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교통사고 구경꾼처럼 기웃거릴 뿐"

[현병철을 보내는 우리의 자세‧①] 인권위, 애완견으로 전락한 감시견

전 세계에 100개가 넘는 나라에 국가인권기구가 있다. 한국은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를 설립했다. 1993년 채택된 파리원칙에 따라 독립적인 기구로서 해당 국가의 인권증진을 도모하고, 권력에 의한 인권침해를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2008년 보수 정권의 등장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권력의 인권침해에 대해 침묵하고 방조하기 시작했다. 이는 무자격 인권위원을 정부·여당이 임명하면서 본격화된다. 2009년 임명되고 2012년 연임된 현병철 위원장의 임기가 오는 8월 12일이면 끝난다. 국가인권기구 간 국제조정위원회(ICC)에서 인권위원 인선절차의 부족 등을 이유로 등급심사가 세 번이나 보류되었지만 정부와 국회는 이를 개선하려는 노력조차 없다. 이러한 현실에서 보수정권 들어서 6년 간 인권위원장을 한 현병철 씨 재임 기간 인권위의 후퇴를 짚어보고자 한다.


세월호 참사는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사건이다. 어떤 이는 단순한 교통사고에 불과하다고 우겨대지만 그날 국가가 차디찬 바다에서 단 한 사람도 구하지 못한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비록 청해진 해운이 민간 기업이라 해도 선박을 증축하고 수하물을 부실하게 묶고 평형수를 기준 이하로 빼버린 행위에 대한 관리‧감독은 분명 국가의 몫이다. 따라서 본분을 망각한 국가를 성토하는 것은 국민의 당연한 권리에 속한다.

건국 이래 최악의 인권침해 사건 앞에서 대한민국 국가인권위원회는 움직이지 않았다. 국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설립된 기관이 중차대한 인권유린을 목도하고도 침묵하는 이율배반의 모습을 보였다. 정상적인 인권위라면 무려 300여 명이 희생된 생명권 침해 사건을 그냥 두고만 보았을까. '국가인권위원회법'에 명시된 직권조사나 긴급구제 권한만으로도 인권위는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 소홀을 얼마든지 파고들 수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인권위 업무 범위를 이미 접수된 진정사건이나 조사하는 경찰서의 청문감사실 수준으로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인권위는 향후 예상되는 인권침해에 대한 적극적 예방활동 권한까지 부여받은 준사법 독립기관이다. 인권위가 2003년 이라크 전쟁에 대한 '파병 반대' 의견을 표명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맥락이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충고처럼 "그런 거 하라고 만든 인권위"다.

▲ 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 ⓒ연합뉴스

변죽도 울리지 못하는 방관

2014년 4월 16일 이후 인권위는 단 한 번도 세월호 참사의 중심에 접근한 적이 없다. 그저 교통사고를 구경하는 승객처럼 사고 현장을 기웃거릴 뿐이었다. 조용히 지내다가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안팎의 질타가 귀에 걸리면 하나 마나 한 목소리로 '물타기'를 시도했다. 그마저도 사건의 본질적 내용은 들춰보지도 않았다. 인권위에서 '인권'이 빠진 '허무개그'는 진정성이나 감동과 거리가 멀었다. (☞관련 기사 : "세월호 이후 인권 침해, 인권위 대체 뭘 했나")

사고 발생 2주일 만에 소수의 인권위 직원들이 팽목항을 다녀왔다. 현장 모니터링을 겸한 1박2일 공무 출장이었으나 사건 조사를 전제로 한 면담은 없었다. 현장 기초조사와 언론에 보도된 관련 자료만으로도 국민의 생명권 침해 사건으로 즉시 조사할 수 있었음에도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인권활동가들이 현장을 오가며 자체적으로 진상조사를 진행하고 일부 언론이 탐사보도를 통해 국가의 책임을 묻는 상황임에도 인권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인권위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처음 입을 연 건 사건 발생 4개월 뒤였다. 지난해 8월 13일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이란 제목으로 위원장 성명을 발표했으나 정작 본문에선 진상규명 의지나 재발방지 방안이 적시되지 않았다. 그저 공자님 말씀처럼 단식 중인 유가족의 건강을 걱정하고 정부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당시 최대 쟁점이었던 세월호 특별법의 기소권과 수사권 부여 문제에 대해서도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았다.

인권위원장 성명서의 '허무개그'는 참사 1주년에도 재연됐다. 정부가 유가족 의사를 고려하지 않고 밀어붙인 시행령이 최대 쟁점이었음에도 인권위는 이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했다. 그저 '대한민국을 안전한 나라로 만들자'는 대통령 담화 수준의 문장을 내밀었다. 아무리 읽어봐도 '인권'의 이름으로 기억할 만한 메시지가 보이지 않은 맹탕 재탕 허무개그에 지나지 않았다.

당시 인권위 내부에선 재난안전시스템에 대한 조사를 촉구하자는 주장이 있었다. 또한 시행령이 특별법의 입법 취지를 훼손하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자는 직원도 있었다. 그러나 정권의 심기를 살피는데 동물적 감각을 가진 위원장과, 그 위원장의 심기를 귀신처럼 살피는 일부 간부들의 사전 정지작업으로 밑바닥 여론은 공식적으로 제기되지 못했다.

인권위의 세월호 침묵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4년 4월 이후 세월호 추모 집회 등과 관련한 진정이 20여 건 접수됐다. 그러나 2015년 5월 현재 인용으로 결정된 진정사건은 단 1건도 없다. 이는 인권위가 2014년 검찰·경찰 등 공권력 관련 진정사건에 대해 권고한 건수가 크게 떨어진 통계와 일맥상통한다. 2014년 검‧경 분야 소위원회 위원장은 자신의 책상 위에 대통령과 찍은 사진을 자랑스레 올려놓은 '친박' 상임위원이었다.

문제의 '친박' 상임위원은 유엔 자유권 규약 정보노트 제출 과정에서도 월권을 행사하며 민감한 인권 이슈를 모두 빼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다. 물론 세월호 사건도 원안에 포함돼 있었으나 그의 지시로 삭제됐다. 그는 인권위 조사관들이 3일간 세월호 1주년 추모 집회를 모니터링하고 경찰의 과잉 대응 문제점 등을 지적한 위원장 성명서 초안에 대해서도 강하게 반대 의견을 밝혀 결국 성명서 발표가 무산된 것으로 알려졌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경찰의 차벽 설치는 2009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배치되는 행위이며, 인권위는 이미 차벽의 문제점에 대해 의견을 내놓은 선례가 있다. 그럼에도 상임위원이 개인 견해를 앞세워 독단적으로 처리하는 행태는 현재의 인권위가 얼마나 허약한 상황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더 큰 문제점은 이 같은 전횡을 견제할 수 있는 의사결정 구조가 인권위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프레시안(손문상)

2001 인권위 VS 2015 조사위

국가권력의 인권침해를 공정하게 조사하기 위한 전제조건은 독립성이다. 권력에 종속된 행정기구로 권력을 감시할 수 없다는 사실은 상식의 영역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국가권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독립성을 훼손하기 위해 몸부림친다. 2001년 국가인권위원회 설립 과정과 2015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이하 조사위) 파동은 그런 측면에서 절묘한 데자뷰다.

2001년 인권위 설립을 앞두고 인권단체 활동가들은 혹한기 단식 노숙 농성을 두 차례 진행했다. 인권위를 법무부 수족으로 묶어두려는 국가권력에 저항한 처절한 투쟁이었다. 인권위 설립 이후엔 행정자치부와 시행령 제정을 두고 치열하게 각을 세웠다. 행정자치부가 인력 증원을 거부할 무렵 초대 인권위원장은 사표를 들고 청와대 관계자와 담판을 벌인 일까지 있었다고 고백했다.

2015년 조사위는 15년 전보다 더 절박한 처지다. 그때는 대통령이 그나마 인권문제에 애착이 있었고 언론 환경도 지금처럼 편파적이진 않았다. 15년 전 인권위 출범에 기여했던 이석태 조사위원장은 최근 광화문 광장에서 대통령 면담 등을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다. 그러나 임명장마저 대통령으로부터 직접 받지 못한 위원장에게 언론은 애써 관심을 돌리며 세월호 불씨를 잠재웠다.

세월호 특별법과 시행령 제정과정을 살펴보면 정부가 과연 세월호 사건을 제대로 조사할 의지가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위원으로 임명된 인사들의 '듣보잡' 발언과 파견 공무원들의 보신주의 처신은 조사위의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유족들과 시민단체가 시행령 통과 직후 곧바로 개정안을 추진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요컨대 지금의 조사위는 고양이에게 맡겨진 생선과 다르지 않다.

조사위는 인권위 추락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자칭 인권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인권위가 이렇게 빨리 무너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인권위는 2008년 촛불집회 결정 이후 치밀하게 진행된 권력의 길들이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급기야 권력을 감시하고 필요할 때 짖어야 하는 '감시견'이 오히려 권력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애완견’으로 전락했다. 2015년 대북 전단 살포가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는 결정과 정부의 비정규직 법안에 시종 침묵한 것이 단적인 예라 할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두고 '하인리히 법칙'을 거론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인리히 법칙이란 1번의 큰 재난이 일어나기 전에 29번의 작은 재난이 발생하고, 그 전에 300번의 사소한 징후들이 나타난다는 가설이다. 많은 이들이 세월호 참사를 '1대29대300'으로 표현되는 하인리히 법칙에서 '1'에 해당할 것으로 여기겠으나,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의 모습은 어쩌면 '1'이 아닌 '29'에 해당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지우기 어렵다.

세월호 참사 국민대책위는 1주년을 계기로 '4·16 존엄과 안전에 관한 인권선언'을 추진하고 있다. 세월호 사건을 '참사'에 가두지 않고 헌법과 국제인권규범에 명시된 인권의 범주로 해석하기 위한 뜻깊은 시도로 읽힌다. 인권의 이름으로 국가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 그것이 바로 세월호 참사가 이 시대에 던지는 준엄한 경고일 것이다. 인권위는 이미 경고를 외면했고, 조사위는 아슬아슬한 벼랑에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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