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면초가' 유승민…자리 지켰으나 당·청·야 모두 '적'

與, 국회법 폐기 '당론' 결정…유승민 "청와대와 소통 못해 송구"

박근혜 대통령의 '개정 국회법' 재의 요구에 따라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의 지위가 바닥으로 추락하고 있다. 새누리당은 25일 오후 장시간 토론 끝에 국회로 돌아온 개정 국회법의 '자동 폐기'를 결정했다.

유 원내대표의 거취 문제는 크게 불거지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당분간은 직위를 유지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이후 야당과의 관계 악화는 물론이고, 당내 장악력 약화와 당·청 관계에서의 열세 등 겹겹의 고난이 유 원내대표 앞에 놓여있다.

새누리당은 박 대통령이 개정 국회법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하자 이날 오후 1시 반께 의원총회를 열어 다섯 시간가량 거부권 정국을 빠져나갈 수습책을 논의했다. 전례에 비추어 상당히 많은 수인 40명의 의원이 의총장에서 발언을 했다는 점에서도 사안의 민감성이 전해진다.

참석자들에 따르면, 의원총회 초반엔 친박계 의원들의 격앙된 발언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국회법 처분 방식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졌다.

개정 국회법을 다시 본회의에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전해진다. 그러나 '자동 폐기' 의견이 대세였다고 참석자들은 전했다.

김영우 의원은 회의 중간에 기자들을 만나 "(논의의) 큰 방향은 거부권을 행사한 대통령의 입장과 뜻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전했고, 김무성 대표는 회의를 마친 후 "대통령께서 한 고뇌에 찬 결정은 당이 절대 존중한다"는 결론이 내려졌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새누리당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시 개정 국회법을 본회의에 다시 부치겠단 입장을 밝혀 온 정의화 국회의장을 우선 설득할 것으로 보인다. 설득에도 정 의장이 재표결을 강행할 경우 "전부 퇴장하기로 (의총에서 결정)했다"고 여상규 의원은 전했다.

거부권 행사되자 '카오스'… 친박 사퇴 성명 vs. 비박 긴급 회동

사실 새누리당의 개정 국회법 '뭉개기'는 예상됐던 일이다.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이전부터 당내엔 '자동 폐기가 수습책'이란 여론이 퍼져있던 터였다. 그런 만큼 이날 의총장 안팎의 관심은 개정 국회법 처분 방식보다는 유 원내대표 거취 문제에 쏠려있었다.

새누리당의 한 비박계 의원은 전날인 24일엔 "스크럼을 짠 (조직적으로 사퇴 요구를 할) 친박계 의원이 몇 명일지가 예상되지 않는 상황"이라면서 "판이 깔려야 알 거 같다.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박 대통령이 이날 오전 국무회의에서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위의 발언을 꺼내놓자, 당내는 크게 술렁였다. 또 다른 비박계 의원은 통화에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인정하고, 유 원내대표는 살리는 게 유일한 수습책이라고 생각했었다"며 "그런데 대통령의 발언은 싸우자는 것"이라고 성을 냈다. (☞ 관련 기사 : 박근혜 '거부권' 행사 국무회의 발언 전문)

의총이 열리기 전엔 친박계 김태흠 의원과 김현숙 의원이 유 원내대표를 강하게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며 압박의 수위를 높여갔다. 김태흠 의원은 "무능 협상과 월권 발언으로 작금의 상황을 초래한 것에 대해 유 원내대표는 책임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현숙 의원은 "국회법 개정안이 위헌적 요소로 (운영위원회에) 계류돼 있었으나 유 원내대표는 '아무 문제없이 통과될 법'이라고 (지난달 28일) 보고해 법안 통과에 결정적인 근거를 제공했다"며 "사실과 다른 정보를 보고했던 유 원내대표의 정확한 해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날을 세웠다.

한편, 박민식·황영철·김성태·홍일표·김세연·정수성·정미경·김영우 등 8명의 초·재선 의원들은 의원총회 전 '당 화합을 위한 긴급 모임'이란 제목의 회동을 통해 유 원내대표의 면책론에 공감대를 모았다.

박민식 의원은 의원총회 도중 기자들을 만나서도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되기 직전인 지난달 28일 의사결정 과정을 되짚으며, "(당론 투표가 아닌) 자율 투표를 했다"면서 "지금 와서 위헌성 논란이 있다고 특정인의 책임을 묻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했다.

비박계 김성태 의원은 "이번 국회법 거부로 유 원내대표가 책임진다면 이건 대의 민주주의가 실종되는 위험에 처할 공산이 있다"면서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는 헌법이 부여한 대통령의 권한으로 끝나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 이상의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당내 분란과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개정 국회법에 대한 입장을 묻는 취재진에게 둘러싸여 있다. ⓒ연합뉴스
유승민 "제 자신 돌아보는 계기…매우 송구스럽다"

이처럼 양측의 입장이 부딪치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의원총회의 결론은 사실상의 유 원내대표의 '직위 유지'다. 김무성 대표는 기자들을 만나 '거취를 묻지 않는 것이냐'는 질문에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의총에서 나온 모든 것을 모아 최고위원회의에서 신중히 논의해보겠다"고 했지만, 이대로 거취 논란은 일단락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 원내대표 앞에 놓인 상황은 녹록하지만은 않다. '유승민 사퇴' 성명을 냈던 김태흠 의원은 이날 "당청 간 상처가 났는데 도려내거나 치료하거나 해야지 덮고 간다고 되겠느냐"면서 "원내대표로서 당에서 의견을 모으는 리더십 측면에서 상처를 받았고, 앞으로 (야당과) 협상하는 과정에서 (야당이) 신뢰를 할 수 있겠나"라고 말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평적 당·청 관계를 강조하던 유 원내대표는 이날 의원총회 말미에는 "청와대 식구들과 함께 당·청 관계 개선"에 힘쓰겠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청와대 실무진을 겨냥해 '얼라'라는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던 그다. (☞ 관련 기사 : 유승민 "청와대 얼라들이 하는거냐…굉장히 위험")

유 원내대표는 회의 후 기자들을 만나서도 "청와대와 소통이 원활하지 못했던 점에 대해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을 한다. 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됐다"면서 자세를 낮췄다. 그러면서 "앞으로 당·청관계 복원을 위한 길을 찾아보겠다"면서 일각의 사퇴 요구에 대해선 "더 잘하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더 열심히 하겠다"고 말했다.

이날 오전 박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기 전엔 "국회 선진화법에 따라 여당 원내대표로서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었다.

당내, 당·청 관계뿐 아니라 야당과의 관계 순조롭지 않을 전망이다. 당초 야당은 개정 국회법을 대통령이 국회로 돌려보낼 경우, 유 원내대표·정의화 의장 등과 협의해 재표결에 부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본회의를 통과한 법의 자구를 수정해가면서 협상한 '신의'를 전제한 기대다.

그러나 이날 새누리당이 '자동 폐기' 결론을 내린 후 박수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새누리당이 국회의 권리와 의무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의회민주주의에 조종을 울린 것"이라면서 "여야 간의 합의도 헌신짝처럼 저버린 배신의 정치"라고 비판했다. '배신의 정치'는 박 대통령이 이날 국무회의에서 정치권을 겨냥해 사용한 표현이다. (☞ 관련 기사 : 박근혜, 유승민 겨냥 "배신의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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