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의료비는 가계 파탄의 3대 원인 중 하나가 되고 있다. 실제로 기초 생활 수급자 편입 사유로 실직(29%), 수입 감소(22%)와 더불어 의료비 지출(18%, 보건복지부, 2011년)이 3위를 차지했다. 현재도 '본인 부담 진료비 상한제'가 시행되고 있지만, 비급여 진료 항목에 대해서는 환자 본인이 100%를 부담해야 하므로 실제 중증 질환자들이 부담하는 진료비는 진료비 상한제도의 상한보다 훨씬 높다.
이렇게 높은 의료비 부담은 민간 의료 보험의 높은 가입률로 이어지고 있다. 전체 가구의 81.4%, 20세 이상 성인의 69.8%가 질병 보장 민간 보험에 가입하고 있고, 이들이 보험 회사에 납부하는 민간 의료 보험료도 월 평균 10만 원을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즉 국가가 제공하는 건강 보험의 보장성이 낮아, 우리 국민은 건강 보험 1인당 월 평균 자가 부담 건강 보험료의 3배에 해당하는 금액을 민간 보험으로 부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국민 4명 중 한 명은 보건의료 부분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진할 정책으로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것이라고 응답했다(2016년 3월. 의료정책연구소). 하지만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정부가 나서서 덜어주지 않고, 오히려 이를 조장하고 방치하여 민간 보험에 가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자아내고 있다. 최근에도 국민건강보험의 누적 재정 흑자가 17조 원에 이른다거나, 정부 정책이 오히려 민간 보험 회사들을 도와주고 있다고 보도되고 있다.
20대 총선에서 제안된 건강 보험 관련 공약들
이렇게 된 근본 원인은 사실 정부에 앞서 정치권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총선에서 각 정당들이 제시한 국민건강보험 관련 공약들을 살펴보자.
우선, 집권 여당인 새누리당의 10대 공약에는 보건의료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새누리당은 경제 민주화와 보편적 복지 등을 약속하였던 지난 2012년 총선이나 대선 때와 달리, 야권 분열로 충분히 압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나중에 발목을 잡힐 수 있는 부담스러운(?)' 공약은 거론하지 않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새누리당이 문제라고 지적하는 야당도 없고, 국민 4대 부담의 하나로 손꼽히는 의료비 부담에 대한 정치권의 대책을 촉구하는 언론도 거의 없다. 적어도 공약 부분에서는 새누리당의 전략이 효과적인 것으로 증명되고 있는 듯하다.
더불어민주당의 국민건강보험 관련 공약은 오히려 지난 2012년 대선 공약에 비해 대폭 후퇴하였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건강보험 정책의 핵심을 부과 체계 개선으로 정하였다. 물론 여기에는 피부양자의 무임 승차 문제 해결이나, 사후 정산제 도입을 통한 국가의 책임 강화, 보험료 부과의 상한선 폐지 등 꼭 필요한 개혁도 있다. 하지만 지역 가입자와 직장 가입자 간의 부과 기준의 차이 해소, 자산에 대한 부과 방식의 개편 등 지난 20여 년 간 번갈아 집권한 여러 정부에서 시도하였지만 기술적인 한계로 진전이 안 되는 문제를 여전히 주요 이슈로 언급하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은 이번 공약을 통해 국민건강보험 추가 재원 4조3600억 원을 확보하겠다고 주장한다. 과연 국민이 바라는 국민건강보험의 개선이 부과 체계의 개선을 통한 형평성의 제고일까, 아니면 돈 걱정 없이 의료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해주고, 매달 불필요한 민간 보험료를 내지 않아도 되도록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것일까?
4대 중증 질환을 국가가 보장하겠다고 공약하고 4년이 지난 지금 연간 6000억 원 경감으로 공약이 이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새누리당과 더불어민주당의 공약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더민주는 여전히 국민에게 보험료를 조금씩 더 내더라도 연간 100만 원 본인 부담으로 모든 국민에게 의료비 걱정이 없도록 근본적으로 개혁할 의지는 없다. 민주당이 약속한 4조 원 정도의 추가 재정 확보를 달성하더라도 국민의 의료비 걱정은 줄어들지 않고, 매년 어쩔 수 없이 20조 원 넘게 부담하고 있는 민간 보험료 부담이 경감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특히 더불어민주당은 이렇게 확보된 재정으로 보장성을 획기적으로 높이기보다는 일부의 보험료 인하 효과와 생계형 미납자들에게 국민건강보험료 재정 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이 정책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소위 말해서 민주당이 다수 정당이 되어도 적어도 의료비 부분에서는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것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국민의당은 의외로 보건 의료 공약에 상당히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런데 공약의 내용을 보면 국민 중 3000만 명이 가입하고 있는 실손 의료 보험을 줄이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다. 공익적인 측면을 강화하는 '민간 의료 보험법'을 제정하는 것을 첫 번째로 제안하고 있다. 생명 보험 회사들이 상장했을 때 보험 가입자의 돈을 기반으로 축적된 적립금으로 발생한 자본이 주식의 가치로 전환되면서 수십조 원의 이익이 발생하였지만, 결과는 어땠나? 이익은 주주들이 보유한 주식의 가치 상승으로 연결되었을 뿐이다. 생명 보험 회사들이 공익적 역할을 강화한다고 창립한 '생명 보험 사회 공헌 재단'에는 약속한 매년 1조 원이 아니라, 지난 10년간 누적하여 1000억 원을 출연하는 데 그쳤다.
국민의당의 '민간 의료 보험법' 공약은 혹시나 새로 국회에 진출한 국민의당을 끌어들이기 위해 새누리당이 국민의당과 공동으로 추진한다면, 오히려 문제가 많은 민간 보험을 합법화하고 면죄부를 주는 결과가 될 수 있는 위험한 공약이다. 그런데 서로 치열하게 경쟁을 하고 있는 어느 당도 이에 대한 지적은 하지 않고 있다. 또한 국민의당은 공공 보건 의료를 확충하겠다고 공약은 하였지만 언제까지 어느 정도로 확충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어, 새누리당이나 더불어 민주당과의 차별성은 찾을 수 없다.
다행히 이번 총선에 참여한 진보 정당들은 국민건강보험의 보장률 90% 확대, 의료 영리화 반대와 전 국민 건강 담당 의사 도입(정의당), 건강 보험의 보장성을 85% 수준으로 강화하고 공공 병상의 비중을 30% 수준으로 확대하며, 의료비의 공공 재원의 비중을 현행 55%에서 20% 인상(노동당). 0세에서 14세까지의 병원비 전액 국가 지원(민중연합당) 등을 공통으로 공약하고 있다.
노동당도 15세 이상 국민의 의료비 부담은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 없다. 이뿐만 아니라 어린이 의료 보장에 드는 2조3837억 원의 재정을 국민건강보험 누적 흑자액에서 조달하고, 국고 지원을 10% 높여 마련하자고 제안하고 있어, 국민건강보험의 흑자가 소진되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대책은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지난 2012년 총선과 대통령 선거에서 국민이 보험료를 더 내기보다는 재벌 대기업에 대한 증세로 재원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아직도 바꾸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적어도 20대 총선의 정치적 지형뿐 아니라 공약이라는 측면에서 보아도, 선거 이후에 의료 보험의 보장성이 획기적으로 확대되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줄어들거나, OECD 국가와 비교해도 너무나 현저하게 낮은 의료 공공성이 획기적으로 강화될 전망은 전혀 없는 것 같다.
'건강 보험 하나로' 정책을 다시 제안한다
명백하게 국민에게 부담되는 현재의 의료 보장 체계를 그대로 가지고 국민 소득 3만 달러의 선진국으로 갈수는 없다. 국가가 국민의 민간 의료비 걱정을 방치하고, "미필적 고의"로 민간 보험 회사들의 이익을 높이는 문제가 방치되어서도 안 된다.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 강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론적으로나 경험적으로나, 의료 보장 분야의 정책적 해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 해법은 시민 사회 단체의 노력으로 이미 지난 수년간 국민의 공감대를 얻고 마침내 대통령 공약으로 까지 채택된 적이 있는 "건강보험 하나로" 정책이다.
2010년 7월 17일 공식 출범한 '건강보험 하나로 시민회의'는 줄곧 '국민건강보험료 더 내기' 운동을 해왔다. 현재 우리가 내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료, 사용자(기업) 부담 국민건강보험료, 정부의 국고 지원 등 국민건강보험 재정 부담 3주체 모두가 지금 내는 국민건강보험료보다 더 부담하고, 이렇게 마련된 재정으로 OECD 국가 평균 수준의 보장성을 달성하자는 것이다.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별도의 법령 개정 없이 가능하다. 국민이 지금 내고 있는 국민건강보험료의 25%를 더 내면 된다. 국민건강보험료율 인상으로 월 평균 세대당 건강 보험료는 현행 기준으로 9만4000원에서 11만2000원으로 약 1만8000원이 인상되지만 1인당 국민건강보험료는 4만 원에서 4만7000원으로 약 8000원 인상된다(2015년).
매달 4만 원을 내는 사람은 1만 원을 더 내면 된다. 현재 국민건강보험료로 매달 20만 원을 내는 사람은 25만 원을 내면 된다. 이렇게 하면 전체 국민의 70%는 1.9조 원을 추가 부담하지만, 동시에 상위 30%의 부자들은 5.6조 원을 부담하게 된다. 사용주들이 부담하는 보험료는 3.2조 원이 늘어나지만, 동시에 국고의 지원금은 3.6조 원이 자연 증가되는 것이다. 즉 현재 약 46조 원인 연간 국민건강보험 재정이 15조 원 가까이 더 늘어난다.
이렇게 추가로 재정이 확보되면, 획기적인 의료 보장성 확대를 통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을 낮출 수 있다. 첫째, '입원 진료 보장률 90%'를 달성할 수 있다. 선택 진료비, 상급 병실료 차액을 포함한 입원 분야 비급여 진료의 전면적인 국민건강보험 급여화가 가능해진다. 정부의 급여 확대가 민간 보험 회사의 이익으로 돌아가지 않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
둘째, '연간 본인 부담 의료비 100만 원 상한제'를 실시할 수 있다. 1년 동안 부담해야 할 총 의료비의 본인 부담금이 100만 원 정도라면 대부분의 가구에는 그리 큰 부담이 아닐 것이다. 그것도 부담인 저소득층은 따로 국가가 지원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의 70%가 가입된 민간 보험에서 탈퇴하거나 연금형 보험으로 전환하는 등 민간 보험료 부담을 덜 수 있다.
셋째, '간병의 급여화'에 소요되는 재정도 충당할 수 있다. 부모님이 아프다고 여성이 직장을 포기하고 간병을 해야 할 부담도 없어지고, 자녀가 아프다고 밤새워 병실을 지킬 필요도 없어진다.
넷째, 노인 틀니, 치석 제거 급여 확대 등 '치과 진료 분야'를 포함하여 각종 비급여 부분의 보장성 강화도 가능하다. 이에 더해, '의료 사각 지대의 해소'를 위해 최하위 5% 소득 계층에 대한 건강 보험료 면제도 가능해진다.
물론 다수의 국민은 자신의 부담이 늘어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치권은 심지어 선거를 포기하라는 것이냐며 보험료 인상 정책을 거부한다. 하지만 이제는 과학적 근거와 철학을 가지고 당당하게 보험료를 더 나자고 하는 정당이 필요하다. 당장 표가 안 되고 욕을 먹더라도 실제로 국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실행 가능한 정책을 제안하는 정치인이 필요하다.
정말로 국민의 건강이 걱정되고, 의료비 부담을 경감시키고 싶은 정치인이라면 당장은 욕을 먹더라도 '저부담-저급여' 체계를 '적정 부담-적정 급여'의 국민건강보험 체계로 전환하자고 주장해야 한다. 그것이 중산층과 서민 등 대부분의 국민에게 경제적으로 이익이며, 사회 연대성을 높여주고 국민 부담을 낮추어 가계의 가처분 소득을 높여주며, 적극적으로 근로자들을 비롯한 국민의 건강을 보장해 안정적인 경제 성장에도 기여할 수 있는 진정한 복지 국가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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