 온 나쁜 사장'이 사회적 관계망 서비스(SNS)를 통해 급속하게 퍼져나가고 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어려워진 기업을 살리고 경영을 정상화하기 위해 영입된 '북유럽에서 온 악마 사장'이 일하는 시간을 늘려서 5시까지 근무하도록 하겠다고 선언하자, 잔업에 야근을 밥 먹듯이 하던 직원들이 환호한다. 악마 사장이 임신한 직원에게 1년간의 유급 휴가를 주겠다고 하고, 기업 구조 조정을 위해 직원을 해고하겠다고 선언하지만, 동시에 퇴직금 외에 평상시 급여의 80%를 3년간 보장한다는 말을 한다.
물론 극적인 효과를 노리기 위해 일부 과장한 측면이 있지만 실제로 북유럽의 복지 국가뿐 아니라 독일이나 프랑스 등 중부 유럽의 나라에서도 흔히 있는 상황을 비교하는 것만으로도 방송의 소재가 된다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안타까웠다.
한때 조선 산업의 최대 강국 중의 하나였던 스웨덴이 노-사-정 합의를 통해 조선 산업의 구조 조정을 결의했다고 한다. 당시 이미 임금 수준이 조선 산업 후발 국가들의 임금보다 현저히 높아져 단순 조선업으로는 경쟁력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이들 산업을 단계별로 접고 해외로 이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기술 수준으로 가능한 컨테이너선 제작에서부터 시작하여 유조선과 LNG(가스 운반선)선의 선체 제작을 먼저 이전하고, 이어서 엔진 제작이나 스크류 제작 등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고부가 가치 업종을 이전한 다음, 한 대당 10억 달러가 넘는 고부가 가치의 크루즈선 제작이나 해양 원유 채굴과 정제를 동시에 할 수 있는 FPSO선(Floating Production Storage and Offloading) 제작 기술을 단계적으로 이전했다.
이런 산업 이전 과정에서 해당 조선 기업들은 기술 이전의 로열티를 받거나 기술자를 파견해서 수입을 올리고, 나중에는 선박 설계 및 감리와 같은 고수익 산업으로 전환했다. 조선 산업에 투자했던 은행도 이제는 투자 대상을 바꾸어 해외로 이전하는 산업이나 해외에 이전한 기업에 투자를 해서 지속적인 수입 창출이 가능하도록 하거나, 이들 선박을 발주하는 회사에 투자하는 등 관련 산업에 대한 지식을 활용하여 계속 수입을 올리는 구조를 가져가고 있다.
그리고 스웨덴 정부는 이러한 과정에서 산업 구조의 변화를 촉진하고, 기업의 구조 조정이 가능하도록 각종 정책 지원과 더불어 보편적 복지를 확대해 왔다. 구조 조정 대상인 조선 산업의 노동자가 해당 기업에서 잘려도 다시 취업할 때까지 평균 월급의 80%를 지급받을 수 있도록 실업 수당 제도를 강화하거나, 아버지가 해직을 당해도 자녀들의 미래가 위축되지 않도록 보편적 보육과 교육을 강화했으며, 무상 의료 제도를 도입하고 국민 연금과 각종 수당을 통해 국가가 노후 소득을 보장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이었다.
나아가 퇴직자에게 대학을 다시 입학하도록 하거나 대학원 과정을 무상으로 다닐 수 있도록 하는 등 재교육의 기회를 줬다. 이와 더불어 2년 동안 8회의 직업 알선 등 적극적 고용 지원 서비스를 병행하였기에 용접을 하던 노동자가 공인 회계사가 되고, 크레인을 운전하고 망치질을 하던 근로자가 엔지니어가 되거나 국제 변호사가 되는 일이 가능했다.
이러한 정부의 적극적인 역할과 보편적 복지의 강화는 경제적으로도 도움이 되고 기업들에도 이득이다. 보편적 복지를 통해 보육과 교육, 의료, 주거, 노후 소득과 고용이 보장되니 월급이 적어도 받는 만큼 모두 쓸 수가 있어 내수 경제가 활성화된다. 또한 이들 분야에서의 고용이 늘어나, 전체 근로자의 30%가 공공 부문의 사회 서비스 일자리에 종사하니 고용율도 높아진다. 기업들의 입장에서도 해고를 해도 근로자들이 반발하지 않고, 산업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분야의 인재를 기업의 부담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교육시키고 양성해주니 자연스럽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된다.
심지어는 다니던 회사에서 잘려도 삶에 영향을 받을 걱정이 없으니 각종 창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기술 혁신과 기업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등 그야말로 "창조 경제"가 구현된다. 우리는 이번 조선과 해운 산업의 구조 조정 문제를 보면서 하루빨리 대한민국을 복지 국가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이번에 문제가 되는 울산과 거제 지역만을 특화하여 지원하면, 같은 조선 산업이 자리 잡고 있는 진해 경제 자유 구역의 기업들과 군산 대분 단지, 그리고 조선 관련 산업의 다수가 자리 잡고 있는 창원은 빼고 할 것인지, 아니면 대상을 넓혀 인천까지 포함할 것인지, 새로운 지역 갈등의 소지가 있다. 그렇다고 지역이 아니라 산업을 기준으로 조선과 해운만 특화해서 지원할 경우, 그동안 소외받아온 섬유 산업이 반발하고 국제 경쟁이 격화되면서 급격히 수익률이 떨어지고 있는 전자나 화학 산업에 대한 형평성이 문제가 될 것이다.
정답은 복지 국가 정책이다
한국 경제는 장기간의 침체와 더불어 몇 가지 주력 산업 분야조차 구조 조정이 요구되는 등 심각한 위기가 이미 구체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때마다 다양한 명분의 선별적 양적 완화를 추진할 것인지, 그리고 여기에 소요되는 재정 부담을 어떻게 국민에게 나누어 부담하자고 할 것인지,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깝다.
이번 총선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엄중하게 심판을 받은 정부 여당은 이제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단순히 유승민 찍어내기와 친박만 골라서 공천하는 것에 대해서만 국민이 분노한 것이 아니다. 실제로는 지난 30년 동안 규제 완화와 재벌 대기업에 대한 지원만을 반복해오면서 전혀 달라지지 않는 정부와 정치권의 경제적 실정을 국민이 심판한 것이다.
단순히 안 된다는 반대나 무조건 아니라는 비판만으로는 수권 정당이 될 수 없다. 능력보다 과분하게 표를 모아준 국민에게 두 야당은 어떻게 보답할 것인지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 선별적 혹은 한국형 양적 완화가 아니라면, 어떻게 기업의 구조 조정을 할 것이며, 부실의 책임을 누가 질 것인지를 분명하게 해야 국민이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양적 완화를 하거나 공적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면, 그 혜택이 국민에게 골고루 돌아가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 스웨덴의 사례에서 보듯, 그것은 바로 '복지 국가'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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