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말 '치킨 지옥' 걱정한다면…

[해설] 노동자만 다치는 '거꾸로' 구조 조정, 언제까지?

젊은 창업자들의 모임을 지켜본 적이 있다. 2012년 대선을 앞둔 때였다. 당시 '앵그리버드' 게임이 한창 인기였다. 핀란드 기업 로비오엔터테인먼트가 만든, 스마트폰 전용 게임이다.

"핀란드에선 노키아가 망하니까, '앵그리버드'가 세계를 휩쓸었다. 한국에서 삼성전자가 망하면, 뭐가 나올까."

"'앵그리치킨'이 늘어나겠지. 퇴직자들이 화난 표정으로 닭을 튀기는 가게 말이야."

이런 이야기가 오갔었다. 핀란드는 한때 '노키아 랜드'라고 불렸다. 통신 기업 노키아가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컸던 탓이다. 한국이 삼성공화국, 삼성왕국 등으로 불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들 알다시피, 스마트폰 등장과 함께 노키아가 몰락했다. 핀란드 경제는 그래도 버텼다. 스마트폰 관련 창업이 잇따르면서 실업자를 흡수했다. '앵그리버드'의 성공은 그 연장선 위에 있다. 노키아 몰락을 불러온 스마트폰 유행을, 새로운 창업의 기회로 삼았다.

삼성전자가 망해도 그렇게 될까. 삼성전자를 무너뜨린 어떤 기술이나 서비스, 그걸 새로운 도전의 발판으로 삼는 기업인들이 많이 나올까. 그래서 실업자들이 금세 새 일자리를 얻게 될까. 그럴 것 같지 않다는 게 한결같은 전망이었다. 한국에선 대기업이 무너지면, '치킨 지옥'이 될 뿐이다. 치킨 프랜차이즈 업체만 성장한다.

중년 사무직 퇴직자, '앵그리버드'? 아니면 '앵그리치킨'?

그 뒤로, 이런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사실 관계를 따져보면, 온전히 맞는 말은 아니다. '앵그리버드'를 만든 로비오엔터테인먼트는 최근 대규모 감원을 했다. 핀란드는 만성 실업 상태다. 최근 집권한 중도우파 정부가 '기본 소득'을 내건 것도 그래서다. 신규 창업으로 실업자를 흡수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실, 당연한 일이다. 노키아는 사무관리직 비중이 높았다. 그들을 흡수할 곳이 없다. 평생 서류만 만지던 중년 사무직이 '앵그리버드' 만드는 회사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대기업의 몰락은, 어느 나라에서건 심각한 상처를 남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 차이가 사회의 수준을 드러낸다. 사회안전망이 튼튼하고 혁신의 기풍이 살아있는 사회에선 상처가 덜하다. 그 반대 경우라면 상처가 곪는다. 결국 사회가 무너진다.

기업 구조 조정정의와 효율, 질서 있는 퇴각

이제 한국에서 대기업이 무너지고 있다. 해운 및 조선 업종 대기업이 구조 조정을 앞두고 있다. 어떤 상처를 남길까. 어떻게 치유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먼저 몇 가지 원칙을 세워야 한다고 말한다. '질서 있는 퇴각'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주주, 기업 경영진, 노동조합, 채권단, 정부 등이 각각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야만 피해 규모가 줄어든다.

그리고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결국 누군가는 다쳐야 한다. 상처를 누가 더 많이 짊어져야 하나. 역시 사회의 수준이 드러난다. 정의로운 사회에선 기득권을 누린 이들이 피해를 끌어안는다. 그렇지 않은 곳에선, 약자가 피해를 뒤집어쓴다. 동시에 이는 효율의 문제이기도 하다.

1997년 경제위기 당시, 많은 기업이 구조 조정을 했다. 남을 사람과 떠날 사람을 정하는 기준은 대체로 능력과 무관했다. 내부정치 논리로 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결과, 조직이 역삼각형 꼴이 된 경우도 있었다. 조직 내 권력 지분을 가진 윗사람들은 자리를 지키고, 실무자들이 대신 쫓겨났다. 본사 사무직은 자리를 지키고, 대신 연구원과 엔지니어들이 쫓겨난 기업도 있다. 제품 만들 사람이 없어진 것이다.

곧 호경기가 왔을 때, 이런 기업은 대부분 경쟁사에게 밀려났다. 구조 조정은 당장의 위기에 대한 대응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준비여야 한다.

"대주주, 주주, 그리고 채권자" 순으로 책임져야현실은 반대


그래서 우선순위를 어떻게 정하자는 건가. 박상인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교수는 JTBC 인터뷰에서 "대주주, 주주, 그리고 채권자" 순서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다.

현실은 늘 반대였다. 재벌 총수(대주주)는 늘 지분 이상의 권한을 누렸다. 경영권을 남용해서 '빨대 꽂기'를 했다. 은행 대출로 몸집을 불린 뒤, 내부 거래로 이익을 빼돌리는 것이다. 자연스레 부실이 쌓인다. 그러다 임계점을 지나면, 위기가 온다. 그러면 정부는 은행, 특히 국책은행을 동원해서 부실을 메워준다. 나랏돈으로 회복한 기업은 다시 총수 일가 손에 들어간다. 부실의 책임자인 옛 총수가 다시 경영권을 행사한다. 금호아시아나 그룹 등 숱한 재벌이 이런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실제로는 채권자인 은행, 주주, 대주주 순으로 피해를 본다. 예컨대 분식회계로 버티다 무너진 동양그룹 사태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소액주주들이었다. 2013년 당시 동양증권(현 유안타증권)이 개인투자자들에게 입힌 손실 규모는 약 1조7000억 원대다. 역시 분식회계가 심각했고, 구조 조정이 진행 중인 대우조선해양 역시 소액주주들이 피해를 뒤집어썼다. 감춰져 있던 손실 규모가 드러나자, 하루 만에 주가가 폭락했다. 이 같은 부실 기업 회생은 대개 채권자인 은행이 담당한다. 은행의 손해는 다시 나랏돈으로 메운다. 그건 결국 세금이다.

"실업 막으려 은행 동원" → "빚 갚으려면 인력 감축" → "'주인 없는 회사' 서러워, 총수 복귀"

노동자는 이 과정에서 이용만 당한다. 부실 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국책은행을 동원하는 명분은 일자리 보호다. 국책은행이 채권자 자격으로 나서는 순간, 이런 명분은 뒤로 빠진다. '빚 갚기'가 절대 목표가 된다. 나랏돈, 국민의 세금을 낭비할 수 없다는 명분이 나온다.

결국 인력 감축이다. 국민 세금이 투입됐는데, 노동자들은 이기주의에만 빠져 있다는 비난이 나온다. '국민 vs. 노동자'라는 흔한 구도다. 보수 언론은 이들 기업 정규직의 급여 수준을 비난하며 거든다.

채권자가 군림하는, '주인 없는 기업'의 비애를 느낀 노동자 가운데 일부는 옛 총수의 복귀를 원한다. 기업 부실의 원인을 제공한 그 총수가 돌아오는 게 차라리 낫다고 느낀다. 노동조합은 분열하거나 고분고분해진다. 이후 복귀한 옛 총수는 더 강한 권한을 휘두른다. 부실의 원인이 견고해지는, 악순환이다. 하긴, 한국 사회에서 기업만 그런 건 아니다. 상지대학교 등 비리 사학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옛 이사장이 복귀했다. 일종의 공식이다.

ⓒ매일노동뉴스(정기훈)


증세과 국회를 싫어하는 대통령의 선택

구조 조정 도마 위에 오른 해운 및 조선 업계가 KDB산업은행(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진 빚이 20조 원대다. 이들 국책은행 자본의 60%다. 산업 구조 조정이 해운, 조선 업계만으로 끝날 리 없으므로, 정부가 나선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에 돈을 공급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악순환 구조가 또 반복될지 두고 봐야 한다.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두 가지는 재정 정책, 하나는 통화 정책이다. 재정 정책은 현금 지원과 현물 지원으로 나뉜다. 정부 재정, 즉 국민 세금으로 현금을 출자하려면,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런 선택지는 거부했다. '증세'에 대한 거부감일 게다. 어차피 나랏돈을 쓰는 건 피할 수 없다. '증세' 없이 '재정 건전성'은 더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나랏돈을 쓴다? 논리적으론 모순인데, 대통령은 고집하고 있다.

현물 지원은 어떨까. 이건 조금 쉬운 길이다. 대통령이 혐오하는 국회를 거치지 않아도 된다. 기획재정부가 보유한 공기업 주식이 있다. 한국전력공사, IBK 등이다. 이들 주식을 출자 형식으로 지원하는 길이 있다. 효과가 약하다는 게 단점이다. 은행 자기자본을 계산할 때, 주식은 위험 자산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선택한 건 세 번째였다.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라고 한다. 한국은행을 동원해서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을 지원한다는 것이다. 현행 법에 따르면, 한국은행이 민간 은행을 지원할 길은 없다. 그런데 산업은행은 지난 정부에서 부분적으로 민영화됐다. 따라서 법을 바꿔야 한다. 역시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다만 '증세' 논란은 피할 수 있다. 그 점이 대통령 입장에선 매력적이었을 게다. 그러나 국민 부담은 결국 마찬가지다.

돈에 물 타는 정부, 부동산 부자만 보호한다

전두환 정권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을 지냈던 김재익은 경제정책의 방향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는다. 인플레이션을 방치했던 박정희 정권과 달리, 물가 안정에 주력했다. 1983년 버마 아웅산 참사로 사망한 그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했다던 말이 인상적이다. 그의 어머니가 인플레이션이 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80년대 경제개혁과 김재익 수석>(사공일·남덕우 등 지음, 삼성경제연구소 펴냄)에 소개된 내용이다.

"(정부가) 돈에 물을 타는 겁니다. 그러면 돈이 싱거워지죠."

돈이 싱거워지면, 대개는 노동자가 피해를 본다. 대신, 부동산 등을 가진 자산가가 이익을 본다. 박근혜 대통령이 택한 게 이런 길이다.


박 대통령, '치킨 지옥' 걱정한다면 '재정 정책' 거부감부터 털어내라


어쩔 수 없는 길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한국은행을 동원하는 게 절대악은 아니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은 나라마다 다른 수준으로 보장한다. 독일은 강한 편이고, 일본은 약한 편이며, 미국은 그 중간이다. 어느 모델이 꼭 옳다고 할 수는 없다.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교수 등 진보 성향 학자 가운데서도 중앙은행의 독립성에 대해 비판적인 이들이 있다. 시장주의 성향 주류 경제학자 중에서도 몇 가지 단서를 달아서 양적완화에 찬성하는 이들이 있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 방향이 걱정스러운 건, 그 끝에 다수 서민과 노동자의 삶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노키아 몰락에 관한 한, 핀란드 정부는 시장 원리에 충실했다. 노키아에 대한 정부 차원의 금융 지원은 없었다. 나랏돈을 아끼기만 했나. 그건 아니다. 오히려 돈을 풀었다. 방향은 사회 안전망이었다. 실업자들이 재취업 및 창업에 필요한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익히도록 지원했다. 노키아가 사라진 자리를, '앵그리버드'로 대표되는 신생 기업이 어느 정도는 메울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은 사회 안전망에 관심이 있나. 없어 보인다. 재정 정책에 대한 거부감이 증거다. 실업 대책 등 사회 안전망은 재정 정책 영역이다. 한국은행을 동원하는 통화 정책으로는 불가능한 영역이다. 세금을 걷고, 그걸 어떻게 쓸지에 대해 국회에서 토론하는 일을 대통령이 꺼리는 한, 우리에게 핀란드의 길은 없다. 사회안전망이 견고한 핀란드조차 노키아 몰락으로 고통받았다. 우리 앞엔 그보다 더 끔찍한 '치킨 지옥'이 기다린다. 모두가 '치킨집' 차려서 망하는 길이다.

재벌 총수의 무능과 무책임이 낳은 구조 조정 국면. 노동자는 이용만 당하다 결국 피해를 뒤집어쓰는 악순환. 대통령이 '치킨 지옥'을 정말 걱정한다면, 이런 악순환부터 끊어낼 일이다. 재벌 총수에겐 시장 원리를, 노동자에겐 복지 논리를 적용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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