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담이 현실에 가까워졌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움직임에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끼어들었을 때, 일각에선 '투자자-국가 간 소송'(ISD)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이에 대해 '괴담' 취급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는 틀린 판단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연금 측이 엘리엇의 ISD 제기 가능성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이재용 편 든 대가, 국민이 치른다
지난 7월 17일 임시주주총회에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안이 승인됐다. 삼성물산 주주들에게 불리한 조건이었다. 삼성물산 대주주인 국민연금은 합병에 찬성했고, 그 결과 수천억 원대 손해를 봤다. '주주 가치 극대화' 논리에 반하는 결정이었다.
'삼성에 편향적인 국민연금의 결정으로 엘리엇 역시 피해를 봤으며, 이런 불공정한 결정의 배경에는 국민연금을 관리하는 한국 정부가 있다.'
합병에 반대했던 엘리엇 측이 이 같은 논리로 ISD를 제기할 가능성이 제기됐었다. 엘리엇 측이 실제로 한국 정부를 상대로 ISD를 제기한다면, 국민연금이 삼성 편을 든 대가를 한국 정부가 치르는 셈이 된다.
삼성물산 기존 주주들에게 불리한 합병이 추진됐던 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삼성전자 장악력 강화를 위해서였다. 제일모직에게 유리한 합병은, 이 부회장 입장에서 삼성물산이 지닌 삼성전자 지분을 싸게 확보하는 효과가 있다. 이 부회장은 목적 달성에 성공했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입은 6000억 원대 손해(지난달 9일 기준), 한국 정부가 치르게 될 ISD 관련 비용 등은 고스란히 국민의 부담이다.
"엘리엇이 보낸 공문…ISD가능성 있다"
국회 정무위원회가 14일 진행한 금융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홍완선 국민연금공단 기금운용본부장이 증인으로 출석했다. 홍 본부장은 이날 "엘리엇이 지난달 10일 보내온 공문에 따르면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통해 한국 정부를 제소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ISD 가능성을 묻는, 김영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의 질문에 대한 답변이었다. 이어 홍 본부장은 "국민연금의 판단에서는 승소할 자신이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러나 흔히 경험하는 민사 재판과 달리, ISD는 이긴 측도 일정한 비용은 부담하는 경우가 많다. '중재'가 갖는 특징 때문이다. 설령 완벽한 승리를 얻는다고 해도, 변호사 비용이 천문학적이다. 이는 결국 국민의 부담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회 소속 노주희 변호사 역시 엘리엇이 순순히 물러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ISD 가능성에 대해 탐색 중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다만 구체적인 방법론은 점치기 어렵다고 했다. ISD를 제기하는 경우의 수가 복잡하다는 것. 한미 FTA 협정문 속 ISD 조항을 활용하는 경우뿐 아니라, 미국이 아닌 나라와의 BIT(양자 간 투자 협정) 속 ISD 조항을 우회적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가능하다.
"제일모직 대주주가 이재용이 아니었다면, 이런 합병 이뤄졌겠나"
이날 금융위 국감에선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이사도 증인으로 출석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였다. 김기식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비율을 시가총액 기준으로 정한 게) 법률적 하자는 없다. 그러나 합병 시점을 언제로 잡느냐 따라 합병 비율이 달라지는데, 이번 합병으로 삼성 지배주주는 이익을 본 반면 삼성물산 소액주주는 손해를 봤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만약 제일모직의 대주주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아니었다면 이 시점에 이런 비율로 합병이 이뤄졌겠느냐"고 따졌다.
이에 대해 최치훈 삼성물산 대표이사는 "합병은 경영에 따른 필요에서 결정한 것이고, 시점 역시 세계적인 경영 상황 등을 기준으로 해서 추진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김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이날 국감에서 "이번 합병은 이재용 부회장이 삼성그룹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진행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주장도 있었다. 김기식 의원은 "엘리엇이 지난 4월 삼성물산 측과 면담했을 당시 삼성물산 측 담당자는 합병 계획이 없다고 답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삼성 그룹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이뤄진 합병이라서, 당사자인 삼성물산 측도 몰랐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최 대표이사는 "4월 초에는 (합병을) 준비하지 않았고 4월 말부터 준비에 들어갔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삼성과 SK, 비슷한 사안에 대한 결정이 왜 달랐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SK와 SK C&C. 최근 이뤄진 이 두 합병 사례는 닮은 점이 많다. 총수의 그룹 장악력을 높이려는 목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그런데 대주주 자격으로 두 합병 건에 개입한 국민연금은 서로 엇갈린 결정을 했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은 찬성, SK와 SK C&C의 합병은 반대였다.
김영환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이 대목을 따졌다. 그는 "SK 합병 건에서 국민연금은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를 열어 반대 의견을 내놨지만 삼성 합병 건에선 전문위원회의 의사를 묻지 않고, 내부적으로 투자위원회를 열어 찬성을 결정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라고 따져 물었다.
이에 대해 홍완선 본부장은 "내부 규정상 의결권에 대해서는 기금운용본부가 결정하게 돼 있는데, 기금운용본부는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요청할 수도 있다는 것 뿐"이라고 말했다. 의결권행사전문위원회에 회부하는 게 의무는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그는 이런 답변이 애매하게 들릴 수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는 "이번 일을 계기로 모호한 부분을 확실히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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