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미국은 북한을 다루는데 실패했다!"

미국이 보는 북한 : 불신의 단초들과 실패의 역사

아래 글은 '동아시아 재단'에서 발표한 '동아시아 재단 정책논쟁' 제 42호에 실린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국대사의 기고문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1989년부터 1993년까지 주한 미국대사를 지내면서 남-북 간, 그리고 미국-북한 간 관계 발전의 기반을 다지는 데 노력을 기울인 대표적인 인사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북한을 "미국 정보기관 역사상 가장 오래도록 실패를 맛보고 있는 사례"로 꼽고 있습니다. 미국 중앙정보국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오랜 기간 북한을 연구해왔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현 정부도 마찬가지입니다. 북한의 붕괴를 예상하고 '전략적 인내'를 고수하고 있는데, 이것이 북한을 대하는데 적절한 방식이 아니라는 지적입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실제 북한을 효과적으로 대하기 위해서는 북한이 전체주의적 통치체제에서 벗어나 진화하는 과정을 동북아 국제 정세발전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 이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면서 "미국이 핵 문제에만 매달려 북한과 대립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진화는 더딜 것이라고 보았다"고 소개합니다.

그레그 전 대사는 "키신저 박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면서 "미국이 적대국들과 합의점을 찾기 위해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키신저의 주장을 다시 한 번 강조했습니다. 다음은 그레그 전 대사의 기고문 전문입니다.

▲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 대사. ⓒ연합뉴스

냉전 당시의 미-북 관계

이 기고를 준비하면서 필자는 남한 및 북한과 관련한 필자의 다양한 경험들을 회고해 보았다. 필자가 한반도와 맺은 인연은 한국전쟁이 진행 중이던 1952년에 시작된다. 당시 나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서 실행한 대북 작전의 일환으로 남한의 청년들을 훈련시켰다. 조악하고 허술했던 계획으로 인해 작전에서 살아남은 이는 별로 없었다.

1968년 1월, 나는 CIA 요원으로 일본의 도쿄(東京)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동해에서 정보수집 중이던 미국 선박 푸에블로호가 납북되면서 이에 대한 대북 보복 대책을 마련하는 태스크 포스(T/F)에 속해 있었다. 태스크 포스를 통해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게 된다면 선원들이 살해당하고 무력 충돌이 재개될 것을 우려하여 결국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선원들은 납북된 지 11개월 후 송환되었고, 푸에블로호는 평양의 대동강변에서 관광 명소가 되어있다.

5년 후인 1973년, 나는 CIA 서울지부장으로 파견되었다. 필자에게 주어진 임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북 인적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미국이 갖고 있는 대북 인적 정보 자원은 전무하였다. 당시 북한은 명백한 적성국이었다. 비무장지대 지하로 남침용 땅굴을 파기도 하였고 1974년엔 당시 대통령이던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하기 위한 간첩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 간첩은 일본을 통해 한국에 입국, 박정희 대통령 저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대신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를 살해하게 된다.

그런 북한에 대한 인적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고, 결국 1975년 워싱턴으로 돌아갔을 때에는 정보 수집 노력을 입증할 자료가 사실상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당시 야당인사였던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1973년 10월 도쿄의 한 호텔에서 한국 중앙정보부에 의하여 납치되었을 때 CIA가 김 전 대통령의 신변을 보호하는 데 중심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1989년 9월, 나는 미국 대사의 자격으로 서울에 돌아왔다.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를 감지하고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 비록 미국 정부가 직접 인정하진 않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남한에 전술 핵무기를 배치하여 두고 있었던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나는 미국이 핵 이슈에 관하여 북한을 압박한다면 북한이 즉각 미국이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한 사실을 문제 삼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내가 한국에 부임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 남한에서의 핵무기를 철수하도록 워싱턴에 제안하였다.

일 년 뒤 이에 대한 승인이 떨어졌고, 1991년 12월 18일 노태우 대통령은 남한 내에는 핵무기가 없음을 선언하였다. 같은 달 31일 남북은 '남북기본합의서'에 서명하면서, 한반도 비핵화를 촉구하면서 국제원자력기구의 시찰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합의가 있었던 1991년 초에, 한미 양국 국방부는 매년 진행하던 '팀스피릿'훈련을 1992년에 실시하지 말자는 주한미군사령관과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 훈련은 1950년 북한의 기습 남침에 대응하여 미군이 남한을 지원하기 위해 급파된 것을 재현하는 연례 훈련이었다. 북한은 이 훈련을 굉장히 싫어했고 이 훈련이 진행될 때마다 항상 최고 경계태세를 유지하였다.

부시 행정부 하에서 무너진 화해무드

이 두 번의 결정이 1992년 여덟 차례에 이르는 남북 총리급 회담으로 이어졌다. 이런 분위기는 남북간 전반적 화해에 대한 기대를 그 어느 때보다도 높여줬다. 불행히도, 미국 국방부 장관 딕 체니(Dick Cheney) 하에서 팀스피릿 훈련이 1993년 3월부터 재개되었다. 미 국무부나 필자 모두 결정 과정에 관여하지 못했다. 1992년에 평양과 서울 사이에 일궈 놓은 것들을 뒤엎어버리는 이러한 결정에 필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1993년 3월, 북한은 핵 비확산협약에서 탈퇴하면서 핵무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일 년 후인 1994년, 나는 뉴욕시에 위치한 코리아 소사이어티(Korea Society)의 회장을 맡고 있었다. 1994년 5월 19일 '코리아에 당근을 주자'(Offer Korea a Carrot)는 제목으로 필자의 첫 기고문이 <뉴욕타임스> 지면에 실렸다. 동 기고문을 통해 나는 "북한은 동독이 서독에게 흡수되었던 것처럼 남한에게 흡수되길 바라지 않으며, 남한은 북한이 경제적으로 붕괴하여 남한이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라 주장하였다. 21년 전의 이 문장이 지금도 여전히 적용된다는 사실은 계속된 화해를 위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북한 문제는 냉전의 유산 속에 파묻혀 해결에 진전이 없었다는 슬픈 현실을 보여준다.

미-북 관계의 정점

1997년 12월,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는 필자를 대통령 취임식에 초대하고 비공개 청와대 접견에서 "북한에 코리아 소사이어티의 깃발을 심어주기"를 부탁하였다. 필자는 즉각 이 일에 착수하였다. 그중에서도 나는 1999년 9월 뉴욕의 미국 외교협회의 행사 석상에서 북한 외무상을 청중들 앞에 소개하였다. 또한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차수를 위해 앨 고어(Al Gore) 당시 미국 부통령이 주최한 오찬에 매들린 올브라이트(Madelaine Albright)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의 초대로 필자도 운 좋게 참여할 수 있었다. 나는 이 행사가 미-북 관계의 최정점이었다고 본다. 북한이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을 평양에 초대하기도 하였으나 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서 이 방문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 후인 2002년 초, 새로 취임한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그 유명한 "악의 축" 연설이 있었고 이는 이라크 침공이라는 미국의 오판을 야기했다. 이로 인해 이란과 미국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고 북한을 혼란에 빠뜨리고 격분케 했다.

▲ 지난 6일 북한은 관영매체인 조선중앙TV를 통해 정부성명을 발표하고, 수소탄 시험에 성공했다고 보도했다. 사진은 성명을 발표하고 있는 리춘희 아나운서 ⓒAP=연합뉴스

오바마 정부의 유감스러운 전략적 인내

나는 2002년 4월부터 지금까지 개인 자격으로 평양에 여섯 번 방문하였으나 내 방북이나 보고서가 미국 정부의 입장에 별 영향을 끼치지 못하였다. 2002년 11월, 대화를 시작하자는 북한의 친서를 들고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도 "나쁜 행동을 보상하는 것"이라며 "대화하지 않을 것"이란 답변을 받았다. 유감스럽고 놀랍게도, 오바마 대통령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태도를 보였고 이 태도가 바로 '전략적 인내'라고 불리게 됐다.

2014년 4월 25일, <뉴욕타임스>는 데이빗 생어의 장문의 사설을 실었다. 이 사설은 미국 정부가 '전략적 인내'를 통해 김정은을 무시하고 과소평가한 결과를 다뤘다. 그는 익명의 정부 관계자를 인용하며 "북한에 대한 최선의 전략은 이란과 협상을 한 뒤 그것을 협상타결 후 세상의 모델로서 제시하는 것"이라고 전했다.

그로부터 일년 후 이란과 미국 사이에 핵 협상이 타결됐지만 북한과의 협상은 진전이 없다. 2015년 11월 13일 북한에 대한 추가 제재를 발표하면서 재무부 차관 애덤 수빈(Adam Szubin)은 "북한이 국제법을 지속적으로 위반하고 탄도미사일과 대량 살상무기를 개발하려고 하는 것은 미국과 세계의 평화와 안보에 심각한 위협이 된다"고 덧붙였다. (2015년 11월 14일자 <뉴욕타임스>)

수년 전 헨리 키신저 박사는 내게 북한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고 언급했다. 하나는 북한이 곧 핵 위협이라는 점만 강조하며 비핵화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전략은 반드시 실패할 거라고 보았다. 북한이 핵무기를 포기하는 유일한 상황은 그들이 미국을 믿을 때일 터인데, 북한과 미국이 대화를 하지 않는 한 북한이 미국을 믿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키신저는 북한을 효과적으로 대하는 방법은 북한이 전체주의적 통치체제에서 벗어나 진화하는 과정을 동북아 국제 정세발전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고 이를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핵 문제에만 매달려 북한과 대립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러한 진화는 더딜 것이라고 보았다.

나는 이런 키신저 박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키신저 박사와 함께 북한 사람들을 여러 번 만났었다. 2015년 11월 15일 나는 키신저 박사의 강연 전후로 두 번의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미국이 적대국들과 합의점을 찾기 위하여 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을 다시금 강조하였다. 그는 우크라이나 재건 노력을 지속하면서도 동시에 ISIS를 격퇴하기 위하여 러시아와 협조하는 것에 매우 긍정적이었다.

김정은이 선택한 미국에 대한 북한식 전략적 인내

이렇듯 암울한 기고문을 마무리 짓기 전에 한 가지 긍정적인 부분을 언급하고자 한다. 바로 김정은이 보여주고 있는 경제 회복을 위한 노력과 핵 위협 및 핵발전에 대한 언급을 자제한다는 것이다. 외교적으로 김정은은 중국과의 관계를 복원시키려 하고 있고,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에 있어 허를 찌르고 있으며, 러시아와는 실리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노틸러스 연구소의 피터 헤이즈가 말했듯 김정은은 미국을 상대로 북한 식의 '전략적 인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미국이 이를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아직도 북한 정권의 붕괴 예측이나 북한 내 정권 교체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여전히 들린다. 북한을 탈출한 인사들이 출간한 북한 정권에 대한 비판적인 책들로 인해 서구 사회는 북한의 수용소에서 일어나고 있는 참혹한 인권 침해와 열악한 환경들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북한과의 대화만이 미래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암담한 상황이다. 유감스럽게도 현재 미국에는 대북 포용 전략에 대한 정치적인 지지는 전무한 상태이다.

바라건대, 2016년 북한 노동당의 제7차 당 대회에서 김정은이 만족할만한 핵 억지력을 갖추었다고 선언하면서, 이제는 경제 발전이 최우선 과제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했으면 한다. 이런 비위협적 자세가 남한의 온건파로 하여금 북한에 손을 내밀 수 있는 자신감과 열망을 갖게 해 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만이 남북 간 화해라는 큰 희망이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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