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소탄 터질 때, 北 사람은 <내부자들> 보면서…

[강주원의 '국경 읽기'] 북한 4차 핵실험 이후, 단둥 ①

핵실험 때마다 반복 보도되는 단둥의 '긴장감'

2006년 10월, 장기간 현장 연구를 계획하고 단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때 북한의 1차 핵실험(2006년 10월 9일)이 연일 방송과 신문을 장식하고 있었다.

주변 동료와 선배들은 "뭐 대단한 박사 학위 논문을 쓴다고, 위험한 중-조 국경 지역에 갈 필요가 있을까?"라는 진심어린 걱정을 해 주었다. 핵실험과 관련된 '긴장감 감도는' 단둥 현지 소식을 읽으면서, 나 역시 무모하다는 생각을 했지만 단둥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실었다.

10년 전 일이지만 단둥에 도착 한 다음 날, 눈앞에 펼쳐진 압록강변의 풍경은 잊을 수가 없다. 핵실험 직후 문을 닫았다는 북한 식당은 영업을 하고 있었고, 강변 광장에는 산책하던 중국 사람들이 결혼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여러 쌍의 신랑과 신부를 구경하고 있었다. 그 이후 나는 한국의 언론을 통해서 접한 중-조 국경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하나 둘 없애는 작업이 필요했다.

2009년 5월, 한창 연구실에서 박사 논문 초안을 고민하던 나는 북한의 2차 핵실험(2009년 5월 25일) 소식과 함께 보도되는 단둥 소식에 망연자실이 되었다. 단둥과 신의주 두 도시 사람들의 삶의 수단인 국경 넘나들기에 관한 3년 동안의 연구가 허사가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기우였다. 언론의 보도와는 다르게 그 이후에도 단둥과 신의주의 삶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2013년 2월, 북한의 3차 핵실험(2013년 2월 12일) 이후에도 '단둥의 긴장감'과 함께 '압록강의 황량함'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익숙한 내용은 반복되었다.

▲ 북한의 핵실험이 있을 때마다, 단둥은 긴장감이 감도는 도시로 묘사된다. 북한의 1차 핵실험 직후에 목격한 단둥의 풍경은 평화로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2006년). ⓒ강주원

나는 2016년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2016년 1월 6일)이 보도되는 순간 단둥의 날씨를 체크했다. 이번에도 단둥과 압록강의 영하 10도 내외의 기온은 고려하지 않은 채 기사가 나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앞서 3번의 핵실험 때와 마찬가지로 다음 날부터 한국 언론은 단둥을 "북한 접경 중국 단둥…고요 속 긴장감 고조"라는 비슷한 머리기사로 묘사하였다.

북한의 핵실험 소식이 전해진 6일 신의주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접경한 중국 랴오닝(遼寧)성 단둥(丹東)의 분위기는 외견상 고요한 가운데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 북한 신의주 맞은편 단둥 압록강변 공원에는 평소 산책 나온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댔으나 이날따라 오가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 단둥 열차역 부근에 조성된 '조선 한국 민속거리'에 있는 음식점과 가게도 종일 썰렁한 모습을 보였다. (<연합뉴스> 2016년 1월 7일)

특파원이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표정을 마지막으로 전해왔습니다. (MBC 2016년 1월 8일)

"도대체, 매번 반복 보도되는 '긴장감이 가득한 단둥'의 근거는 무엇일까?", "영하 10도의 날씨에 압록강의 칼바람을 맞으면서 산책을 할 사람들과 관광객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일까? 정말로 단둥의 상황이 바뀐 것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하자 와이프가 한마디 했다. "그렇게 궁금하면 단둥에 갔다 오지!"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나는 여행용 가방을 찾았다.

▲ 인천공항에서 단둥행 비행기를 타면 한 시간 만에 삼국이 공존하는 단둥에 도착한다(2016년). ⓒ강주원

북한 4차 핵실험 일주일 이후, 찾아간 단둥

1월 13일, 점심 때 대학로에서 회의를 마치고 귀가한 나는 저녁 6시쯤 집을 나섰다. 2015년 가을에 시범 취항을 한 인천-단둥 비행기의 출발 시간은 22시 05분이다. 전세기 형식이었던 이 비행기는 약 3달 동안 운행되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비행이다. 언제 다시 인천-단둥 간 비행기가 뜰지는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북한의 핵실험과 상관없다는 것이다. 이미 한 달 전부터 운행 중단이 공지되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한국 언론 보도 내용에 대한 확인 및 핵실험 직후의 변화상을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 숙제거리가 하나 더 생겼다. 나는 인천공항에서 이날 발표한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담화' 전문을 읽었다. 그 속에서 단둥에서 무엇을 봐야 되는지를 고민했다.

이륙한 후 한 시간 남짓 지나, 단둥 공항에 도착한 나는 자신이 부탁한 이런저런 물건을 받기 위해서 마중 나온 조선족 H 덕분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지 두 시간도 안 되어서 단둥 시내 호텔에 도착하였다. 로비 한쪽에서 북한 여성 4명이 단장(부한 무역일꾼들의 대표)을 찾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단둥에 도착했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였다.

조선족 지인과 함께 호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요즘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없다고 한국 언론이 보도"한다는 말을 그에게 던졌다. 그는 웃으면서 이렇게 답했다.

"연말연시에 단둥에 나와 있던 무역일꾼들이 신년 학습 때문에 고향(북한)에 돌아가는 것은 연례 행사인데, 그들이 없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며칠 전부터 다시 단둥에 북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던데…."

그는 핵실험 이후에 북한 사업 파트너들과 나눈 이야기와 어제 그들과 함께 본 한국 영화 <내부자들>(2015년)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늘어놓았다. 그 사이 해는 압록강 너머 신의주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 호텔 창 너머 단둥의 풍경과 사람들의 삶의 모습 어디에도 한국 언론이 보도하는 긴장감은 없었다. 다만 삼국이 공존하는 그 자체였다(2016년). ⓒ강주원

언론의 보도대로, 호텔 조식을 먹는 동안 북한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다만 20명 정도의 북한 사람들이 주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호텔 객실이 140여 개이고 1년 내내 주로 북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상황에서 중국이 대북제재를 하면 호텔은 어떻게 될까?"라는 대화를 조선족과 나눈 뒤, 나는 북한 화교 C 사무실로 걸어갔다. 역시 추웠다. 평소와 달리 걸어가는 약 10분 동안 북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중국 사람들도 보기 힘들었다.

북한의 2016년 달력이 걸린 사무실에 들어가자, 그는 "신의주 공장에 하청을 준 물건에 대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반겨준다.

"신의주에 1000명의 월급을 주는 날이 다가왔고, 월급 가운데 일부분은 현금 대신에 식자재를 사서 보내는 날이기 때문에 바쁘다. 한국 돈으로 한 달에 3000만 원 정도의 쌀과 콩기름 등을 보낸다. 며칠 전 신의주에서 건너 온 30명의 남자 노동자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기 전에 40평 아파트에서 잠시 머물고 있다."

그는 나와 함께 "그들이 먹을 식자재를 사기 위해서 시장에 같이 가자"고 했다. 얼떨결에 따라가서 며칠 동안 먹을 부식과 내일이 생일인 북한 노동자를 위해서 맥주까지 구입한 그가 1500위안을 지급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단둥의 북한 노동자 2만여 명이 하루에 구입하는 중국 쌀과 채소 그리고 고기의 양은 얼마나 될까? 북한 노동자 계약 서류에 보면 한 달 평균 한국 돈으로 약 8만 원이 1인 식비로 책정되어 있으니까, 어림잡아 한 달에 그들을 위해서 중국 재래시장에서 구입하는 식비 총액은 15억이 넘는다. 그럼 단둥의 북한 노동자가 1년에 300억 넘게 중국 재래시장에 돈이 돌게 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다 월급 대신에 신의주에 보내는 식자재 구입 금액까지 합치면 얼마나 될까!'

▲ 북한 노동자들의 식재료 구입처로 이용되는 시장 풍경이다(2016년). ⓒ강주원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한국 식당에는 북한 사람 4명이 식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들이 식사하는 모습은 예의상 안 찍었지만 그들이 떠난 테이블 위에 남겨진 한국 소주 빈 병을 사진에 담았다.

방금 북한 사람들이 먹었던 똑같은 음식으로 식사를 하면서 몸을 녹인 나는 일본 언론이 "북한 접경 지역 관광 업체들에게 관광객들을 북한 쪽으로 접근시키지 말라는 중국 당국의 긴급 지시도 내려졌다"고 보도한 압록강변의 선착장에 가보았다. 진위 여부를 확인할 수 없었지만, 영하의 날씨에 유람선을 타고자하는 관광객은 보이지 않았다.

▲ 식사를 하는 북한 사람들은 사진을 촬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이 떠난 자리와 한국 소주 빈병은 사진으로 남기고 싶었다(2016년). ⓒ강주원

조선족 거리에 지난 가을에 개업했다는 북한 식당과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 내역이 빼곡히 적힌 간판을 찍은 뒤 북한 화교 사무실을 다시 찾았다. 북한 무역 일꾼들 5명이 진을 치고 있는 관계로, 옆방에서 커피만 3잔 마시다가 한국 지인의 저녁 식사 자리에 합석을 했다. 마침 그는 한국에서 어제 온 사업 거래처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었다. 북한의 4차 핵실험이 술자리의 주제가 되기보다는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냉면 기계 1000여 대 이상을 평양의 냉면 식당에 팔았다"는 사업 이야기가 술 잔 사이로 오고갔다.

▲ 조선족 거리의 한국어 간판은 북한으로 수출하는 물품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중국은 북한으로 석유만 수출 혹은 원조하지 않는다(2016년). ⓒ강주원

(이번 단둥 현장 연구의 후반부 내용은 다음 연재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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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원

강주원 박사는 북한 사람, 북한 화교, 조선족, 한국 사람 그리고 탈북자를 동시에 연구하는 인류학자다. 2006년 10월부터 2007년 12월까지 15개월 동안 단둥에서 살면서 현장 연구를 한 것을 비롯해 지난 10년간 단둥을 수없이 방문하며 수백 명의 단둥 사람과 인간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국내외 언론 및 시민·사회단체의 국경 취재 및 관광을 자문하는 일도 병행 중이다. <나는 오늘도 국경을 만들고 허문다>(글항아리 펴냄)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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