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보 위기의 만성화와 경제 불황의 장기화 그리고 불평등의 심화. 아마도 대한민국의 미래를 짓누를 세 개의 키워드가 아닐까 한다. 그리고 이런 한국 땅에서 '헬조선'은 한때 유행하는 말이 아니라 시대를 상징하는 표현으로 고착화될 것이다.
먼저 안보 문제부터 보자. 한반도는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폭력과 분쟁이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땅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벌어진 사건들만 열거해도 이러한 진단이 지나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심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지뢰를 밟고 다리가 잘린 남한 병사도 있고, 남한이나 미군이 매설한 지뢰를 밟고 다리를 잃는 사람도 있다. 서해에서는 잊을 만하면 남북한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지고, 남한 해군이 중국 민간 어선을 향해 경고 사격을 해서 한-중 간에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했다.
휴전선 일대에서도 벌어진 포격전이 누구의 소행인지 아리송한 경우도 있고, 이로 인해 한국 전쟁 이후 최악의 전쟁 위기를 겪기도 했다. 남한에서 발생한 해킹 사건은 '북한의 소행'이라는 결론으로 쉽게 이어지곤 하고, 재작년에는 무인기 소동까지 벌어졌다. 대북 삐라가 살포될 때마다 접경지의 주민들이 공포에 떠는 일은 일상사가 되고 말았다.
미국은 툭하면 전략 폭격기를 동원해 모의 핵 공격 훈련을 벌이고, 이럴 때마다 북한은 미국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한다. 급기야 오늘날 한반도는 미국 핵무기와 북한 핵무기가 불안한 공포의 균형을 이루는 '핵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공포의 균형에서 우위에 서고자 미국은 영화 <스타워즈>를 방불케 하는 첨단 무기를 한국 안팎에 배치하고, 북한의 김정은은 '절대 무기'로 불리는 수소 폭탄을 운운한다.
폭등하는 한국의 안보 비용
이 사이에 한국의 안보 비용도 폭등했다. 한국이 세계 1위의 무기 구매 국가로 등극했다는 뉴스가 나올 정도다. 남한의 국방비가 북한의 GDP를 초월한 지도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보가 좋아졌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국방비를 크게 늘리고 첨단 무기도 경쟁적으로 도입하는데 왜 안보는 나빠지고 있는 것인가? 이 모순을 직시하지 않는 한, 한국 안보의 미래는 없다.
암울한 경제와 심해지는 불평등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고도성장은 이미 아련한 추억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고용도 별로 없고, 고용의 질도 나빠지면서 불평등을 심화시킨 중간 정도의 성장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성장의 동력마저 급격히 저하되고 있다. 소득 불평등을 완화해 내수 경제를 진작시켜야 한다는 요구는 철저하게 외면당하면서 수출마저 마이너스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문제는 켜켜이 쌓이고 있는데, 해결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러한 문제를 바로잡으라고 있는 정치가 오히려 절망의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박근혜 정부는 안보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이용'하는데 관심이 더 많다. 경제 문제도 역사 교과서와 야당 탓으로 돌린다. 정부 여당의 독주를 견제하고 대안 역량을 선보여야 할 야당은 분열과 무능으로 절망감만 더해준다.
그렇다면, 절망이 쌓여가고 있는 대한민국에 희망은 없는 것일까? 기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최고의 안보 전략은 한반도 평화 체제 구축과 비핵화 실현을 병행·융합하는 데에 있다. 최고의 경제 전략 역시 남북 경제 협력을 활성화하면서 이를 환동해 및 환황해 경제권, 그리고 유라시아 대륙과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데에 있다. 이들 두 가지 전략을 관통하는 게 바로 대북 정책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박근혜 정부는 '북한은 언젠가 망하겠지'라는 막연한 바람에 갇혀 있다.
박 대통령, 부시만큼이라도 해주길
이제 박 대통령의 임기도 2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바로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을 평가받고 있는 조지 W. 부시이다. 그의 재임 8년 가운데 6년 동안 한반도 정세는 그야말로 암흑기였다. 하지만 그마저도 임기 2년을 남겨두고 변신했다. 네오콘이 주입한 이념의 안경을 벗고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상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변신은 취임 1년 만에 북한을 '악의 축'으로 지정했다가 퇴임 1년을 앞두고는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한 것에서 확연히 드러났다.
박근혜 정부에게도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니다. 36년 만에 당 대회를 앞둔 북한은 '경제 강국 건설'을 최대 목표로 내세우면서 남북 관계 개선 의지를 피력하고 있다. 미국은 한국의 입장을 존중하겠다는 태도이다. 특히 쿠바, 이란, 미얀마 등 적대국을 상대로 큰 진전을 이뤄낸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한국이 움직인다면 이에 호응하고 나설 가능성이 있다. 국내 보수 진영 일각에서도 '한국 경제가 살 길은 북한밖에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이제 박 대통령의 결심만 남은 셈이다.
(위 글은 <내일신문> 2015년 12월 29일자에 기고한 칼럼을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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