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구정 가슴녀'의 추억 vs. '댓글 부대'의 위협

[프레시안 books] <댓글 부대>

2012년 4월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4월 30일 오전 12시 30분, 포털 사이트 '네이버'의 실시간 검색 순위 1위는 '압구정 가슴녀'였다. 이 '압구정 가슴녀'는 29일부터 30일까지 하루 종일 실시간 검색 순위 상위를 차지했다. 당연히 뉴스도 쏟아졌다. 당시 포털 사이트에서 '압구정 가슴녀'로 뉴스를 검색해 보면, 다섯 쪽이 넘는 기사가 줄줄이 나왔다.

"네이버 관계자에 '압구정 가슴녀' 정체 물었더니…"(<조선일보>) "'압구정 가슴녀' 클릭했더니 깜짝…"(<경향신문>) "검색어 오르내린 '압구정 가슴녀' 알고 보니"(<중앙일보>)" "실시간 검색어 '압구정 가슴녀'의 진실은?"(<동아일보>) "검색 1위 '압구정 가슴女' 네티즌 분노…왜?"(<매일경제>)

기사의 내용은 점입가경이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느니, "압구정에서 새벽 시간에 가슴을 노출하고 다니는 여성이 있다는 루머 때문"이라느니. 심지어 <국민일보>는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누리꾼을 상대로 벌이는 일종의 테스트"라는 해석까지 내놓았다. 그렇다면, '압구정 가슴녀'의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당시에 해명한 대로 '압구정 가슴녀'는 내가 4월 28일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매주 금요일 저녁에 발행했던 '프레시안 books'의 한 서평 기사의 제목으로 '압구정 가슴녀'를 내세웠던 것인데, 그것이 주말 동안 포털 사이트의 중요한 검색어가 되고, 더 나아가 수십 명의 기자가 기사로 쓸 정도의 기삿거리가 된 것이다. (☞관련 기사 : '압구정 가슴녀', 진짜 진실은 이렇다)

2012년 4월의 마지막 주말 내내 포털 사이트를 달궜던 이 어처구니없는 해프닝은 지금 한국 사회에서 공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생생히 보여주었다. 나는 당시 미디어 비평가 닐 포스트먼의 다음과 같은 지적도 함께 소개했었다. '조지 오웰의 <1984>가 아니라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옳았다!'

(<1984>의) 조지 오웰은 우리가 ('빅 브라더'라고 불리는) 외부의 압제에 지배당할 것을 경고했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의 올더스 헉슬리의 미래상에선, 인간에게서 자율성과 분별력 그리고 역사를 박탈하기 위한 빅 브라더는 필요 없다. 사람들은 스스로 압제를 환영하고, 자신들의 사고력을 무력화하는 테크놀로지를 떠받들 것이라고 내다봤다.

오웰은 누군가 서적을 금지시킬까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굳이 서적을 금지할 만한 이유가 없어질까 두려워했다. 오웰은 정보 통제 상황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지나친 정보 과잉으로 인해 우리가 수동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로 전락할까봐 두려워했다. 오웰은 진실이 은폐될 것을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비현실적 상황에 진실이 압도당할 것을 두려워했다.

(…) <1984>에서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해 통제한다. <멋진 신세계>에서는 즐길 거리를 쏟아 부어 사람들을 통제한다. 한마디로, 오웰은 우리가 증오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헉슬리는 우리가 좋아서 집착하는 것이 우리를 파멸시킬까봐 두려워했다.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죽도록 즐기기>(홍윤선 옮김, 굿인포메이션 펴냄), 9~11쪽)

3인조 '댓글 부대'의 활약상

▲ <댓글 부대>(장강명 지음, 은행나무 펴냄). ⓒ은행나무
장강명의 <댓글 부대>(은행나무 펴냄)를 읽으면서 새삼 3년도 넘은 '압구정 가슴녀' 해프닝을 떠올렸다. 저자의 말대로 "빠르고 독하게" 읽히는 이 소설은 민간 댓글 부대 '팀-알렙'의 활약상(?)을 그린다. 국가정보원의 '특수' 요원이 아닌 돈도 배경도 없는 '지질한' 20대 남성 3인조로 구성된 팀-알렙은 정체불명 의뢰인의 과제를 마치 게임 레벨 해결하듯이 완수한다.

○○전자 백혈병 사망의 진실을 그린 영화 <가장 슬픈 약속>의 흥행 막기, 진보적인 20~30대 여초 사이트 망가트리기, 2008년 촛불 집회 때 유모차 부대를 동원했던 진보 성향 아줌마 사이트 망가트리기, 대중이 열광하는 진보 지식인 지질이로 만들기, 가짜 뉴스("엄마가 진보적일수록 아이의 행복 수준이 낮다") 퍼트리기 등.

팀-알렙 3인조가 이런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이야말로 이 소설의 백미인데, 장강명은 현실의 사례에 상상력을 덧붙여 정말로 그럴 듯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스포일러가 되는 걸 감수하고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팀-알렙은 <가장 슬픈 약속>의 흥행을 막고자 영화사로부터 임금을 체불 받은 가공의 노동자를 등장시켜 사회 연결망 서비스(SNS)에 유포한다.

"이 영화가 ○○전자뿐 아니라 대한민국 모든 사업장의 노동 현실을 바꾸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감독님이 말씀하셨더군요. 저도 노동자니까, 한 번 바라봅니다. 4대 보험 같은 건 꿈도 꾸지 않고, 야근 수당은 필요 없습니다. 제 밀린 임금 340만 원 주세요. 당장 밀린 고시원비와 핸드폰 요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습니다." (35쪽)

이 글은 "올리자마자 그야말로 마른 들판에 불이 퍼지듯 온갖 게시판으로" 확산되었다. 그리고 장강명은 슬쩍 이렇게 꼬집는다.

"사람들도 알고 있었던 거죠. ○○전자에서 노동 탄압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모르지만, 영화판의 노동 조건에 비하면 천국 같은 직장일 거라는 사실을. 노동자 권익이니 남녀평등이니 하는 말들 입에 달고 사는 사람들 중에 자기 단체 직원들 권익 챙겨주는 사람은 많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즈음에 사회적으로 민감한 이슈를 건드리는 영화가 너무 많이 나왔잖아요. <도가니> 이후로. 그 감독들이나 제작사들이 그런 이슈를 실은 돈벌이로 활용하고 있다는 걸 사람들도 눈치 채고 불편해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그 임금 체불 건이 딱 터진 거죠." (37쪽)

결국 <가장 슬픈 약속>은 의뢰인의 의도대로 망한다. 현실에도 있을 법한 진보 성향의 인터넷 영화 평론가는 냉큼 "한 노동자의 권익을 침해해서 다른 노동자의 권익을 찾는 건 모순"이라며 영화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심지어 영화사는 "처음에 글을 올렸던 스태프를 찾아서 오해를 잘 풀었다"는 글까지 올린다. 그런 스태프는 '압구정 가슴녀'처럼 애초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는데….

팀-알렙 3인조는 이렇게 과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하고서 의뢰인으로부터 '돈' 또 '여성'을 보상으로 얻는다. (한 독자(mins1028)가 인터넷 서점의 서평에서 지적했듯이 여성을 '응징'한 대가로 이들이 20~30대 여성을 '보상'으로 얻는 설정은 상당히 흥미롭다!) 그리고 또 의뢰인의 미션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나은 것 같아?"

<댓글 부대>는 자율성, 분별력, 사고력이 정지된 대중을 권력이 어떻게 조종할 수 있는지 생생히 보여준다. 조지 오웰의 <1984>에서 그리는 촘촘히 짜인 감시 장치 따위는 필요 없다. 그저 여론을 슬쩍 마사지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나머지는 인터넷 공간의 수많은 '호모 피스케스(Pisces, 물고기)'가 알아서 해결해 줄 테니까.

다시 말하지만, 오웰이 아니라 헉슬리가 옳았다.

정체불명의 의뢰인 '합포회'의 정체는 끝까지 모호하다. 국정원 같은 권력 기관, 전국경제인연합 같은 경제 단체, 화수분처럼 돈을 펑펑 쓸 수 있는 '회장님'의 존재로 대충 짐작만 할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합포회 같은 조직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여의도, 방배동, 역삼동 등에서 이렇게 찧고 까부는 사람이 많다는 건 알고 있다.

"다음 대통령은 누가 나은 것 같아? 아무개는 영 시원치가 않은데…."

<댓글 부대>를 읽는 뒷맛이 쓰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반갑다. 소설을 즐겨 읽는 독자로서 한동안 또래(1970년대생) 한국 소설가의 소설 가운데 읽을 만한 게 없다고 투덜댔었다. 이제 그런 투덜거림을 끝내련다. 이 소설을 '제주 4.3 평화 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한 심사위원의 말대로 지적이고, 치밀하고, 재미있다. 이제부터 장강명의 팬을 자처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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