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아닌 '법조 지배체제'

[시민정치시평] 통합진보당 해산 판결이 보여주는 한국 사회

한국 사회는 메리토크라시(meritocracy), 곧 '능력자 지배체제' 사회다.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 부와 권력과 명예를 독차지하는 사회다. 조선 시대에는 '과거 시험'을 통해 벼슬이 분배되었는데,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능력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는 학업 성적이나 학력에 따라 부와 권력과 명예가 분배되고 있다. 최소한 우리 사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 사회가 그런 사회라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런 분배가 정의롭다고 여긴다.

메리토크라시의 정의로움에 대한 이러한 대중들의 믿음은 우리 사회의 삶의 많은 모습들을 이해하기 위한 아주 중요한 열쇠다. 무엇보다도 사교육 광풍을 동반한 입시위주의 교육 같은 데서 그러한 생활 이데올로기가 가장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기는 하지만, 그 이데올로기는 능력에 따라 생겨나는 시민들 사이의 사회경제적 불평등, 심지어 정치적 불평등마저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함으로써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형해화하기도 한다.

한국 사회의 이 메리토크라시의 한 정점에는 이른바 '법조인'이 있다. 혹독한 경쟁을 통과한 아주 머리가 좋고 공부를 잘한 사람들만이 이 직업군에 들 수 있다고 여겨진다. 덕분인지 이들은 대개 다른 시민들에 비해 경제적으로도 윤택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막강한 사회적, 정치적 권력을 누린다. 우리 사회의 권력 기관들을 실제로 움직이는 현직 판검사들이나 전관예우를 받는 변호사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국회의원이나 장차관 등은 물론 대기업의 많은 요직조차 그 법조인 출신들이 장악하고서 위세를 부린다. 그래서 한국 사회는 '주리스토크라시(juristocracy)', 곧 '법조(인) 지배체제' 사회다.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다. 이 체제에서 시민들 사이의 민주적 평등은 한낱 교과서 속 이야기일 뿐이다. 스스로를 봉건색 찬란하게도 법조인이라고 부르는 이들은 때로 시민 사회의 건강한 민주적 이성을 조롱하면서 아주 간단하게 민주적 대의 과정이나 절차를 뛰어넘어 지배를 행사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사회의 초(超) 엘리트인 자신들의 정당한 권리인 듯 여긴다.

우리 사회의 이 주리스토크라시는 단순히 근대 사회 일반에서 법이 중요한 역할을 하고 그래서 법을 다루는 사람들이 각광을 받기 때문에 생긴 결과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막스 베버는 서구의 근대에서 법률가들이 가장 강력한 직업 정치가 후보군에 속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근대 민주주의 정치가 필요로 하는 "말과 글의 효과를 신중히 저울질 하는" 능력을 직업적으로 아주 잘 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치밀하고 정확한 논증 능력 같은 것이 그런 능력일 텐데, 우리 사회의 법조인들이 보인 능력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수도 이전 문제도 왕조 국가 조선의 '경국대전'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고 했던 헌법재판소의 그 유명한 '관습 헌법' 판결을 생각해 보라. 곽노현 전 서울시 교육감을 '둥근 사각형'이 있을 수 있다는 식의 형용모순적 '사후 매수죄'라는 죄목으로 감옥에 가게 한 대법원의 판결은 또 어떤가. 모두 억지 춘향식 잡설이다. 이번에 통합진보당을 해산시키겠다고 나선 공안 세력의 기소나 그를 그대로 인용한 헌법재판소의 판결도 마찬가지다.

▲통합진보당 해산 선고가 난 지난 19일 헌법재판소 앞 풍경. ⓒ프레시안(최형락)

이석기 류를 당 전체와 간단히 동일시하고, 이 당이 북한식 사회주의를 폭력적으로 추구한다며 그 어떤 객관적 증거도 없는 편견으로 가득한 예단을 앞세우는가 하면, 당내에서의 비민주적 폭력 행사 같은 것을 우리나라의 민주적 기본 질서에 대한 폭력적 전복의 시도와 연결시키는 범주 오류도 서슴지 않는다. 아무도 헌법재판관들에게 입법 행위를 하라고 허락해 준 적이 없는데, 아무런 법적 근거도 없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국회의원들의 직을 자기들 마음대로 박탈했다. 이 나라의 주리스토크라시적 본성과 수준을 여지없이 드러낸 것이다.

무려 '방어적 민주주의'라는 명분을 앞세웠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일정한 절대적 가치를 전제한 위에서 민주주의를 민주주의의 적들로부터 보호하자는 개념이다(지난해 이맘 때 쯤 나는 이 '시민정치시평' 코너에서 이번 사건에 이 개념이 얼마나 도착적으로 동원된 것인지를 논의한 적이 있다. (관련기사 보기 :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신다고요?")

민주주의의 절대적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무엇보다도 사상과 표현의 자유, 다른 생각에 대한 포용과 관용을 그 핵심으로 한다. 헌법재판소는 바로 그 가치를 조롱했다. 그리고 그럼으로써 박근혜 대통령이 이번 판결을 통해 지켜졌다고 평가한 정확히 바로 그 '자유 민주주의'를 부정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최소한, 단적으로 파시즘 체제라고는 할 수 없어도 온전한 민주주의 체제라고는 더 더욱 말하기 힘든 저 푸틴의 러시아나 오르반의 헝가리나 에르도얀의 터키 같은, '비-자유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 국가의 반열에 들어섰다.

통합진보당은 어차피 정치적으로 파산할 것이었다. 그 당의 정치는 다음 선거에서 민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었고, 한국 진보 정치 전체는 통합진보당이라는 부정적인 역사적 유산을 어떤 식으로든 받아 안아 처리해내야 하는 정치적 과제를 수행해 나가야 할 터였다. 그러나 그 당에 대한 이런 식의 사법적 해산은 결국 일정한 정치적 목적에 따른 고도의 정치적 행위일 뿐이다. 그것은 한국 민주 진보 진영 전체를 '종북'의 덫에 빠트린 채 끊임없이 그 종북의 척결을 지금과 같은 과두 특권 독점 체제의 강퍅한 옹호를 위한 명분으로 삼는 비열한 정치만 춤추게 할 것이다. 이제 이 땅에서는 사회적 정의와 사회적 약자의 이해관계에 대한 진보 정치적 대의는 거의 불가능하게 생겼다.

다른 민주 국가들에서도 '정치의 사법화'나 '사법의 정치화' 현상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현대 복잡 사회의 모든 발전 과정이 언제나 적절하게 민주적 법치를 통해 통제되고 관리될 수 없어서 생기는 불가피한 현상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처럼 툭하면 검찰이 권력의 시녀가 되어 정치를 대신하고 국회는 국회대로 스스로의 일을 법원으로 가져가는가 하면, 민주적으로 선출되지도 위임받지도 않은 판사들이 숱한 '판결 입법'을 제 멋대로 해대면서 민주공화국임을 참칭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싶다. 그것도 대학생들의 낙제 논술문 정도에서나 볼 법한 엉터리 논변을 제시하면서 말이다.

모든 민주주의 국가는 법치국가다. 여기서는 법이, 단지 법만이 지배한다(rule of law). 그러나 모든 법치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인 것은 아니다. 한국식 법치국가, 곧 주리스토크라시는 우리 사회의 과두 특권 세력이 사법부만이 아니라 입법부와 행정부를 포괄하여 넓은 의미의 법률 전문가들을 핵심 에이전트로 삼아 법이라는 수단을 통해 지배하는(rule by law) 억압체제일 뿐이다. 여기서는 법치를 정당하게 만들 기본적인 소통적 합리성이나 정의는 기껏해야 장식일 뿐이다. 이런 체제는 그냥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 곧 '도적(盜賊) 지배체제'라 해야 옳다.

법이 총칼을 대신하여 무도한 억압의 무기로 쓰이는 세상이 되었다. 피를 흘리지 않는다고 우리의 클렙토크라시적 주리스토크라시가 군사 독재 체제보다 더 문명적이라고 말할 것인가. 서양어에서 법과 정의는 같은 어근을 가졌다. 동양에서도 법은 정의와 다른 뜻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법은 정의의 가장 타락한 모습, 아니 정의의 안티테제로만 살아 있다.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치가 떨린다. 정말이지 이 나라 국민이라는 게 부끄럽다.

※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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