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집 "새누리, 보수적이되 민주적이어야 산다"

"종북 등 배제적 언어 쓰면 안 돼…보편 인권 말하는 보수 돼야"

"이번 선거의 교훈은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의 유권자들은 보수와 진보를 떠나 '민주적 규범은 무조건 지켜 져야 한다'는 컨세서스(사회적 합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준 것이다."

진보 진영의 대표적 지성인 최장집 고려대학교 명예교수가 25일, 새누리당 20대 국회의원 당선자들 중 일부를 만나 한국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보수 정당이 나아가야 할 길과 극복해야 할 문제들을 주제로 강연을 했다.

최 교수는 이번 4.13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참패하게 된 이유로 청와대와 새누리당의 '민주주의 규범 무시'를 지목하며 삼권분립을 위한 노력과 국가주의에서 벗어난 인권 존중 정신, 대기업 중심 정당에서의 탈피, 평화 지향적인 남북 관계 조성 노력 등을 주문했다.

'2016 민의에 응답하라'는 제목으로 열린 이날 강연은 가칭 새누리당 혁신모임(간사 황영철 당선인)의 주최로 국회 의원회관에서 진행됐다. 강연에는 김승희 김영우 나경원 박인숙 심재철 오신환 이이재 이주영 이학재 정병국 하태경 황영철 당선인 등이 참석했다.

"삼권분립이 민주주의 근간인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


최 교수의 이날 강연은 크게 두 덩어리로 나뉘어 있었다. 새누리당의 총선 패배 이유와 더 좋은 보수 정당이 되기 위해 새누리당이 지향해야 하는 가치들에 대한 설명으로 구분된다. 이를 최 교수는 "보수적이되 민주적이고, 보수적이되 자유적이고, 보수적이되 다원주의적이고, 보수적이되 평화적인"이라는 표현으로 요약해 제시했다.

최 교수가 지목한 새누리당의 가장 큰 총선 패배 이유는 '민주주의 규범 경시'였다.

공천 파동을 낳은 수직적 당·청 관계, 정당 정치를 외면한 일방적인 여당 주도의 국회 운영,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인들의 책임 윤리 상실 등으로 보수 성향의 유권자들마저 투표장으로 나가지 않았다는 것이 최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이날 "민주주의는 제도 운용이라는 절차적 측면과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정책의 결과 및 효과라는 실체적 측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이 두 면 모두에서 새누리당에 좋은 점수를 주기가 어렵다"면서 "무엇보다 비판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대통령의 책임 윤리"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어 "임기 후반을 맞이한 대통령이 자신의 세력을 확대·유지하기 위해 당의 자율성을 존중하지 않고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민주주의 원리와 규범에 어긋난다"면서 "민주주의를 움직이는 기본적 근간이 삼권분립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또 "기본적인 (민주주의) 규칙들이 정부 국회, 여야 간, 여당 내에서 노골적으로 무시되고 지켜지지 않았고 그 중심에 새누리당이 있었다"면서 그 결과 "특히 보수적 성향의 도시 중산층 투표자들이 투표장으로 나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이번 선거의 교훈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유권자들이 보수와 진보를 떠나 민주주의 가치와 규범에 대해 확고한 컨세서스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면서 "유권자들은 여-야 갈등이나 보수-진보 갈등은 민주주의라는 컨세서스 위에서 전개되어야 한다고 명령하고 있다"고 말했다.

▲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가 25일 오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가칭 새누리당 혁신모임에 참석해 강연을 시작하기 전 인사말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과거로 후퇴하다 권위주의에 가까워진 것 아닌가 아슬아슬"


따라서 새누리당이 '혁신'을 위해 우선 다져나가야 하는 가치는 '민주주의'다.

최 교수는 이날 "한국은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가 위로부터 산업화를 주도한 후에야 민주화가 이뤄졌다"면서 "이런 조건 때문에 생겨난 (보수-진보 진영의) 힘 격차가 한국 보수파들이 현실에 안주하도록 하는 원천이 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엠비(이명박) 정부로부터 현재까지 여러 부문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해왔다고 생각한다"면서 "솔직히 말해 총선 이전까지 민주주의가 후퇴를 거듭한 나머지, 권위주의 경계로 가까워지고 있는 것 아닌가란 아슬아슬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두 번째로 최 교수가 제시한 가치는 자유주의와 다원주의다. 이는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사회 운영 원리를 떠받치는 사회적 이념이자 보조적 규범이다.

최 교수는 "우리보다 앞서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던 서구 나라들은 자유주의나 다원주의가 먼저 사회에 내면적 가치로 수용되고 자리를 잡은 뒤에 민주주의가 발전했다"면서, 그런데 한국은 "자유주의나 다원주의라는 사회적 기반을 갖지 못해 민주주의가 훨씬 취약하다"고 우선 설명했다.

선거 제도와 같이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최소의 요건"을 갖추고도 다원주의나 자유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탓에 "좋은 효과를 낳는 데 있어 서구 사회보다 훨씬 뒤떨어진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보편적 인권 확립, 자신 있게 말하는 보수가 아무도 없다"


최 교수는 특히 지난 연말 새누리당 주도로 국가정보원에 막강한 정보 수집 권한 등을 주는 테러 방지법이 국회를 통과한 것을 자유주의가 심각하게 훼손된 사례로 집어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자유주의는 개인 인권과 존엄성을 존중하고 이를 중심에 두는 것"이라면서 이런 "개인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국가가 필요한 것인데, 우리는 국가를 개인에 우선하는 권위주의적 전통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이어 "강력한 국가보안법이 이미 존재하고, 범인 체포율이 세계 최고를 자랑하며 이슬람 권역에서 멀리 떨어진 한국에서 개인의 시민권을 제한할 강력한 법(테러방지법)을 제정할 이유가 어디 있느냐"며 "보편적 인권을 확립하는 게 최고의 안보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보수가 아무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이어 다원주의의 중요성을 설명하며 새누리당에 대기업 중심성을 탈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사회적 약자들이 정치 제도권으로 들어오는 게 허용되어야 다원주의가 발전하는데, 꼭 새누리당뿐 아니라 야당도 비례대표 후보 명단을 보면 서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으로 여겨지는 노동자 농민 등 생산자 집단 대표는 보기 어려웠다"면서 이런 조건에서는 "다원주의가 발전하기 상당히 어렵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보수 정당인 새누리당이 생산자 집단들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뛰어넘어 노동자와 농민 등의 권익을 대변했으면 좋겠다"면서 "보수 정당으로서 어떤 경제 발전 정책을 추구하든 그 정책의 영향을 받는 폭넓은 이해 당사자 집단의 존재를 인정하고 타협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당장 '비정규직 양산 정책'이라는 노동계의 강한 반발에도 노동 4법 통과 몰이에 여념이 없었던 새누리당의 모습을 지적한 것으로 풀이된다.


"좌파라고 하면 되지 왜 종북이라 하나…배제의 언어"


마지막으로 최 교수가 새누리당에 조언한 변화 방향은 '평화 공존'을 중시하는 남북 관계 설정이다.

최 교수는 이날 "저는 남북 민족 문제 해결에 있어 평화와 공존 외에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서 "북한을 힘으로 굴복시키려는 현재의 대북 강경 노선은 안보 위기와 전쟁의 위험성을 높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이런 강경 대북 정책이 실제로는 '국내 정치'를 여권에 더 유리하게 끌고 가고자 적극 활용되고 있음을 지적하며 "강경 대북 정책이 결국 국내 정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다 아시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 교수가 지적한 대표적인 국내 정치 활용법은 '종북'이란 표현의 반복적인 사용이다.

그는 "왜 종북이라고 부르냐. 좌파라거나 진보라고 불려야 마땅한데 종북이라고 규정해 버리면 여기서 어떤 정치적 타협이나 협력, 동반이란 것은 나오기 어렵다"면서 "용공 친북 종북과 같은 말은 한 공동체 안에서 특정 개인을 억압하는 배제의 언어"라고 비판했다.

최 교수는 강연을 마치며 새누리당에 과거 지향적인 보수가 아닌 혁신된 보수가 될 것을 격려했다.

그는 "새누리당은 선택의 기로에 있다"면서 "과거의 보수로 되돌아가는 길을 밟을 것이냐 아니면 경제적으로 선진국 문턱에 이른 한국이 민주주의 자유주의라는 세계 보편적 가치에 부응하면서 한 단계 높은 수준 사회로 나가게끔 하느냐란 기로에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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