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와 국회, 친박과 비박 간 충돌을 만든 여러 의제 중 하나가 바로 '개헌'이다. 비박계 대표 주자이자 새누리당 대표인 김무성 대표는 지난해 10월 중국 상하이에서 "이원집정부제도 검토해봐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개헌은 블랙홀"이라고 반격하며 관련 논의를 일축했다. 누구도 공격할 수 없는 '민생 제일'이란 대전제 위에 '개헌 논의는 경제 살리기 동력을 꺼트린다'는 소전제를 얹는 순간이었다. 단순하고도 명료한 삼단논법에 따라 '개헌 논의 불가'가 새누리당 내, 특히 친박계 안에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겉모습만 봐서는 지금이라고 다를 것도 없다. 12일 친박 핵심인 새누리당 홍문종 의원이 '금기'시 되어 왔던 개헌을 전격 거론했고, 청와대는 곧바로 묘한 '불쾌감'을 표현했다. 정연국 청와대 대변인은 홍 의원의 개헌 거론 이튿날인 13일 "노동개혁 5대 입법, 경제활성화 4개 법안,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의 조속한 처리와 민생 경제에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친박연대 출신의 조원진 원내수석부대표는 "(홍 의원의) 개인 의견일 뿐 다수가 공감하는 의견도 아니고 논의 자체도 없다"며 선을 그었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상하이 개헌 폭풍' 당시 설계된 삼단논법에 충실한 모습이다.
그러나 정치권은 홍 의원의 발언에서 어떤 '복선'을 읽어내는 분위기다. 그도 그럴 것이 홍 의원은 여러 개헌 방향 중에서도 '이원집정부제'를 콕 집어 얘기했다. 그는 "5년 단임제 대통령 제도는 이미 죽은 제도가 된 것 아니냐"고 말했고 "이원집정부제, 외치를 하는 대통령과 내치를 하는 총리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정책의 일관성도 있고 국민의 다양한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그런 얘기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이 같은 개헌 논의가 "탄력을 받는 것도 사실"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친박 핵심 의원이 터부시된 개헌을, 그것도 박 대통령의 개헌론과는 거리가 있는 '이원집정부제'를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개헌론을 굳이 조명하자면 이원집정부제가 아닌 '4년 중임제'로 보는 게 적절하다. 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인 2012년 '4년 중임제' 개헌 추진을 공약한 후 이와 관련해 입장을 바꿔 밝힌 적이 없다. 투표일을 한 달여 앞둔 시점이었던 11월 6일, 여의도 당사에서 '정치 쇄신'을 주제로 기자회견을 열고 그가 한 말은 다음과 같다. "저는 집권 후 4년 중임제와 국민의 생존권적 기본권 강화 등을 포함한 여러 과제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고 국민적 공감대를 확보해 국민의 삶에 도움이 되는 개헌을 추진해 나가겠다." 따라서 홍 의원이 '이원집정부제' 언급과 함께 '탈박' 선언을 한 것이 아니라면, 청와대와 친박계의 개헌론에 변화가 있었다는 추론은 충분히 가능하다.
사실 이 같은 청와대 및 친박계 내 개헌론 변화 기류는 꼭 홍 의원의 전날 발언이 아니어도 여러 장면에서 읽을 수 있었다. 친박 핵심이자 '정권 실세'로도 통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4일 한 행사에서 "지금까지 5년 단임 정부에서는 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앞으로 같이 고민해야 될 부분이 아니겠나 생각한다"며 개헌 필요성을 시사했다. '신박'으로 불리는 이인제 최고위원 다음 날인 5일 공식석상에서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당시 이 최고위원은 개헌 필요의 이유로 농어촌 선거구 문제를 거론하긴 했으나, 금기된 주제인 개헌을 공개 거론했단 점에선 주목을 받기에 충분해 보인다.
또 다른 친박 핵심인 윤상현 의원은 지난 9월 "지금 대선 주자는 별 의미가 없다"고 해 비박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당시 그는 "당 지지율이 40%인데 김무성 대표의 지지율은 20%"라면서 '김무성 불가론'에 불을 지폈고 "내년 총선으로 4선이 될 친박 의원 중 차기 대선에 도전할 사람들이 있다"는 말도 했다. '신박' 타이틀을 얻은 원유철 원내대표의 "내년 총선 목표는 180석 발언"도 개헌론과 연결 지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새누리당이 180석을 얻을 경우,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을 주장해 온 야당 또는 무소속 의원들을 포함하면 개헌 의결 정족수 200석(재적 의원의 3분의 2)에 가뿐히 다다를 수 있게 된다.
홍 의원의 발언을 '돌출 발언'이라며 진화하려 해도 진화되지 않는 이유는 이런 전사들 때문이다. 개헌은 이미 어떤 식으로건 친박계 인사들의 입을 통해 수면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대통령은 반기문, 총리는 친박계에서'란 시나리오가 정가에 떠돌게 된 것도 이런 발언들을 근거로 한다. 결국 홍 의원의 이번 발언 중 유난히 '돌출'된 부분은 이원집정부제밖에 없는 셈이다. 물론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론으로 정말 친박계가 선회한 것이라면, 이는 '돌출'이 아니라 '천기누설'이 되겠지만 말이다. 이 같은 상황을 두고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는 "조금 순수하지 못한 의도가 있다는 의심이 든다"고 조심스레 평했다. (☞ 관련 기사 : "이원집정부제 개헌, 박근혜 장기 집권 플랜?")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이 아주 불가능한 시나리오는 아니다. 지금까지 개헌론이 번번이 벽에 가로막혔던 큰 이유는 '개헌은 블랙홀'로 상징된 박근혜 대통령과 친박계의 저항이었다. 그런데 이들이 방향을 선회하면 상황은 아주 간단해진다. 정치적 경쟁 관계인 친이계의 좌장 이재오 의원은 진작부터 개헌을 요구해 왔다. 상대 당의 문재인 대표는 "대통령제보다 내각제가 훨씬 좋은 제도"라고 말한 적이 있다. '복귀론'이 끝없이 거론되는 손학규 전 대표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직접 거론한 일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박 대통령 정권을 지나오며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는 정치권뿐 아니라 사회적인 공감대도 이뤘다. 유승민 전 원내대표 자진 사퇴 전후로 '개헌을 통한 권력 분산' 필요성을 언급한 것은 꼭 정치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문제는 현실 세계에서의 '이원집정부제'가 어디로 향할 것이냐다. 이미 일각에선 이원집정부제로의 개헌이 박근혜를 정점에 둔 '친박계'의 생존 시나리오라는 해석이 분분하다. '보스 정치'로 그 생명력을 유지·강화해 온 터라, 대통령 임기 종료와 함께 친박계는 가장 중요하며 또 사실상 '유일한' 정치력을 잃게 된다. 게다가 박근혜 대통령만큼 강한 구심력을 행사할 수 있는 계파 내 차기 리더도 마땅치 않은 상황이다.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 출신인 이상돈 중앙대 명예교수는 지난 9월 한 인터뷰에서 친박계가 "이원집정부제 총리감은 있다, 이런 것(고 생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력 분산'형 개헌이 역으로 특정 정치 세력의 장기 집권을 현실화하는 발판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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