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정산 '서민증세' 파동, 야당 되풀이 하나?

[기자의 눈] 야당 영입 재정 전문가, 새로운 세금 정치 이끌길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매번 시험이 끝나면, 전교 등수 1등부터 50등까지 명단을 벽에 붙이곤 했다. 당시는 대입 학력고사 시절이었는데, 3학년 2학기가 되면 수시로 모의고사를 쳤다. 모의고사 성적표엔 전국 응시자 가운데 몇 등인지가 적혀 있었다. 전국 수석부터 꼴찌까지 모두가 자기 등수를 확인했다. 과목별 등수도 함께 있었다.

그때는 그래서 평생 한 줄로 세워진 세상에서 살 줄 알았다. 학교 선생님들도 그렇게 가르쳤던 것 같다.

연봉 3450만 원, 소득 석차는 몇 등?

하지만, 아니었다. 주변 직장인들 가운데 대부분은 자기 연봉이 몇 등인지 모른다. 연봉제를 실시한 곳이 많아서 그렇다. 호봉제를 도입한 경우에도, 각종 성과급 및 복지 지원은 내역이 종종 불투명하다. 인사부서 근무자가 아니라면, 자기 연봉이 전체 직원 가운데 몇 번째인지 알기 어렵다.

전국 등수는 아예 꿈도 못 꾼다. 시험 점수처럼 한줄 세우기가 아니니 좋은 일 아니냐고? 엉뚱한 부작용이 있다.

연봉 3450만 원 직장인이 있다. 초봉이 아니다. 그는 전체 임금 노동자 가운데 소득이 상위권인가, 아닌가?

상위권, 맞다. 상위 35%쯤 된다. 놀랄 사람이 많을 게다. 어지간한 대기업 대졸 정규직 초봉이 그보다 조금 높다. 금융권 초봉은 더 세다. 하지만 연말 정산 신고자 1600만 명을 소득 순으로 줄 세웠을 때, 중간에 있는 사람 소득(중위소득)이 2300만 원대다. 중위소득의 150%를 고소득층으로 분류하는 게 보통이다. 그렇다면, 연봉 3450만 원 직장인은 고소득층이다. (<경제개혁이슈> 2015-2호, "2014년 연말정산 파동의 두 가지 불편한 진실 - 낮은 실효세율과 낮은 소득수준" 참조)

온갖 보도에서 "직장인 A씨"라고 소개된 이들은 대부분 그보다 연봉이 높다. 그러니까 체감을 못한다. 규모가 큰 언론사 연봉은 대기업에 버금간다. 기자들이 취재하며 만나는 직장인들 역시 대부분 대기업이나 금융기관 소속이다. 그래서 착시 현상이 생긴다. 상위 소득자들이 아주 흔해 보인다.

'13월의 세금폭탄'이라고?

고소득층 직장인이 전체 임금 노동자를 대표한다. 그래서 생긴 문제가 많다. 지난해 초 연말정산 파동이 대표적이다. 그전에는 연말정산이 '13월의 보너스'였다. 하지만 2013년 세법이 바뀌면서 낸 세금을 돌려받기보다는 오히려 더 내야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13월의 세금폭탄'이라는 비난이 들끓었다. 결국 정부가 나서서 제도를 뜯어고쳤다.

원래 2013년 세법 개정안은 연봉 3450만 원을 증세 기준점으로 잡았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통계상으론 그들이 고소득자라서다. 그러나 여론의 반발 때문에 기준점을 5500만 원으로 올려 잡아서 개정안을 마련했다. 연봉 5500만 원 이상은 상위 16%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렇게 마련한 개정안 역시 지난해 초 반발을 불렀다. 결국 정부는 더 후퇴했다. 연말정산 파동을 거치면서 연봉 7000만 원 이하 계층 가운데 일부도 세금이 줄었다.

당시 황당했던 건 야당이다. 상대적으로 중하위 계층을 대표하는 정당이라면, 고소득층의 세금 증가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세수를 더 확대해서 복지를 강화하자고 주장하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지난해 초, 새정치민주연합은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서민 증세'라서 반대한다는 말이 나왔다.

과연 맞는 말인가. 기획재정부가 지난해 4월 발표한 자료를 보면, 연말 정산 신고자는 1619만 명이다. 연봉 5500만 원 이하가 1361만 명이다. 전체의 약 84%를 차지한다. 그리고 이들은 애초의 연말 정산 제도를 통해서도 세금이 줄어든다. 1인당 평균 3만1000원 가량 줄어든다.

5500만 원부터 7000만 원 사이의 연봉을 받는 이들은 세금이 약간 늘어난다. 이들은 114만 명으로 전체의 7%를 차지한다. 1인당 평균 3000원 수준이다.

7000만 원을 초과하는 연봉을 받는 이들은 144만 명이다. 전체의 9%다. 이들은 세금이 대폭 늘어난다. 1인당 평균 109만 원 늘어난다.


결국 야당의 반발은, 상위 9~16% 구간에 있는 이들 가운데 일부의 세금마저 줄여주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초 세수를 늘리자고 만든 세법 개정안이었는데, 결과적으로 면세자 수가 2013년보다 대폭 늘어났다. 야당도 동조했던 '세금 폭탄' 주장은 근거가 없다.

이게 서민을 위하는 정치인가? 분명한 건, 정부의 재정 적자를 무작정 방치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직접세가 줄어든다면, 간접세를 늘여야 한다. 담뱃세 인상이 대표적이다. 학교 앞에 화상경마장이 들어섰던 것도 세수 확보가 한 배경이었다. 대체로 약자에게 불리하거나 반사회적인 방향이다. 일정한 증세가 없다면, 이런 행태는 계속 이어진다. '서민 증세', '세금 폭탄'이라는 엉뚱한 프레임에 끌려 다녔던 야당은 그래서 무책임했다.

야당 지지 상위 10~20% 구간의 증세 반감

야당은 당시 왜 그랬을까. 이관후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연구원이 잘 분석했다. 그가 보기에 새누리당의 전통적 지지층은 상위 1%와 하위 30%다. 반면, 야당의 핵심 지지층은 소득 상위 10~20% 구간이다. 고학력 전문직, 대기업 정규직이 중심이다.

한편으론 '의료 영리화'를 추진하고, 다른 편으론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박근혜 정부의 모순된 행태는, 지지층의 특성으로 설명할 수 있다. 한편으론 강한 시장주의를 원하는 고소득층의 요구에 부응한다. 다른 한편으론, 국가주의에 향수를 느끼는 하위 집단에 영합한다.

반면 야당 지지층인 상위 10~20% 구간은, 새누리당이 전략적으로 포기하는 집단이다. 박근혜 정부의 이른바 노동 개혁이 겨냥한 집단 역시 이들이다. 보수 진영이 '귀족노조', '철밥통' 프레임을 덧씌웠던 집단이기도 하다.

지난해 연말 정산 파동은 정부 재정 부담을 상위 10~20% 구간도 나눠지라는 요구에서 불거졌다. 야당 지지층인 이들은 자신이 기득권층일 수 있다는 인식이 약하다. 구조조정 위협에 정면으로 노출돼 있는 탓도 있다. 증세액에 비해 반발이 컸던 건 그래서다. 야당은 핵심 지지층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다. 결국 상위 10~20% 구간 역시 세금이 일부 줄었다. 대신 세법 개정안은 누더기가 됐다. 지난해 초 연말 정산 파동은 이런 틀로 바라봐야 한다는 게 이 연구원의 분석이다.

'재분배의 역설', 감세 포로가 된 중산층

'재분배의 역설'이라는 개념이 있다. 중산층을 복지 수혜자로 만들어야 약자를 위한 사회 안전망 역시 강화된다는 뜻이다. 보편적 복지 지지 논리와도 통하는 개념이다. 약자만 겨냥한 복지(선별적 복지)는 중산층의 무관심으로 이어져서, 결국 복지 축소를 낳는다는 뜻이다. 약자만 보호한다는 정책이 오히려 약자에게 해롭다는 역설이다.

이런 식으로 살피면, 야당 지지층인 상위 10~20% 구간의 증세에 대한 반감은 위험하다. 중산층을 복지 무관심층으로 만들어서 복지 축소를 낳을 수 있다.

상위 10~20% 구간은 새누리당이 전략적으로 포기한 탓에, 노동개혁의 주요 타깃이 됐다. 고용은 불안해 지는데 사회 안전망까지 함께 약화될 판국이다. 중산층이 감세의 포로가 돼 있는 탓이다. 이런 구조를 뒤집어야 희망이 있다. 중산층을 복지 증세의 선봉에 세워야 한다.

세금 석차를 공개하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오로지 복지에만 쓰는 세금(사회복지목적세)을 도입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운영위원장이 이런 입장이다. 증세에 대한 반감은,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깊어진다. 목적이 뚜렷한 세금이라면, 반감도 줄어든다는 설명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세금 관련 정보가 더 투명하게 개방돼야 한다. 고등학생 시험 석차를 공개하는 건 웃기는 짓이다. 하지만 누가 돈을 많이 벌었는지, 그래서 세금을 얼마나 냈는지를 보다 자세히 공개하는 건 필요한 일이다. 아울러 내가 낸 세금의 등수가 대략 어느 정도인지도 알아야 한다. 소득이 많은 편인데, 적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세금을 적게 낸 편인데, 반대로 오해하는 경우도 있다. 소득과 세금의 석차를 안다면, 풀릴 문제다. 실제로 복지국가 핀란드에선 개인의 소득과 세금 내역이 투명하게 공개된다. 김상조 경제대혁연대 소장(한성대학교 교수)은 지난해 연말 정산 파동 직후 이런 글을 썼다.

"세금 폭탄론의 함정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세금에 대한 보다 많은 정보를 공개해야 한다. 그래서 연말정산 후에 받게 되는 '근로소득 원천징수 영수증' 양식을 개선할 것을 제안한다. 나의 총급여가 얼마고 세금은 얼마를 냈고 실효세율은 얼마인지를, 과거 3년치 자료와 함께, 한눈에 알 수 있게 하자는 것이다.

나아가 전체 근로자의 연말정산 작업이 완료된 이후에는 나는 어느 소득계층에 속하고, 각 계층의 실효세율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히 알려주도록 하자. 납세는 의무다. 동시에 권리 주장의 근거다. 나의 의무 이행 정도를 정확히 알아야 합리적 권리 주장을 할 수 있다."

다시, 연말 정산새로운 '세금 정치' 기대한다


다시, 연말 정산의 계절이 됐다. 그리고 야당은 분열과 경쟁 국면이다. 그 덕분에 새 인재 영입이 활발해졌다. 마침, 더불어민주당에 세금 및 재정에 해박한 이들이 늘었다. '세금 정치'에 대한 고민이 깊은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국세청장 출신인 이용섭 전 의원, 기획재정부 관료 출신 재정 전문가 김정우 세종대학교 교수 등이다.

이번 연말 정산 이후에는 새로운 세금 정치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야당에 영입된 새 인재들이 새 흐름을 만들기를 기대한다.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왼쪽)과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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