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무성의 '무대'에 박근혜는 없다

[주간 프레시안 뷰] '수첩 파동'으로 번진 권력 암투

'풍우동주(風雨同舟)'에 비바람이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풍우동주는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당 대표에 취임하며 던진 일성입니다. 한 배를 타긴 했으되 순탄치 않은 항로가 되리라는 걸 그는 처음부터 잘 알고 있었습니다. 새누리당과 청와대가 집권 2년 동안 즐긴 '한 몸인 듯, 한 몸 아닌, 한 몸 같은' 공동운명체의 '썸 타기'도 이제 유효기간이 끝나가는 듯 보입니다.

일개 청와대 행정관이 집권여당 대표를, 차기 원내대표 물망에 오르는 중진 의원을 손보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김무성 수첩' 파문 얘깁니다. 정윤회 문건 속 '십상시' 중 한 사람인 음종환 행정관이 청와대 문건 유출 사건의 배후로 김 대표와 유승민 의원을 지목하며 "내가 꼭 밝힌다. 두고 봐라"라고 했다는군요. 이 젊은 행정관의 패기는 자정을 넘긴 음습한 술자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대통령이 잠든 사이, 밤의 대통령들은 그렇게 청와대 주변을 호령했나 봅니다.

청와대는 서둘러 그를 면직처리 했습니다. 사실관계를 확인하기도 전에 서둘러 단행한 조치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면직 처리로 끝내도 될 만큼 간단하지 않습니다. '십상시'로 지목돼 정국을 일대 혼란에 빠트린 당사자가 자숙은커녕 '측근' 완장을 차고 다른 쪽에 책임을 뒤집어씌우려 공작을 벌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필 공동운명체 내부의 정치적 반대파들에게 말이죠.

행정관 한 사람의 부적절한 처신으로 보기엔 석연치 않습니다. 문건 유출 파문에 대한 청와대 전반의 인식이 묻어납니다. 박근혜 대통령부터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건 유출 행위를 "어부지리를 노린 이간질"이라고 했습니다. 검찰이 문건 유출 혐의를 받는 사람들의 범죄 동기를 '개인적 입지 구축' 때문이라고 발표한 것과 같은 뜻입니다. 똑같은 얘기인데, 음 행정관은 "줄 대기"라는 질 낮은 표현을 사용했을 뿐이죠. 대통령이나 행정관이나 내부의 배신자로부터 뒤통수를 맞았다는 음모론적 인식입니다. 뒤통수 친 사람들에겐 반드시 앙갚음하고 말겠다는 응징의 서릿발이 '김무성 수첩'에 고스란히 담겼죠.

▲ '김무성 수첩'에 적힌 건 K, Y가 전부였을까? '박근혜 수첩'에는 얼마나 많은 영어 이니셜이 적혀 있을까. 사진은 지난 12일 신년 기자회견하는 박근혜 대통령. ⓒ연합뉴스

잘 알다시피 김 대표와 박근혜 대통령의 관계는 불편합니다. "의리가 없으면 인간도 아니다"라는 어록을 자랑하는 박 대통령에게 김 대표는 '배신'의 낙인이 찍힌 사람입니다. 배신의 연원은 박 대통령의 단점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과 사고의 유연성이 부족하다"고 했던 오래전의 한마디 말 때문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지금은 청와대를 잠재적으로 위협하는 당의 대표이자 차기 대선주자입니다. 최근 개헌론을 둘러싸고 박 대통령과 일합(一合)을 겨루기도 했죠. 지난해 12월 19일 박 대통령이 당선 2주년 기념일을 맞아 중진 의원 7명을 청와대로 부르면서도 당 대표인 김 대표를 초청 대상에서 뺀 장면도 두 사람의 관계를 가늠케 합니다.

유승민 의원도 '친박(親朴)'과 거리가 멀어진 지 오래인 사람입니다. 박 대통령의 당 대표 시절 비서실장을 지낸 그이지만, 도통 숙일 줄 모르는 성격 탓에 눈 밖에 났다고 합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취임 후 '1호 인사'였던 윤창중 대변인 발탁 때 "당장 자진 사퇴하라"고 쏘아붙였습니다. 그의 작심 쓴소리는 얼마 안 가 윤 전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으로 선견지명 반열에 올랐죠. 지난해 국정감사 때는 "청와대 얼라들"이란 표현으로 얼치기 참모진을 공개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이번 수첩 파문은 "청와대 얼라들", 김무성 대표 표현으로는 "청와대 조무래기들"의 반격이었겠지요. 청와대의 박 대통령 측근들에게 집권여당 내의 힘 있는 반대세력은 아마 야당보다 껄끄러웠을 겁니다. 서로 간에 알게 모르게 유통되는 정보의 양과 질이 야당과는 비교가 안 될 테니까요. 대통령과 긴장관계에 있는 김 대표 등은 검증받지 않은 '문고리 권력'들의 농단이 눈에 거슬렸을 테고, '문고리 권력'들은 그런 그들이 야당보다 미웠을 겁니다.

공식 권력과 막후 권력 사이의 암투는 그런 균열적인 토양에서 자라납니다. 국정 수행을 위한 건강한 긴장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이익 추구 과정에서 벌어지는 보이지 않는 이전투구이기에 '암투'라고 하는 겁니다. '십상시’ 등의 국정 농단 의혹이 주로 인사 갈등 문제로 표면화된 이유입니다. 결국 김무성 수첩 파문은 박 대통령과 검찰이 "찌라시"라며 덮고 넘어가려 했던 문건 유출 사건의 본질이 권력 암투에 있다는 점을 재확인해줍니다. 왜 청와대 밥을 먹고 사는 고위 공직자들이 '찌라시'에 나올 법한 사람들 뒷조사를 하고 다녔는지 얼추 이해가 됩니다.

공작과 음해가 판치는 집권세력 내부의 민낯을 보다 보니 조폭 영화의 원조격인 영화 <대부>에 나오는 대사 한마디가 떠오릅니다. "정치와 범죄의 본질은 같아. 다만 정치는 방아쇠를 언제 당기는지 아는 것이지." 범죄세력과 결탁한 어느 정치인이 마피아에게 한수 위를 자랑하며 한 말입니다. 청와대 행정관의 어설픈 격발은 조폭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 자해로 끝났지만, 이로부터 촉발된 당청 갈등이 어떤 후폭풍을 몰고 올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특히 야당과의 싸움, 즉 선거가 없는 올해는 집권세력 내부 갈등이 심심치 않게 표출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청와대는 잠시 숨 고르기를 할 겁니다. 김영한 전 민정수석의 항명성 사퇴 파문 나흘 만에 음종환 행정관이 '수첩 파동'으로 물의를 빚고 물러난 만큼 청와대 기강 해이에 쏠린 시선이 부담스러운 눈치입니다. 문건 파동이 수첩 파동으로 번지자 당혹감도 역력합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청와대 회의에서 처신에 신중할 것을 주문했다는군요. 그러나 조폭 세계에나 있을 법한 '의리'로 적과 우군을 가르는 패밀리 문화가 쉽게 바뀌지 않을 겁니다. 박 대통령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불통 비판을 무릅쓰면서까지 '문고리 3인방'을 감싸고 돈 게 이를 방증합니다. 김기춘 실장에 대해선 "드물게 사심 없는 분"이라고 평가했더군요.

박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밝힌 청와대 조직개편 방향이 신뢰를 주지 못하는 이유도 패밀리 정서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종 인사권자인 박 대통령이 반대파와 공존하는 협치(協治)에 대한 개념이 빈약한데, 어떻게 "우리가 남이가!"라는 의리 정신으로 똘똘 뭉친 김 실장을 쉽게 내칠 수 있었겠습니까. 박 대통령은 현안이 마무리 된뒤에 결정하겠다며 김 실장 거취 문제를 미뤄뒀지만, 벌써부터 '김기춘' 이후의 청와대를 책임질 만한 대안 찾기가 쉽지 않다는 소리가 들립니다.

청와대 쇄신 방안으로 제시한 특보단 구성도 현 청와대 참모진 돌려막기이거나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강한 인사들로 채워 넣을 조짐입니다. 새누리당 권력 지형의 변화가 걸린 원내대표 선거에는 유승민 의원의 맞수로, 얼마 전 해양수산부 장관직에서 물러난 이주영 의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런 친위 체제는 박근혜 정치의 변치 않는 속성이기도 하거니와 임기 중반으로 접어든 권력자들의 공통적인 모습이기도 합니다.

ⓒ프레시안(손문상)

박 대통령의 '패밀리 정치'를 상수로 본다면, 관심은 새누리당이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지에 맞춰집니다. 당청 갈등을 '강 건너 불구경' 하고 말 게 아니라면, 야당과 더불어 여당이 대통령에 대한 견제력을 확보하느냐는 적어도 정당정치의 정상적인 작동에 있어 관건이기 때문입니다.

당장은 청와대를 향한 공격의 앞자리에 이재오 의원 등 친박과 다른 계파 세력이 앞장선 모양새입니다. 이 의원과 친박 핵심인 이정현 의원이 공개석상에서 박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을 둘러싸고 언쟁을 벌인 일도 있었죠. 하지만 진짜 갈등은 지금 당권을 쥐고 있는 김무성 대표가 자신이 공언한 "수평적인 당청관계"를 어떤 식으로 구축해 갈 것이냐에 따라 수위가 달라집니다.

김 대표는 대표 취임 후 단 한 번도 박 대통령과 독대하지 못했고, 김기춘 비서실장과는 전화 통화도 수월치 못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개헌론 충돌 때는 청와대 호통에 하루 만에 꼬리를 내려 체면을 구겼던 일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에게 대들었던 사람'이라는 이유로, 박세일 전 의원을 여의도연구소장에 앉히려는 계획에 애를 먹고 있습니다. '무대(무성대장)'라는 별명처럼 화통한 성격의 김 대표가 일개 행정관으로부터 음해를 당하는 수모를 겪고도 속으로만 분을 삭이는 까닭은 당 운영이 개인적인 정치 전망과 무관치 않기 때문입니다. 차기 대선을 생각하면 지금 당장 박 대통령과 ‘맞장’을 뜨는 모험을 감행하기 두려운 거죠.

김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의 딜레마가 여기서 발생합니다. 박근혜라는 자산으로 10년을 먹고 살다 보니, 박 대통령의 콘크리트 같은 30퍼센트(%) 지지율과 맞설 재간이 없어진 겁니다. 김 대표뿐만 아니라 여권의 차기 주자 누구도 이 30% 지지율을 흡수하지 못하면 대선 프로젝트의 성공을 장담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여당 내 야당'을 구축한 뒤 힘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견제했던 박근혜 성공 모델은 더 이상 새누리당에서 반복되지 않을 거란 얘깁니다.

결코 박근혜 패밀리가 될 수 없는 김 대표에겐 이런 상황이 누구보다 곤혹스러울 겁니다. 하지만 김 대표도 이제 선택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개헌론 같은 우회로가 과연 새누리당과 자신이 사는 길인지, 아니면 '박근혜'를 뛰어넘는 보수의 새로운 비전을 내놓는 길이 현명한지 말입니다. 집권여당 대표의 신년 기자회견에 '수첩'만 동동 떠다닌 현실을 직시해야 할 겁니다. 현재 권력에 맞선 차기 권력이 실패한 사례는 수두룩하지만, 현재 권력에 순응해서 성공한 차기 권력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점을 김 대표가 참고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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