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의 '야반도주' 1년, 오체투지 나선 기륭 해고자들

[현장] 다시 거리에 선 기륭 해고자 …"이제 정부와 싸울 것"

지난 밤 쌓인 눈이 채 녹지도 않은 빙판길 위, 얇은 소복을 입은 이들이 손과 무릎, 가슴과 이마를 차례로 바닥에 댄다. 10m도 나아가기 전에 흰 옷은 온통 눈과 진흙으로 젖었다. 스무 걸음쯤 떼자 벌써 거친 숨을 몰아쉰다. 오체투지를 알리는 북소리에 빙판길 위를 종종 걸음으로 걷던 시민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 보다가, 이내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이 22일 다시 거리에 섰다. 1년 가까이 지켜오던 농성장도 정리했다. 회사가 '야반도주'한 지 어느덧 358일. 텅 빈 사무실을 농성장 삼아 대답없는 회사를 상대로 싸움을 계속해 왔지만, 이제 다시 길거리 위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옆에서 해고자들의 오체투지를 지켜보는 이들의 눈이 빨개졌다.

▲기륭전자 해고노동자들이 22일 '비정규직 철폐'를 요구하는 오체투지를 시작했다. 오체투지 행지는 청와대까지 4박5일간 이어진다. ⓒ프레시안(선명수)

노동부와 검찰에서 불법파견 판정을 받아도,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는 국회에서 노사 합의를 이뤄도, '배 째라'는 회사 앞에 해고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2005년 사측의 '문자 해고'에 반발해 싸움을 시작한 기륭전자 해고자들은 1895일간의 농성 끝에 지난 2010년 회사와 정규직 고용에 합의했지만, '복직의 꿈'도 오래가지 못했다.

회사는 해고자들이 복직하자 업무도, 월급도 주지 않는 '유령 취급'을 하더니, 급기야 지난해 말 모두가 퇴근한 틈을 타 사무실을 이전하는 '야반도주'까지 감행했다. 1000억 원대 자본의 회사는 6000만 원 짜리 페이퍼 컴퍼니(유령회사)가 됐고, 해고자들은 복직 이후 아예 돌아갈 일터가 없는 상황으로 몰렸다.

법원 판결까지 '무시'로 일관하는 기업…거리로 몰리는 노동자들

단순히 기륭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사 합의를 이뤄도, 심지어는 법원에서 해고 무효 판결을 받아도 '무시'로 일관하는 기업 앞에 해고 노동자들이 자꾸만 극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콜트악기 노동자들은 지난 2012년 대법원에서 해고 무효 최종 판결을 받고서도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다. 회사는 판결을 무시했고, 해고자들이 다시 행정소송을 진행하자 아예 공장을 없애고 악기제조업에서 부동산 임대업으로 업종을 바꿨다. 결국 서울행정법원은 "회사가 없어졌기 때문에 근로계약관계가 끝났다고 봐야한다"며 해고자들의 청구를 기각했다.

국내 최대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제조업체인 스타케미칼에서 해고된 노동자들도 200일 넘게 '메아리 없는' 굴뚝 농성을 벌이고 있다. 스타케미칼 해고자들은 기륭전자 해고자들과 비슷한 시기 노사 합의를 이뤄 공장에 돌아갔지만, 1년6개월 만에 또 다시 해고돼 농성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돌아갈 일터가 없다. 회사는 지난해 1월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아예 폐업을 했다.

대기업의 불법파견 관행에 첫 제동을 건 판결로 기록되는 대법원의 2010년 현대자동차 불법파견 판결도, 4년이 넘도록 판결문 밖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시 대법원은 사내하청 해고자 최병승 씨가 낸 근로자 지위 확인소송에서 "사용자는 파견업체가 아닌 현대차"라고 인정했지만, 현대차는 시간만 질질 끌다 판결 3년이 지나서야 최 씨 한 명만 정규직으로 발령을 냈다. 지난 9월엔 서울중앙지법에서 사내하청 노동자 1247명의 불법파견 역시 인정됐지만, 회사는 정규직으로 전환하기는커녕 수십억 원대의 손해배상 청구로 노동자들을 압박하는 실정이다.

"서럽게도 처지와 조건이 다르지 않습니다".

기륭전자 해고 노동자들이 텅 빈 회사를 뒤로 하고 거리로 나선 이유다. 불안정 노동과 해고의 문제는 기륭 한 곳의 문제만은 아니기에, 비정규직 법·제도의 폐기를 요구하는 '사회적 투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10년 가까이 회사를 상대로 "죽는 것 빼고 다 해본" 싸움이었지만, 어느 것 하나 해결하지 못한 절망과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들이다. 그래서 "단위 사업장 투쟁이 아닌, '제도 개선 투쟁'에 나서겠다는 것"이다.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조합원들은 이날 오체투지 행진에 앞서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빈곤의 뿌리, 차별과 설움의 원흉인 비정규직 자체를 없애야 한다"며 "오체투지는 '가만히 있지 말자'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마음을 전하는 행진"이라고 했다.

아울러 박근혜 정부를 향해 "현재 비정규직으로 고통받고 있는 이들이 넘쳐나는데도 박근혜 정부는 비정규직 대책을 세운다면서 기간제 사용 기간 연장과 파견업종 확대, 직업소개소 대형화를 하겠다고 한다"며 "정규직 고용이 경직돼 있다며 정리해고를 손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결국 전체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하향 평준화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프레시안(선명수)

ⓒ프레시안(선명수)

발언자로 나선 송경동 시인은 "이제 기륭만의 투쟁이 아니라 모두의 투쟁"이라며 "우리의 교섭 상대는 기륭 최동렬 회장이 아니라 900만 비정규직의 피눈물을 쏟게 한 정부와 국회"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의 오체투지는 이날부터 26일까지 5일간 이뤄진다. 신대방동 기륭전자 농성장 앞에서 출발해 국회를 거쳐 청와대까지 이어지는 여정이다. 오체투지 기간 동안엔 교직원공제회 콜센터, 학교비정규직 및 비정규직 교수들의 농성장, LG유플러스와 씨앤앰 해고자들의 농성장 등을 방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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