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쇠귀(牛耳) 신영복 선생님 영전에

[추도사] 꽃처럼, 바람처럼 가버린 선생께

찬바람 몰아치는 이 겨울의 한 가운데, 갑자기 불어온 한 줄기 삭풍이 우리의 귓전을 세차게 때리고 가슴을 얼어붙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의 큰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고, 이 사회의 모든 힘든 영혼들, 춥고 외로워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따듯하게 달래주던 신영복 선생님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2년 전 무렵 선생님이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에 빠졌으나 곧 외국에서 좋은 약을 구해 치료를 받으신다는 희망섞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병마는 결국 신영복 선생님을 우리들 옆에 그냥 두지 않고 매정하게 저승으로 데려가고 말았습니다.

선생님은 "감옥에서 20년을 보냈기 때문에 세상 나이에서는 20년을 빼야한다"고 늘 농담처럼 말씀하셨죠. 60대 초까지도 거의 20여년 아래 동료 교수들과 운동장에서 축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 건강하시니 90세까지는 너끈히 사시겠구나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보다 20년 더 사셔야 그 잃어버린 세월에 대한 약간의 보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길어야 하루 2시간 동안, 그 것도 한 장의 신문지 정도의 햇빛만 누릴 수 있었던 그 20년의 감옥 생활이 이런 희귀병의 원인이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통일혁명당, 전향공작, 사상범, 사형수에서 무기수로 감형, 그리고 20년의 유폐는 분단 냉전 시대를 숨죽이고 살아온 한국의 보통사람들의 일상과는 저 먼 곳에 있는 참으로 무거운 과거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체제비판적인 청년학생 조직의 리더였던 선생님을 '북괴'의 지령을 받은 통혁당 핵심으로 조직도 내에 그려 넣었고, 선생님은 20세기 다른 어떤 독재국가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혹독하고 값비싼 징역을 살았습니다. 그런 무서운 죄목으로 사형수가 된 순간 이웃과 세상은 선생님을 기억에서 지우고 선생님을 알고 있다는 사실조차 완강히 부인했으며, 88년 특사로 풀려난 이후에도 과거의 인연을 맺고 있었던 사람들 대부분은 선생님을 만나기를 기피했습니다.

그러나 <평화신문>이 선생님이 감옥에서 고뇌의 극한에서 한자 한자 박아내듯이 써 내려간 편지들을 소개해 주었고, 성공회대의 이재정 총장님이 주변의 우려를 무릅쓰고 선생님을 교수로 초빙하게 되어, 선생님은 20년의 고통에 대해 약간의 위로와 보답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검열을 거쳐야했던 엽서, 한 달 동안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다듬고 고치기를 수없이 반복해서 적어 내려간 바로 그 엽서 한 장에 빽빽이 담긴 선생님의 보석처럼 빛나는 언어가 세상 사람들을 깨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50의 중년이 되어서야 선생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고, 옥중 일기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명 구절들은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감옥에서 보낸 3,40대의 그 아까운 시간들을 되돌려 받을 수는 없었지만, 서화작가로서, 문필가로서 그리고 사상가로서 토해낸 나지막하지만 강한 목소리는 고단한 대중들에게 큰 위로와 힘을 주었습니다.

주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경제학도가 '대역죄인'으로 몰려 사형 판결을 받았다가, 또 앞을 기약할 수 없는 무기수가 되었을 때, 선생님의 느낀 절망감이 어땠을까요? 그리고 10년이 훌쩍 지나고 또 다른 10년을 거의 채울 나이가 되어, 20대 말의 청춘이 40대 말의 중년으로 접어들었을 때 가졌을 참담함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그러나 선생님은 이 혹독한 시절을 거치면서 개념과 이론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사회과학자에서 사람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진실을 이끌어내는 사상가로 거듭났습니다. 선생님께 감옥은 '머리보다는 가슴을', '가슴보다는 발로 여행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 최고의 학교였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출옥 후에도 청춘 20년을 앗아간 독재정권에 대해 원망과 분노를 드러낸 적이 없습니다. 선생님은 분노와 적의 대신에 촌철살인의 농담과 비유로 세상을 비판했고, 유머로 이 비뚤어진 세상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조선시대 선비같은 정갈함과 품격을 보이시면서도, 엄격함을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법이 없었고, 언제나 가슴을 꽝 때리는 탁월한 비유와 적확한 언어, 깊은 성찰 없이는 도저히 만들어낼 수 없는 수많은 경구들을 남겼습니다. 선생님이 보여준 부드러움은 바로 본인이 겪었을 그 아픔을 가장 아름답게 승화시킨 것이었습니다.

"평시였다면 재상감이다". 같은 사건으로 징역을 살았던 가까운 동료가 오래 전에 선생님을 이렇게 평가하더군요. 그렇습니다. 선생님의 청춘기, 그리고 후배, 제자 세대인 우리의 청춘기 였던 7,80년대 한국은 사실상의 전쟁 국가였습니다. 북한을 쳐부숴서 부자나라로 만들자는 반공주의와 물질지상주의는 맑은 영혼을 가진 자유인들의 꿈을 여지없기 꺾었습니다. 그러니 이런 뒤집어진 세상에서는 감옥 가거나 정치적 수난을 당하는 사람들 중에 참 인간을 더 많이 차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처럼 식견과 인격을 갖춘 젊은이들을 고문, 투옥하고 그들의 정신을 파괴한 그런 정권과 비정한 권력이 오늘의 '헬 조선'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감옥보다 더 감옥같은 이 사회에 대해 내내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불모의 냉전 분단체제의 희생자가 되어 나라와 사회를 위해 자신의 능력을 펼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선생님의 인생이 실패한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의 강의와 서화에 감명과 위로를 받고 마음속으로 선생님을 흠모해온 수백만의 동시대의 한국인들이 지금 선생님의 죽음을 애통해 하고 조문을 하려고 줄을 서 있기 때문입니다. "필자는 죽어도 독자는 끊임없이 탄생한다"는 선생님의 유언처럼, 수십, 수백만의 사람이 선생님의 말과 서화를 통해 자신의 인생과 가치관을 바꾸었고, '더불어 숲'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들고, '존재보다는 관계를' 중시하는 삶을 살려하기 때문입니다.

이 추운 겨울, 선생님은 '꽃처럼 바람처럼' 훌쩍 가버렸습니다. 죽음을 삶의 완성으로 받아들이고 미련없이 스스로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떠난 이 땅에서 장차 우리는 문사철(文史哲)의 '언어'만이 아닌 시서화(詩書畵)의 '아름다움'으로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식인을 어디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요? 잎사귀가 아닌 뼈대를 직시할 줄 알고, '석과불식'(碩果不食), 즉 씨 과일은 남겨두어 내년의 풍성한 과일을 생산하는 기반으로 삼는다는 정신으로 미래 시대를 키워낼 수 있는 스승을 다시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요? 강철같이 단단하면서도 물처럼 부드럽고, 봄날의 햇살처럼 따스한 어른을 어디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


언제나 제 연구실 앞을 지나면서 "어, 김 선생 나왔네?"라고 하면서 지나가던 모습을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된 사실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쓰러져 눕기 직전인 지난 10월 중순에 저의 책 <대한민국은 왜>를 읽고 보내주신 추천사는 선생님이 저에게 준 마지막 선물이자, 선생님이 세상에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징역살이 20년의 세월을 생각하면 70대 중반의 타계가 너무 아쉽습니다. 그래도 출옥 후 남겨놓은 수많은 정제된 말들과 깔끔한 서화의 세례를 마음껏 받고, 또 연구실을 마주한 직장 동료, 후배로서 가까이 지내며 보고 배울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합니다. 노동자 교육의 필요성에 공감하여 성공회대 노동 아카데미를 함께 시작한 일, 그리고 같은 사회과학부의 교수로 보낼 수 있었던 20여년의 시간이 저에는 더 없는 행운이었고 큰 영광이었습니다.


남겨놓은 말들을 새기면서 남은 우리들이 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잡겠습니다. 마지막 강의에서 강조하신 것처럼 '담론을 만들고 주체를 길러내는' 일에 매진하겠습니다.

신영복 선생님, 고문 없고 사상탄압 없는 저 세상에서 편히 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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