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제주 지역 최고 기온 기록을 갈아치우며 무더위가 기승을 부린 29일. 제주도 한 쪽에서는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뜨겁게 달궈진 아스팔트를 성큼성큼 걷고 있다. 강정 해군 기지 건설의 부당함을 알리고 평화적인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 2012년 시작한 강정생명평화대행진이 올해도 어김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600여 명의 참가자 가운데는 제주시 오등동에 위치한 대안 학교 '보물섬' 학생들도 포함돼 있다. 교내 평화 수업의 일환으로 참가한 학생들은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초등학교 2학년부터 의젓한 티가 제법 풍기는 중학생까지, 모두 20여 명.
보물섬과 강정은 서로에게 특별한 존재다. 지난해에도 대행진에 참여했고, 구럼비 바위가 남아있을 당시에도 강정을 꾸준히 찾았다. 강정은 학생들의 격려가 외로운 싸움에 큰 힘이 됐고, 보물섬은 '평화, 생태'라는 중요한 교육 가치를 몸소 체험했다.
대행진 3일차인 이날, 점심을 위해 서귀포시 성산중학교에 도착한 동진(東進) 일행에 보물섬이 있었다.
학생들은 도서관 그늘 아래 모여 앉아 식사를 했다. 성인들도 기진맥진할 법한 날씨지만 학생들에게서 지친 기색은 크게 찾아볼 수 없었다. 남는 반찬이 없을 만큼 먹음직스럽게 그릇을 비웠고, 물과 음료수를 서로에게 챙겨주며 장난스럽게 다독이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보물섬 막내와 즐겁게 장난치는 송채원(16·여) 학생은 "솔직히 걸을 때마다 '이거 언제 끝나나' 생각해요"라고 웃어보였다.
제주시 도심에서 줄곧 자란 송 양은 해군 기지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그렇듯 '그런 것이 있구나'라는 정도만 알고 있었다.
"(서귀포 강정에) 해군 기지가 만들어진다는 사실만 알았어요. 어떤 과정인지는 몰랐죠. 오히려 '(해군 기지가 생겨서) 군인들이 우리를 지켜주니 좋은 것 아닌가'라는 생각도 했었어요"라고 되돌아 봤다.
그러던 중 자신이 몰랐던 이야기, 해군 기지 입지가 강정으로 정해진 사연을 알게 되면서 깜짝 놀랐다. "책에서 보던 역사는 한참 전에 벌어진 과거지만, 강정은 현재 진행형이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다"고 했다.
이제는 동생들도 챙길 줄 아는 작은 숙녀지만 자신이 전혀 몰랐던 '커다란 사실'과 마주하니 막막함이 밀려든 것이다. "(강정을 알게되고 나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지 몰랐다"는 솔직한 고백이 뒤따랐다.
그렇지만 송 양에게서는 뜻밖의 말이 이어졌다.
"강정이 절박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어요. 더 많은 사람들에게 (해군 기지와 강정을) 알려야 하잖아요. 강정은 우리가 도와줘야 하니까요."
송 양에게 '만약 해군 기지로 고통 받는 모든 강정 구성원들이 자신과 똑같은 중학교 3학년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냐'고 물었다.
송 양의 대답은 짧았지만, 묵직하게 다가왔다.
"미안해."
"같은 제주에 살면서 잘 알지도 못했고, 지금은 아예 부서졌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걷고 있어요."
'부서졌다'는 말은 단지 구럼비만을 일컫는 것이 아닐 것이다. 10대에게도 그동안 강정 마을이 받은 고통이 충격으로 와닿는 듯 했다.
"저희는 평화와 생태 두 가지를 중점적으로 교육합니다. 강정 해군 기지 사태는 그 출발이나 과정 모두 두 가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봐요. 후손들이 살아갈 환경은 어른들이 만들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지속 가능한 사회인 셈인데, 제주가 지속 가능하려면 평화, 생태를 핵심적인 가치로 삼아야 합니다. 그런 교육 철학을 담아 행진에 참여하게 됐습니다."
정연일(46) 보물섬 교장의 말이다.
고된 일정에도 '비상 버스' 한 번 오르지 않는 학생들이 대견하다는 정 교장은 이번 행진을 통해 학생들이 해군 기지 건설의 위법성, 군사적 중요성 같은 커다란 의미 보다는 자신과 주변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는 계기가 되길 원했다.
"무거운 것을 들어야 근육이 생기듯 지금 이 힘겨운 과정을 이겨내면 그 자체만으로 보물섬 아이들에게 분명히 중요한 힘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사람은 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닌, 함께 사는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점, 그리고 자신이 삶의 주인이어야 한다는 것을 이번 강정 생명 평화 대행진을 통해 학생들이 깨달았으면 합니다."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