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성은 일본의 '게이죠'다"

[건축왕, 경성을 만들다] 경성이냐, 게이죠냐?

디벨로퍼. 땅 매입부터 기획, 설계, 마케팅, 사후 관리까지 총괄하는 부동산 시행사, 혹은 개발자를 말합니다. 이름 그대로 부동산을 새로운 용도로 개발하는 이를 가리킵니다. 해외와는 달리 한국에서는 디벨로퍼의 이미지가 좋지 않습니다. 제대로 된 디벨로퍼가 부재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의 디벨로퍼들, 정확히 일제 시대 때 활동했던 디벨로퍼들에 대한 평가도 비슷합니다. 집 장사꾼으로 치부됩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제기됩니다. 일본인으로부터 '조선인의 경성'을 지켜낸 사람들이라는 평가입니다.

김경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가 현재의 북촌, 인사동을 포함해 서울 전역에 근대 한옥 단지를 개발한 정세권에 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를 통해 근대의 디벨로퍼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1920년대 조선인들은 경성이 일본인에 의해 점령될지 모른다는 심각한 두려움에 휩싸였다. 1910년 일제의 조선강점을 시점으로 일본인들이 경성을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경제마저도 장악하리라 확신했다. 그렇기에 조선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종속되고 궁극에는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경성으로 바뀔 것을 염려하였다.

"대경성을 계획하고 대도시를 설계하는 도다. 나날이 발전하고 나날이 융성하는 도다. 그러나 그 융성하는 경성이 어찌 조선 사람의 경성인가, 조선 사람은 (자본이 없기에) 집을 팔아먹고 땅을 팔아먹고 도망하되, 일본 사람은 그 반대로 사고 얻고 하여 일일이 물밀듯이 경성에서 발전 팽창하여 가는 도다. 이와 같이 조선인의 경성은 망하여가고 일본인의 경성은 흥하여 가는 도다!"1)

"이와 같이 일면 일본 사람이 왕성하는 동시에 조선 사람은 멸망하여 가는 도다. 조선 사람은 먹을거리가 없는지라. 어찌 망하지 아니하기를 바라며, 수입의 길이 없는지라 어찌 그 집과 땅을 지키고 이 경성을 자기가 살고 있는 도시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조선 사람으로서는 멸망하여 가는 경성을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원한의 피가 끊는 도다."2)

당시 이순탁 연희전문 교수는 <동아일보> 기고에서 비참한 심정을 드러냈다.

"경성은 이조 오백 년 동안 조선 경제의 중심이었으며, 정치의 중심이었으며 문화의 중심이었으며 인물의 중심이었으며 외교의 중심임과 동시에 소비의 중심이었으며 사치의 중심이었으며 착취의 중심이었으며 협잡의 중심이었으며 죄악의 중심이었다. 요컨대 조선의 모든 중심이었다. 이리하여 금일까지도 조선 사람에게는 경성은 조선의 중심과 같이 생각될 뿐 아니라, 외국인에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 같다.

그러나 경성은 벌써 조선의 중심이 아니다. 조선인의 중심이 아니다. 즉 경성은 조선의 중심이 아니라, 게이조(경성의 일본식 발음)의 중심이며, 조선인의 경성이 아니라 일본인의 경성이다. 경제 방면으로 보아서 그러한즉, 다른 방면이야 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3)

▲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그는 특히 일본인들이 조선인들보다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는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였다. 당시 경성부 토지 면적은 대략 1000만 평에 이르렀는데 이 중 국공유지를 제외한 사유지(조선인, 일본인 및 기타 외국인 보유 토지)는 대략 440만 평으로 전체의 44%에 이르렀다. 이 중 조선인 소유는 159만 평인데 비해 일본인 소유 토지는 164만 평에 달한다. 기타 외국인 토지가 113만 평이었다고 하니, 조선인 소유 토지 비중은 전체의 16%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국가 체제를 일제에 강압적으로 빼앗긴 상황에 국공유지와 (민간) 일본인 소유 토지를 모두 합하면 일제 혹은 일본인에 의해 확보된 토지는 무려 경성 전체의 72%에 이른다.4)

조선인 보유의 토지 면적이 일본인에 비해 적다는 것은 토지 양적인 측면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에 비해 토지 시장에서 수세에 몰린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었다. 토지의 질적인 측면이라 함은 토지가 도시의 어느 지역에 위치하느냐와 관련된다. 예를 들어, 명동과 같이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토지와 서울 변두리 지역 토지를 비교할 때, 비록 면적이 같다 하더라도 두 토지 간 가격 차이는 어마어마할 것이다. 따라서 토지 시장에서 기실 더 중요한 부분은 토지의 규모(토지의 양)보다는 토지 가격(토지의 질)이다.

토지 가격을 보면 조선인과 일본인 간 불평등은 더욱 심화된다. 조선인 보유 토지 가격은 879만 원인데 반해, 일본인들의 보유 토지 가격은 60% 이상 높은 1566만 원에 이르렀다. 조선인과 (민간) 일본인 보유 토지 규모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인 보유 토지 가격이 조선인보다 훨씬 높다는 것은 매우 요지의 토지들을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것을 뜻한다.

또한 당시 조선인 인구수는 일본인보다 3배가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1인당 보유 토지 규모와 보유 토지 가격을 계산한다면 그 불평등성은 매우 심각하다.

"큰 집과 좋은 땅은 전부 일본인 소유 : 해마다 조선 사람의 소유 토지나 가옥은 (…) 조선 사람의 손을 떠나 다른 사람의 손으로 건너가고 (있기에…) 멀지 않은 장래에 조선 사람은 다소 시기의 장단이 있을 뿐, 전부가 걸인이 될 것을 추측할 수가 있다. () 인종별로 보면, 값이 높은 중앙 번영 지대는 전부가 일본 사람과 외국인이요. 조선 사람은 모두 산밑 움막살이 초가집이 대부분"5)

토지를 보유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제력이 뒷받침되어야 하는 바, 1923년 조선총독부 자료(<통계 연보>)에 의하면 호별세(1년 소득 1000원 이상인 사람이 내는 일종의 소득세)를 내는 경성 거주 조선인은 20만 명 중 불과 2000명으로 전체 경성 소재 조선인의 1%에 불과하였으나, 일본인은 7만6000명 중 9500명이 냈다. 통계상으로 경제력을 갖춘 조선인은 일본인의 4분의 1수준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6)

따라서 조선인이 일본계와 경쟁하여 토지를 확보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경성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힘이 미약했기에 그들의 미래를 두려워했고 조선인의 경성이 아닌 일본인의 게이죠로 바뀔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경성 조선인이 일본인보다 비록 3배가량 많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성이라는 곳의 소유자가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집의 고용인사역자(일본인 토지주 또는 기업주의 공용된 조선인) 밖에 되지 못하면, 벌써 그 집의 주인은 아니다. 경성은 벌써 '경성'이 아니다. 경성은 '게이죠'다."7)

1) "멸망하여 가는 경성 (상)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2) "멸망하여 가는 경성 (중) 경성이 다 이렇다", <동아일보> 1923년 3월 6일.
3)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4) <동아일보>, 앞의 기사.
5) "조선인 토지 가옥, 일인의 사분의 일–오백원 이상 납세자는 일본인, 오원 미만에는 전부가 조선인", <조선일보> 1927년 12월 11일.
6) 강병식, "일제하 서울(경성부) 토지 소유 실태와 사회상에 대한 연구", <역사와실학> 3집, 1992년.
7) "경성이냐? 게이죠냐?", <동아일보> 1927년 1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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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민

하버드대학교에서 박사(부동산/도시계획) 취득 후, 2009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환경대학원)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부동산 금융과 도시/부동산개발이며, 현재는 20세기 초 경성의 도시개발과 사회적기업과 경제 대한 연구를 진행중이다. Urban Hybrid (비영리 퍼블릭 디벨로퍼)의 설립자겸 고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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