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해도, 염증이 나도, 참여를 이야기해야 하는 시절이 다시 왔다. 국회의원에 출마한다는 많은 사람이 정치 '참여'를 말하고, 이제 또 수많은 사람이 투표 '참여'를 말할 차례다. 최악을 피기 위해서, 차라리 차악을 위해서라도 참여하라, 이미 많이 들었고 앞으로도 계속 들을 이야기다.
적어도 투표에 관한 한, 참여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개념이 '합리적 무지' 가설이 아닌가 한다. 노파심에서, 설명하자면 이렇다. 투표의 본래 목적이 가장 좋은 후보자를 선택하는 것이라면, 그 일은 절대 만만치 않다. 공부하고 생각하며 정보를 모아야 하고, 다른 사람의 말도 들어봐야 한다. 직접 만나 인품을 보고 이야기를 해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다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까. 아마 쉽지 않을 것이다. 설사 방법이 있다 해도 너무 힘들다. 무슨 돈과 정성으로, 게다가 무릇 후보자란 얼마나 매끄럽게 겉을 가꾸었을 텐데. 진짜 정보를 얻는 것도 그것을 판단하는 것도 쉽지 않다.
더 큰 문제는 노력의 결과를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투표해 봐야 기껏 한 표가 결과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아니 전혀 없을 것이다. 콘크리트 지지층이니, 누가 당선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느니, 내 한 표가 도대체 무슨 소용일까. 이런 투표의 '가성비'는 제로에 가깝다(물론, 비례대표는 전혀 다르다. 내 한 표의 영향이 크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만에 하나, 다행스럽게 그런 사람을 뽑아 국회의원으로 만들었다 치자. 그 사람이 나를, 내 의견을, 내가 지지하는 정책을 직접 항상 '대표'할 수 있을까. 장담할 수 없으니,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다.
많은 사람에게 투표는 힘만 들고 남는 것이 없는, 손해 보는 행동이다. 비용과 효과를 비교하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으로 당연하다. '무지'라는 말을 쓰지만, '합리적 무지'는 가장 현명한 행동을 역설적으로 나타낸다(그 때문에, '무지'보다는 '무시'라고 쓰는 것이 더 합당한 번역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여러 가지 반론이 있고, 갈래는 나뉘지만 요약하면 비용 대비 효과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내 한 표가 무엇인가를 바꿀 수도 있다, 더 정확하게는 바꿀 수 있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많은 주장의 요지다. 더 자세한 내용은 2~3년 전에 이정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프레시안>에 쓴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관련 기사 : 정치 실패, 결국 유권자 책임이다)
이런 반론도 일부 설득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규범으로는 몰라도, 결과만 생각하면 '합리적 무시' 가설을 완전히 버릴 수 있을까? 경험으로 볼 때 투표가 무엇인가를 바꾼 적이 있었던가? 잘 모르겠다.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간접, 장기 이런 말이 붙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냉소와 무력감을 피하기 어렵다.
자신할 수 없지만, 공화주의라는 대안이 작게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여기서 이 주제를 자세하게 다룰 여유와 능력이 없지만, 우리는 공화주의의 핵심 논제 가운데 하나가 공공 영역에 대한 참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결과가 어떻든 정치체에 참여하는 것이 '덕(德)'이고 윤리라면, 정치 참여와 투표는 '공화국' 시민의 당연한 의무라 할 것이다.
'합리적 무시'에 비하면 다분히 규범적이다. 투표를 시민의 의무로 보고 강제하는 오스트레일리아나 일부 라틴아메리카 나라가 생각하는 투표는 아마도 이런 의미를 담은 것이 아닌가 싶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그리고 출발할 때는 그런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공화국에서 '시민 되기'가 이런 것이라고 해도, 솔직히 '결과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 걸린다. 참여는 여전히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한 것이며, 어떤 결과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가 싶다. 바람직한 정치 공동체를 이룬다는 좀 더 궁극적인 목표, 그리고 그에 종속된 참여.
과연 그런 것인가. 우리가 생각하는 투표는 '과정'으로서의 민주주의가 하나의 행위로 '제도화'된 것이라고 본다. 다른 정치 참여도 비슷하다. 그 결과가 어떠하든, 심지어는 그 과정의 질이 어느 수준이든, 과정 그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보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선거 참여와 투표 참여, 나아가 정치 참여는 (공간적으로) 훨씬 더 넓어지고 (시간적으로) 길어져야 한다.
수단과 목적은 제자리를 찾아 바뀌어야 한다면, 제도와 선거가 수단이고 참여가 목적이다. 참여는 삶의 양식(모양)이자 가치의 양식이 된다. 그러고 보니 이런 생각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아미티야 센이 말하는 '능력(capability)'의 핵심 조건 가운데 하나가 바로 참여다.
소박하게는, 고민하고 한탄하며 비판하는 행위를 참여라 해야 한다. 누구를 당선시키지 못해도, 내 의견을 국회에 가서 대표하지 못해도, 작은 행동도 모두 참여다. 더 큰 것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듣고 토론하며 논쟁해 '공론'을 만들어내는 실천이다. 제도 민주주의는 그리고 투표는 그 자체로 절대화되는 것이 아닌, 삶의 본질이자 의미로서의 참여를 촉진하는 도구라 해야 한다.
도구와 규범을 넘어 참여 그 자체로 의미라고 했지만, 분명해져야 하는 것이 많다. 특히 생활과 경험에서는 더욱 그렇다. 참여가 좀 더 나은 삶, 좀 더 살 만한 사회를 가능하게 할 것인가? 우리의 행복과 삶의 질, 웰빙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가.
마침 지난 주말, 대전에서 건강 분야 참여를 토론하는 작은 모임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가 오갔지만,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는 것이 전반적인 분위기였다. 새로운 시대, 모두 건강 증진을 말하지만, 참여가 아니라 동원이 아닌가. 국가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것을 참여로 포장하고 있지는 않은가. 결국, 참여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답을 얻지는 못했으나 질문은 다시 벼렸다. 이 자리에서 경상대학교 정백근 교수가 발표한 내용(또는 주장) 일부를 인용한다.
"사회 구성원들이나 지역 사회의 적극적인 참여 하에 그들이 보유하고 있는 자원들을 활용할 수 있다면 보건 사업의 효율적 수행이라는 성과도 얻을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정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주민 참여는 보건 사업의 효과적, 효율적 수행에 있어서 많은 장점을 지닌 전략이 될 수 있다.
(…)
민주주의는 인간 사회의 행복과 안녕을 보장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참여는 그 자체만으로도 목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행위이다.
(…)
참여는 보건 사업의 효과성과 효율성을 달성할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기도 하지만 공공성, 민주주의, 인권과 연관됨으로써 그 자체로서 목적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이 자리에서 논의했던 참여는 선거나 투표, 정치 참여와 직접 상관이 없다. 그러나 여기서도 핵심 질문은 참여가 수단인가 가치인가 하는 점에 집중되었다. 건강이라는 (절대적) 가치를 이루는 데에는 참여는 자칫 도구 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렵다. 그런데 참여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다시 다음 달에 있을 선거로 돌아온다. 참여가 이런 것이라면, 선거와 투표를 앞둔 지금이 더 중요한 시기가 아닐까? 과정이 의미의 원천이며, 생각하고 말하며 토론하는 것이 이 시기의 가치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 결과로 만들어지는 공론과 여론, 그리고 선거 결과로 뽑히는 좀 더 나은 대표자는 말하자면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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