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저' 아니라면, 국민투표 합시다!

[박점규의 동행]<57> 비정규직 노동자가 '국민투표 공장'으로 출근하는 이유

기륭전자 박행란(53) 조합원의 손길이 분주합니다. 기름을 닦은 쇠막대기 8개를 묶어 종이상자에 넣습니다. 기표소에 쓰일 천을 가지런히 접습니다. 투표함, 투표 용지, 선거인 명부, 포스터, 공보물, 투표 안내문을 챙겨 넣고 박스를 포장합니다. 금세 투표함 세트가 완성됩니다. 투표함이 택배 차량에 실려 전국으로 배달됩니다.

박근혜 노동정책이 '개혁'인지 '재앙'인지 묻는 투표함입니다. 지난 두달 간 행란 씨는 분통이 터졌습니다. 사장 마음대로 해고하고, 우리 청년들 평생 비정규직을 만드는 법안이 청년들 일자리를 만드는 '노동 개혁'으로 둔갑했기 때문입니다.

행란 씨는 '박근혜 노동법'이 만들어낼 일터의 풍경이 얼마나 끔찍할지 잘 알고 있습니다. 기륭전자에서 내비게이션과 위성 라디오를 만들었던 그녀와 여성노동자들은 사장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일거리가 없다고 하루아침에 문자 메시지로 해고당했기 때문입니다.

6년을 싸워 정규직 전환을 합의했지만, 못된 사장은 야반도주를 했습니다. 지금도 그녀가 일하던 구로디지털단지에 비정규직이 넘쳐나는데, 계약 기간을 4년으로 늘리고, 파견 대상을 확대하면, 회사는 숙련된 비정규직을 싼값에 마음껏 쓰고 버릴 수 있게 됩니다. 기업들이 정규직을 채용할 이유가 전혀 없어집니다.

국민투표 운동에 함께하기로 한 금속노조 기륭전자 분회 조합원들이 매일 경향신문사 13층, '국민투표 공장'으로 출근하는 이유입니다.

지난 3일 행란 씨는 투표함을 가지고 여의도로 향했습니다. 새누리당 당사 앞 사거리.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젊은 직장인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홍보물을 나눠주며 투표 참여를 호소했습니다. 투표용지를 건네는 손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며 속상했지만, 한 사람이라도 더 투표에 참여시키기 위해 목이 쉬도록 외쳤습니다.

"박근혜 정부의 노동정책이 개혁인지 재앙인지 묻는 국민투표입니다."
"단 하루도 월급쟁이로 살아보지 않은 대통령이 해고를 쉽게 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법을 만들려고 합니다."
"박근혜 노동법이 통과되면 우리 딸 아들은 평생 비정규직이 됩니다."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가 '국민투표 공장'에 출근하는 이유

새누리당과 고용노동부는 지난 4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노사정 대타협 실천을 위한 5대 노동개혁 입법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열었습니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노동개혁은 청년 일자리 창출, 근로자 간 격차 해소, 대한민국 경제의 기초체력을 강화하는 1타 3피의 개혁"이라며 이번 정기국회에 5대 노동법을 강행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원유철 원내대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국회의 민생 열차는 멈출 수 없다"면서 "농성으로 일자리를 만들 수 없고 피켓으로 법안을 처리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친일과 독재를 미화하는 '박근혜 국사책' 고시 강행으로 국회 등원을 거부하는 야당을 '노동개혁'을 무기로 압박하겠다는 것입니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바람과는 달리 5대 노동 법안에 대한 국회 처리가 순탄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지난 2일 노사정위원회는 19차 전체회의를 열어 비정규직 공동 실태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6일까지 '비정규직 대안'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하기로 했습니다.

지난달 26일 노사정 각각 2인으로 구성된 비정규직 실태조사단은 4일 열린 회의에서도 비정규직 조사 대상과 조사 방법 등에 대해 합의를 하지 못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정부와 경총은 설문조사를 통해 당사자들 스스로가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연장하고, 파견을 확대하는 데 찬성했다는 결과를 얻어내야 하는데, 이게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해 12월 29일 비정규직 종합대책을 발표하면서 기간제 1186명(재직자 469명, 기간제 경험 구직자 71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80% 이상이 비정규직 사용 기간 연장에 찬성했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당시 정부는 설문을 의뢰한 학계 전문가 명단, 조사 대상, 설문 내용 등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2014년 말 기준 민주노총에는 12만 1076명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가입해 있지만, 단 한 명도 설문조사 대상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 지난 4일 서울 홍익대학교 앞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개혁'이 진짜 개혁인지 재앙인지를 묻는 '을들의 국민투표'가 진행되고 있다. ⓒ박점규

정부의 황당한 설문조사 문항

"한 사업장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할 수 있는 기한을 최대 몇 년까지 허용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①1년(3.8%) ②2년(11.0%) ③3년(12.2%) ④4년(4.3%) ⑤5년(14.8%) ⑥기간제한 필요 없음(53.0%)

당시 고용노동부의 설문조사 내용입니다. 정부가 진행한 설문조사의 대상과 방법에도 신빙성도 없지만, 설문 문항 그 자체에 결정적 결함이 있습니다. 선택해야 할 보기에 정규직 전환 내용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설문조사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일하다 정규직으로 전환되어야 할 기간이 얼마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묻고, ①3개월 ②6개월 ③1년 ④2년 ⑤4년(4.3%) ⑥기간제한 필요없음 으로 답변이 주어졌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요?

정규직 전환을 원하지 않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요? 직접 고용 대신 파견업체로 취직하고 싶다는 노동자가 몇 명이나 있을까요? 정부와 경총은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정규직 전환을 바라지 않는다는 '황당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한 교묘한 설문 문항을 만들고, 그 결과를 국회에 보고해 비정규직 사용기간 연장과 파견 확대를 통과시키겠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공동 실태조사가 원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지 않자, 새로운 꼼수가 등장합니다. 비정규직 입법과제를 다루는 노동시장 구조개선 특위 전문가 그룹 간사인 박지순 고려대 교수는 "교과서와 같은 합의안을 내놓기보다는 국회에서 입법할 때 참고할 좋은 참고서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말했습니다.

즉, 비정규직 당사자들이나 노동계가 강력히 반대하니까 합의안을 만들지 않고, 전문가 그룹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고용 유연성'을 위해 비정규직 사용 기간을 연장하고, 파견을 확대해야 한다는 '좋은 참고서'를 내놓겠다는 것입니다.

비정규직 당사자 반대해도 '전문가 의견'으로 강행

비정규직 사용기간을 연장하고, 파견을 확대하는 것은 재계의 오랜 숙원사업입니다. '박근혜 노동법'이 통과되면,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는 불법파견 논란에서 벗어나 숙련된 비정규직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됩니다. 정규직을 채용할 이유가 없습니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박근혜 노동법'을 현대차 청부 법안, 재벌 청부법이라고 말합니다.

'박근혜 노동법'이 국회를 통과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입만 열면 '노동 개혁'을 떠들까요?

▲ 19일 오전 경남 창원시 한서병원 앞에서 열린 '박근혜 정권 노동개악저지 기자회견'에서 민주노총 경남본부 조합원이 '을들의 국민투표'에 투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첫째, 경제위기에 대한 책임 전가입니다. 삼성전자, 삼성물산, 삼성중공업 등 삼성그룹 계열사에서 대규모 희망퇴직과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현대중공업, 대우조선에서도 희망퇴직과 권고사직이 강행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소리 소문도 없이 공장에서 쫓겨나고 있습니다. 올 연말까지 수만 명이 일자리를 잃을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고, 정리해고 요건을 강화해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는 박근혜 정부의 공약은 물거품으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민생 파탄으로 서민들의 분노가 박근혜 정부로 향하려는 이때, 정부는 '노동개혁'을 내세워 경제위기의 책임을 고액 연봉을 받는 대기업노조로, '노동개혁'에 반대하는 야당으로 돌리는 것입니다.

둘째, 재벌에 대한 면죄부입니다. 재벌들은 금고에 710조(30대 재벌 사내유보금)를 쌓아놓고도 청년 일자리를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대기업 사내유보금의 1%를 사회에 환원할 경우 25만 명의 청년고용이 가능해지지만, 정부는 사내유보금에 대한 과세조차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재벌들의 사내유보금과 재벌 3세들의 경영 세습에 대한 사회적 비난이 높아지고 있는 이때, 정부와 재벌은 신규채용을 늘리겠다는 공수표를 늘어놓으며, 재벌개혁에 면죄부를 주고 있습니다.

셋째, 총선용 부모세대 표 끌어오기입니다. '우리 딸 아들'을 전면에 내세운 박근혜 정부는 자식 취직 걱정하는 부모 세대를 노렸습니다. "노동개혁으로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를"이라는 현수막을 전국에 내걸고, '당신의 딸 아들'이 일자리를 얻으려면 '노동개혁'을 해야 한다는 논리를 퍼뜨렸습니다.

이 같은 논리는 15세 이상 인구의 55%가 넘는 비경제활동인구와 자영업자가 주된 타깃입니다. 은 연봉을 받는 대기업과 공공부문 노동자들이 임금피크제를 하면 청년 일자리가 생긴다고 속였습니다. '박근혜 노동법'이 국회 통과를 하지 못하게 되면, 내년 총선에서 야당과 대기업노조 때문에 청년 일자리가 생기지 않았다고 부모 세대의 표를 긁어모으면 됩니다.

김무성 대표가 말한 대로 '박근혜표 노동개혁'은 새누리당과 재벌들에게 '1타 3피'입니다.

박근혜 노동법 = 현대차 청부 법안

기륭전자 박행란 조합원은 오늘도 '국민투표 공장'으로 출근합니다. 3주 동안 2000개의 국민투표소가 전국에 설치됐습니다. 지하철 역사, 병원, 대학, 교회, 성당, 서점, 노점상, 공항, 한의원 등 곳곳에서 국민투표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투표는 25일까지 진행됩니다.

오는 14일에는 전국에서 노동자, 농민, 빈민, 청년, 학생들 10만 명이 서울 광화문으로 모입니다. 국민의 정신을 지배하는 '박근혜 교과서'와 국민들의 육체를 지배하는 '박근혜 노동법'을 막기 위한 '총궐기'입니다.

국회에 비정규직 대안이 보고된다는 16일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서울광장에서 대규모 시국미사를 엽니다. 28일에는 전국의 투표함을 서울로 모아 개표하고, 국민들의 뜻을 전달합니다. 일터와 골목과 거리에서, 박근혜 교과서와 노동법을 막기 위한 국민투표와 서명과 촛불 행진이 이어집니다.

행란 씨는 오늘도 거리에서 젊은 청년들을 만납니다. 지금은 그나마 나은 일자리를 가졌는지 모르지만, '박근혜 노동법'이 통과되면, 당신도 한순간에 기륭과 같은 비정규직 신세가 된다고 말합니다. 당신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국민투표에 참여하고, 함께 촛불을 들자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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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점규

박점규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집행위원은 민주노총과 금속노조에서 선전홍보, 단체교섭, 비정규직 사업을 담당했습니다. 2008년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에 함께하면서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할 사회적 기구인 ‘비정규직 없는 세상만들기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었습니다. 2010년 11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25일 점거파업에 함께 했고, 이후 한진중공업, 현대차 비정규직, 밀양 희망버스에 함께했습니다. 저서로는 <25일>, <노동여지도> 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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