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모임', 그 나물에 그 밥이 아니려면

[민교협의 정치시평] 이번엔 할 수 있을까?

지난해 말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 새로운 정치 세력 건설을 촉구하는 국민모임'(아래 국민모임)이 새로운 진보정당 창당을 촉구하면서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정동영 전 의원이 자신이 대통령후보까지 지냈던 당을 나와 새로운 진보정당에 참여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분위기를 띠우고 있다. 노동계 쪽에서도 반응을 보이고 노동당의 새 지도부가 진보진영의 통합에 적극적인 나경채씨를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통합진보당 해산 이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진보정당 건설이 구체화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한 정치평론가가 지적했듯이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 뭔가를 해야겠구나 하는 감동도, 뭔가 되겠구나 하는 기대도 없이 수없이 보아 온 것을 다시 한 번 더 본다는 기시감이 강하다. 진보를 민중과 동일시하며 그들을 위해 새로운 정치를 실현하겠다고 소리 높였지만 민중의 삶과는 동떨어진 낡은 구호 속에 갇히거나 ‘혁신’을 핑계되며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어 스스로의 정체성을 허무는 선택을 했던 진보정당의 정치인들, 거의 관성적으로 굵직한 사건 때마다 성명을 발표하고 그 밑에 달린 긴 서명 목록에 이름을 올리는 대학교수들 또한 새롭지 않다. 

겉모습이 새롭지 않다고 해서 내용까지 낡았을 것이라고 섣부르게 판단할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실망을 안겨줄 것이라고 팔짱끼고 논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작금의 한국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진보정당이 절실히 요구되기에 ‘잘해 보라’고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만은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 정권과 새누리당이 이렇게까지 막 나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들의 본성상 민주적이거나 평등주의적인 모습을 보일 가능성은 처음부터 거의 없었다.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또 하나의 ‘새’ 간판을 내걸고 있는 정치세력은 자신들에게 유리할 때만 진보를 자처하는 지극히 기회주의적 세력이며 새누리당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기에 박근혜 정권의 견제 세력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새누리당과 박근혜 정권이 대놓고 내부의 권력다툼을 벌일 정도로 지리멸렬할 것이라고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지도 화나지도 않는다. 그들의 작태를 보면서 슬프고 화가 나고, 울화가 치미는 것은 그들을 비판하고 그들에 맞서 싸워야 하는 진보정당의 모습이 지워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통합진보당이 정권에 맞서 싸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민주노동당’은 한국의 좌파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남아 있기 위해 지켜야할 틀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자주파’는 좌파의 연대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 좌파는 이미 낡은 냉전시대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 ‘자주파’를 견인할 정치력이 없었고 정치 자체를 포기한 채 자멸의 길을 선택했다. 자멸의 두 가지 길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할 기존 정당들을 닮아가는 길과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유리되어 ‘우리만의 진보’를 지켜나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흔히 새누리당을 보수라고 이야기한다. 과연 그럴까? 보수는 민족적 가치와 도덕적 의무를 신봉하는 사람들이다. 보수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처럼 자신들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 가치가 지극히 권위주의적이고 특권적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과연 한국의 기득권 세력이 그런 의미에서서 보수주의라고 불릴 자격이 있을까? 아니다. 그들은 권력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지켜야 할 가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냉전적 사고를 앞세운 극우파집단일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통합진보당을 주도한 사람들이 보수의 기준에 잘 들어맞는다. 민족과 겨레를 앞세우고 제국주의에 맞서 우리 것을 지켜야 한다는 투철한 사명감까지 가졌다. 군사주의적 모험에 반대하는 평화주의가 좌파의 대표적인 주장이 된지가 얼마인데 여전히 북한의 핵무기 보유를 자위권으로 이해하고 거기에다 권력의 3대 세습까지 용인하는 세력을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런 의미에서 새누리당과 통합진보당(그리고 북한)은 냉전이 만들어 놓은 낡은 토대 위에서 공생하는 관계였다. 

그렇다면 좌파를 자인했던 구민주노동당 내 ‘평등파’는 진보정당의 기본틀을 파괴하면서 ‘자주파’를 견제해야 하는 의무를 방기했고 진보정당운동의 후퇴에 대해 책임이 크다. ‘그 사람들은 원래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지는 말자. 진보정당은 곧 통합진보당이고 그들은 종북세력이고, 그래서 진보정당은 안 된다는 권력의 이데올로기적 공세 속에 공격받은 것은 통합진보당이 아니라 진보정당의 가치 그 자체이지 않은가? 

요약하자면 통합진보당의 정권과의 대립과 해산을 진보정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진보운동과는 무관한 저들끼리의 냉전적 대결구도의 산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보자. 한국의 진보정당운동은 왜 이러한 위기 상황으로 내몰렸을까?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좌파 또는 진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상황에 따른 생각의 변화를 매우 빠르게 정당화하지만 기실 변화해야하는 것에 대해서는 편집증적으로 집착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을 매우 좋아하고 혁신을 말하지만 지켜야할 것은 쉽게 버리고 낡아서 폐기해야 하는 것은 붙들고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사례를 이야기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겠다. 지켜야할 것은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 곁가지는 모두 버리는 것. 

본격적인 자본주의가 태동한지 20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 사회를 지탱하는 불평등과 착취는 (아주 짧은 시가 완화된 적은 있지만) 사라진 적이 없다. 하지만 불평등과 착취를 옹호하는 이념과 문화, 제도는 끊임없이 혁신되어 왔다. 그 혁신의 과정은 비판의 목소리를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까지 제기되었던 셀 수 없이 다양한 사회주의적 비판은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흡수되었으며 1960-70년대 경직된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비판하고 다양성과 정체성을 외쳤던 새로운 사회운동은 소비주의적 다양성으로 신자유주의체제로 흡수되었다. 가까이에서도 이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새누리당이 기득권 수호에만 몰두하는 극우파 집단이지만 가장 혁신에 개방적인 것도 그들이다. 지킬 것이 분명하고, 그래서 핵심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것을 보호하고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과감한 것이다. 

진보는 그 반대다. 달리 보면 지배이데올로기와 제도의 혁신은 곧 각 시대의 진보가 새로운 이데올로기를 체계에 주입하는 능동적인 역할을 하게 하면서 그것이 곧 ‘역사의 진보’라고 확신하게 만드는 것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좀 더 냉정하게 말하면 지금의 진보는 기득권세력의 ‘혁신’에 끌려 들어가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허용하는 ‘낡은’ 이념을 마치 새로운 것인 양 착각하고 있다. 모든 이념, 이론, 제도는 포기할 수 없는 중심이 있을 때에만, 그것이 아무리 오래된 것이라도 환영받을 수 있다. 그런데 21세기 진보는 그 중심이 없다. 정당정치는 민주주의를 확장하고 그럼으로써 일상을 정치화하고 대중의 정치적 역량을 제고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는 사회운동과 평범한 시민들의 힘에 의해서 민주화되어야 한다. 또한 시장의 힘은 다양한 제도들을 통해서 사회화되어야 한다. 자본주의가 파생시키고 있는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에 그치지 않고 그것을 대체할 사회적 실천과 제도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 이런 근본적인 이야기를 하면 낡은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예를 들어 사회주의적 비판과 이념은 낡은 것으로 치부되고 협동조합은 새로운 것으로 환영받는다. 물론 협동조합운동은 새로운 진보정치의 일부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중심이 유지될 때에만 그렇다. 사회변혁을 내세웠던 협동조합운동의 무수한 실패는 보지 않고 새로운 무엇인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렇게 본다면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진보정당은 한국의 진보가 직면하고 있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첫째, 스스로의 이념과 운동이 아닌 ‘적’에 대한 비난에서 존립근거를 찾아서는 안 된다. 이명박 정권이 문제고 박근혜 정권이 문제일 뿐이다. 그래서 진보는 항상 그들의 반대쌍일 뿐이다. 도대체 진보의 실체는 무엇인가? 자기들 편할 때만 진보의 가면을 쓰는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로 착각하는 기회주의자들과 어떻게 분립할 것인가? 

국민모임은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외치면서 새정치민주연합과의 차별성을 내세웠다. 정동영은 그 차별성의 상징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정동영이라는 상징이 새로운 진보정당이 스스로의 존립근거를 가지는 쪽으로 나가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다. 여전히 박근혜 정권의 심판이 맨 앞에 놓여 있다. 정권교체가 가장 중요한 과제다. 한국의 진보는 여전히 어디를 행해 가야 하는지, 어디에 발 딛고 서야 하는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그 정도는 이미 다 알고 있는 지식인 명망가들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다 지식인 명망가들이라서,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자기들이 하는 것은 무조건 선이고 그래서 오류일 수 없다는 오만함 때문에 자신들의 발이 땅에서 떨어져 허공을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둘째, 버릴 것과 유지할 것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버릴 것과 유지할 것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재구성’일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혁신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강력한 힘에 굴복하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올바를지 모르지만 실현가능성이 낮다고 말하곤 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안의 ‘보수주의’다. 혹자는 패배와 좌절의 연속이 만들어 낸 패배주의라고 말하고 싶겠지만 패배주의는 일방적 피해자를 자처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능동적으로 현실의 변화가능성을 축소하고 체계가 가진 힘 앞에 굴복하는 것을 숨긴 채 그 힘을 선전하고 있다. 가능한 것,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안주하고 그것에서 위안을 받는다. 200년 전, 100년 전,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언제나 착취 받고 억압받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지만, 그리고 그러한 현실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에 의해 가려지고 혁신된 기제에 의해 통제되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비판해야 하는 진보는 겉으로 드러나는 현실에 매혹되어 상상력의 힘, 비판의 무기를 내려놓는다. 상상력은 환상이 아니다. 지배적 이데올로기에 짓눌려 보이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현혹되는 것을 넘어서는 비판적 사고의 출발일 뿐이다. 

국민모임은 지난 달 신당창당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논의가 가시권에 들어온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방관할 수 없다. 새로운 것이 없다고,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수수방관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1990년대 말, 그리고 2000년대 초반 진보정당운동을 막 시작할 때 가졌던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서 솟구치던 감동과 열정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이번엔 될 수 있을까’라는 의심과 불안감이 앞선다. 

피하지는 말자. 방관하지도 말자. 유명세를 앞세운 명망가들에게 맡겨두지도 말자. 다시 한 번 진보정당 한다고 소란을 떨다가 그나마 존재하는 진보정치의 씨앗을 밟아 버리지 말라는 쓴소리라도 당당하게 하자. 똑같이 사람들과 동떨어진 이념만 먹고 사는 좌파 말고, 진보정치를 바라는 평범한 시민들이 그렇게 해야 한다. 국민모임이 그런 목소리를 수용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민교협의 정치시평] 지난 글 보기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 3,000원
  • 5,000원
  • 10,000원
  • 30,000원
  • 50,000원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국민은행 : 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