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간 꼽추 행세한 남자 "살려고 그랬다!"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의 기록] 전라남도 구례 ①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에 대한 기획 연재를 진행합니다. 정찬대 <커버리지> 기자가 발로 뛰며 취재한 내용입니다.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이 지났지만, 아픈 기억은 지워지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좌우 이념 대립 속에서 치러진 숱한 학살, 그 참화(慘禍) 속에서 억울하게 희생된 수많은 원혼의 넋이 글로나마 위로받길 바란다고 밝혔습니다. 호남(제주 포함), 영남, 충청, 서울·경기, 강원 순으로 연재할 계획이며, 권역별로 총 7~8개 지역을 다룰 예정입니다.

봉성산에 메아리치는 억울한 망자의 울림

70여 년 전 군·경에 의한 참혹한 민간인 학살의 비극은 남부 지방의 작고 조용한 산골 마을도 예외일 수 없었다. 1948년 10월, 전라남도 여수 주둔의 국방경비대 제14연대는 제주도 4.3 사건 진압 출동을 거부하고 대한민국 단독 정부를 저지한다는 명분으로 여수와 순천 시내를 장악, 차례로 구례를 점령하였다.


지창수, 김지회 등 좌익계 군인들이 중심이 돼 조국 통일, 인민 해방을 기치로 봉기를 일으키면서 시작된 여순 사건은 그렇게 조용하던 전남 동부 지역을 피울음의 역사로 뒤바꿔놓았다.

미국의 진압 작전 개입과 정부의 계엄령 선포로 대대적인 소탕 작전이 단행됐고, 순천은 23일, 여수는 27일 군경에 의해 완전 진압됐다. 그러나 봉기군을 포함한 남조선노동당 등 지방 좌익 세력 일부는 인근 산악 지대인 지리산에 은거하며 빨치산으로 활동, 구례 주둔 군경과 유격전을 벌이며 대치 상태를 이어갔다.


낮에는 군경이, 밤에는 14연대 반란군이 점령하기를 수차례. 이러한 좌우 대립의 정점에서 그저 다락 한쪽 귀퉁이에 몸을 숨긴 채 솜이불 하나 끌어안고, 부르르 떨린 주먹 입에 틀어막으며, 죽음의 공포에 내몰렸던 이는 군인도 경찰도 반란군도 아닌, 아무 이유도 명분도 모르는 그저 목숨 하나 부지하기 힘든 산골 마을의 순박한 촌부였다.


취재진이 구례를 찾은 것은 2007년과 2015년 두 차례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지난 2007년 여순 사건 구례경찰서 임시보호실 민간인 집단 학살 사건과 관련, 구례 봉성산 유해 발굴 개토제(開土祭)를 진행한 바 있다. 하지만 유족들의 기대와 달리 12구로 추정되는 유해만 발굴됐을 뿐 의문의 실타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다.


8년여의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찾은 구례는 과거의 아픔을 고스란히 삼켜내고 있었다. 아직도 그날의 억울한 영혼이 뒤섞여 절규하는 듯한 봉성산 능선 자락에는 70여 년을 숨죽여 참아온 망자의 고요한 울림만이 메아리치는 듯 했다.

▲ 구례읍에서 바라본 봉성산 모습.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봉성산 유해 발굴을 위한 개토제를 진행했지만, 12구로 추정되는 유해만 발굴됐을 뿐 이곳 어딘가에 묻혔을 50여 명 이상의 유골은 발견하지 못했다. ⓒ커버리지(정찬대)

잊을 수 없는 공포, 67년 전 봉성산에는

1948년 11월 19일 새벽, 군인과 경찰이 여순 사건 연루자로 지목돼 상무관 임시보호실에 수감된 민간인 72명을 경찰서 옆 연병장으로 끌어냈다. 지창수 일당이 제주 폭동 진압 동원을 거부하며 여수에서 반란을 일으킨 지 꼭 한 달이 되는 날이었다. 반란군 토벌을 목적으로 당시 구례 중앙초등학교에는 국군 제2여단 12연대(1·2·3대대)가 배치돼 있었다. 12연대는 이곳에서 여순 사건 연루자 색출 및 연행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협박에 못 이겨 반란군에 먹을 것을 제공하거나 이들과 핏줄로 이어진 무고한 양민들이 대거 연행됐다. 구례읍을 비롯해 지리산과 백운산을 연결하는 문척면, 간전면 주민들이 피해를 입은 것도 이 때문이다. 반란군이 지리산 주둔지에서 가까운 곳을 습격, 이곳에서 식량을 확보하면서 애먼 주민들만 반란군으로 오해받는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한 것이다. 더욱이 간전면 중평 부락(수평리) 이돈천 씨는 경찰에 끌려가는 동네 친구를 향해 "어이 어디간가"라고 한마디 했다가 함께 연행돼 변을 당하기도 했다. 군경이 어떤 규칙이나 규율 없이 죄 없는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연행해 학살했음을 방증하는 대목이다.


총살 집행 하루 전인 18일 저녁, 공교롭게도 반란군은 12연대의 주둔지인 중앙초교와 구례경찰서를 급습했다. 그리고 군경은 이러한 반란군의 습격을 연행한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공격으로 판단, 다음날 곧바로 총살형을 집행했다. 주민들은 '설마'하는 마음으로 순순히 군경의 지시를 따랐지만, 연병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서슬 퍼런 총검이었다. 군과 경찰은 그들을 향해 서슴없이 총구를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구에선 노란 불꽃이 일었고,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붉은 핏줄기는 굵은 모래알이 되어 바닥에 흩어졌다.


군경은 이튿날 총살당한 사체를 국군토벌대가 매복해 있던 봉성산 정상 너머 서쪽 사면에 매장했다. 말이 매장이지 사체를 늘어놓고 흙을 흩뿌려 놓은 것에 불과했다. 천우신조로 두 명이 살아남았지만 나머지 희생자는 모두 그곳에 유기된 채 방치됐다. 그나마 군이나 경찰에 인맥이 있던 일부 유족들은 새벽을 틈타 시체를 수습했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정확하진 않다.

13년간의 꼽추 행세, 총부리를 피하다

"마치 가을에 무 구덩이 파듯이 요상하게 파놓고 그냥 흙으로 덮어놓은 채 묻었더라고, 그래서 시체 확인도 못하고 장소만 그 근처인 것만 확인하고 돌아왔지"


조규태(83·구례읍) 씨는 1948년 11월 19일의 한(恨) 많은 봉성산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참혹했던 광경이 뇌리에 스쳤는지 조 씨의 낯빛이 순간 일그러졌다. 당시 16살이었던 조 씨는 "우리 일가 중에는 그런 사상(좌익)을 가진 사람도 없는데, 가족이 총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 혹 매형이 죽은 것은 아닌가 싶어 봉성산에 시체를 확인하러 갔다"고 했다.


조 씨의 매형은 일제 말 강제 징병을 피하고자 지리산에 숨어들었다. 해방 후 마을로 내려온 그는 이 과정에서 배일 사상(排日 思想)을 갖게 됐다. 당시 배일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사회주의 운동을 하곤 했는데, 이 때문에 그런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무고한 사람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형님이 우익 청년단체인 한청단(대한청년단) 본부에서 활동 중에 있었고,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시체를 확인할 수 있었던 조 씨는 "14연대(여순 사건 반란군)가 구례를 습격하고 미처 산으로 가지 못한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동네 젊은 사람들은 심문 절차나 신분 확인 없이 닥치는 대로 잡아다 총살시켰다"고 회상한다.


당시 봉성산에는 국군토벌대가 진지를 구축하며 매복해 있었다. 입산하려던 반란군을 색출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주민이라 할지라도 반란군으로 의심되면 심문 없이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기 때문에 산에 매복해 있는 군인은 주민들에게 공포 그 자체였다. 조 씨는 당시 기억을 더듬으며 긴장한 듯 떨린 목소리를 이어갔다.

다행히도 매형은 그곳에 없었다. 여순 반란 사건을 미리 예측했는지 여느 때부터 꼽추 행세를 하며 철저하게 은둔 생활을 해온 것이다. 이러한 노력으로 군경의 총부리를 피할 수 있었던 그는 1961년 5.16 군사 반란이 일어날 때까지 무려 13년 동안 꼽추 행세를 했다. 이미 10여년 전 고인이 된 그가 당시 겪었을 공포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그러면서 혹시라도 발각될까 두려워 박정조(본명)라는 이름 대신 박병표(가명)란 이름으로 살아왔다. 그런 조심성 덕에 그는 다행히 혼란스런 시대의 비극을 피할 수 있었다.

▲ 구례 산동면에서 만난 한준희 씨 아버지는 반란군에게 먹을 것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총살됐다. 한 씨는 서울 서대문구청에서 근무하던 중 연좌제에 걸려 강제 퇴직했고, 이후 고향인 구례에서 농사를 지었다. 1980년 '빨갱이 낙인'에 대한 억울함을 호소하며 구례경찰서에 진정을 요구했으나, 규명이 어렵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커버리지(정찬대)

피비린내 속에 피어난 끈끈한 인간애

조 씨는 매형 이야기가 끝날 무렵 기막힌 사연 하나를 더 털어놓았다. 그는 "젊은 사람들은 죄가 있고 없고 간에 모두 죽임을 당했다"며 당시 구례경찰서 옆 연병장에서 총살당한 72명의 얘기를 이어갔다.


11월18일 젊은 사람들에 대한 조사를 한다며 토금 부락(문척면 금정리)에서만 18~19명 정도가 연행됐고, 그 안에 조한우 씨도 끼어 있었다.


조사를 한다고 했지만 이들은 이미 반란군 동조자로 분류돼 총살형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구례군청에 근무하던 조한우의 아버지 조희봉 씨는 아들의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경찰에 선을 댔다. 하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튿날 조한우를 비롯해 72명의 젊은이들은 양손에 새끼줄이 묶인 채 경찰서를 빠져나왔고, 경찰서 연병장에서 전부 사살됐다. 그렇게 총살당한 민간인들의 원혼은 그 곳 연병장에 사무친 채 차가운 주검이 돼 경찰서 앞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에 내던져졌고, 일그러진 표정은 가마니에 덮인 채 방치됐다. 그런데 천우신조일까 아니면 경찰이 손을 썼던 것일까. 죽음과 공포의 현장에서 유독 조한우 씨만이 양 무릎이 관통된 채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

훗날 구례유족회장 박찬근 씨로부터 들은 바에 따르면 조 씨 일가 중 구례서 형사가 있었고, 이 형사가 조한우의 총살을 맡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의도적으로 다리를 쐈던 것이다. 조규태 씨는 해당 형사의 이름이 조귀준이라고 이를 확인해줬다.


경찰이 민간인을 동원, 총살시킨 72명을 바지게에 들쳐 메고 봉성산에 한꺼번에 매장 한 것은 그 뒷날이다. 당시 운반 책임자는 김재천 씨. 아들의 생존을 알고 있던 조희봉은 김재천을 찾아가 눈물로 호소했다. 아버지의 간절함이 통했을까? 김 씨는 군인들 눈을 피해 백련리 저수지 옆에 조한우를 내려놓았고, 그 일가인 조규태 씨 측에 이를 알렸다. 조 씨 일가는 새벽을 틈타 조한우를 자신의 집 마구간으로 옮겼다. 차마 발각될까 두려워 집안으로는 들이지도 못했다.


그는 '총살된 사람을 숨겨뒀다 걸리면 일가족이 몰살당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어떻게 보호할 생각을 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반란군도 아니고 민간이니깐 그랬지. 아직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나몰라라할 수 있느냐"며 군인과 경찰의 민간인 학살에 분노를 내비쳤다.


1948년 11월 유난히 차가웠던 그해 겨울, 앞으로 닥칠 참혹한 상황을 암시하듯 이곳의 겨울은 여느 때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그리고 군경의 날카로운 총부리와 공포의 피비린내 속에서도 이들은 지리산의 푸근함과 섬진강의 잔잔한 강줄기처럼 끈끈한 인간애(人間愛)를 나누고 있었다.


('전남 구례 ②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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