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한때 내가 과욕…국민들께 미안하다"

[인터뷰] "개헌 논의 자연스러워…내각제로 가야"

"박근혜 정부가 이런 식으로 임기 말까지 갈 것이다."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이 한 언론과 한 최근 인터뷰가 제법 회자가 됐다. 1년 여전만 해도 박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의지를 믿는다"고 했던 그다. 지난해 5월 김 전 수석은 야당 국회의원 공부모임인 '혁신과 정의의 나라 포럼' 기조 연설에서 "박 대통령의 장점은 신뢰와 정직성이기에 임기 내에 경제민주화를 실현하리란 걸 의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랬던 그가 지난해 말 끝내 새누리당을 탈당했다. 박 대통령을 선거 승리로 이끈 경제민주화 공약을 '밑그림'한 그의 탈당은 경제민주화의 침몰에 일종의 쐐기를 박은 듯했다. 집권과 동시에 자취를 감춘 경제민주화는 '창조 경제'라는 알쏭달쏭한 새 슬로건에 순식간에 밀려났다. 그리고 이제, 박근혜 대통령은 더는 경제민주화를 말하지 않는다. 최경환 경제부총리 주도의 위험천만한 부양책만이 '경기 활성화 정책'으로 선전되고 있다.

박근혜 정부 20개월. 대통령 임기 3분의 1이 지난 시점에 김 전 수석을 만나봤다.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하던 김 전 수석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곤 "국민들에게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 임기 중 반드시 경제민주화가 가능할 거라 했던 과거의 발언에 대해 그는 "내가 너무 과욕을 부렸다"고도 했다. 개인적인 회한 이상의 실망감이 짙게 묻어났다. 그러면서 현 정부 임기 중엔 증세를 통한 복지나 경제민주화 모두 "물 건너갔다"고 말했다.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하지 않겠다'는 최 부총리의 말과 달리, 효과도 없는 부양책에 정부부채와 가계부채만 한없이 키우는 정책에도 강한 우려를 표했다.

개헌 논의에 대해서도 그는 입을 열었다. 제왕적 대통령제의 실패를 30년가량 겪은 만큼, 권력구조의 변화를 만드는 개헌은 당위적으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숙의형 정치, 합의를 중시하는 민주주의로의 발전을 위해 '내각제'로의 변화가 바람직하다고도 했다. 인터뷰는 17일 서울 광화문 김 전 수석의 사무실에서 박인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의 사회로 진행됐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편집자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최형락)

'나를 따르라'식의 정치는 끝났다

프레시안 :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의 발언으로 개헌 논의에 다시금 불이 붙었다. 2009년 국회 헌법자문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어떻게 보고 있나.

김종인 : 개헌 논의는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물론 대통령만 잘 만나면 대통령제가 효율적이고 좋을 수 있다. 그런데 대통령을 잘 만나기가 참 어렵다. 직선제 30년에 어느 대통령 하나 성공한 예가 없으니 정치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법하다.

지금까지 보면 항상 대통령 임기 2년 정도 되면 레임덕에 시달렸다. 지지층도 다 날아가 버리고 3년째 되면 뭘 하려고 해도 지지를 못 받으니 할 수가 없게 된다. 대통령제 안에선 임기 초반 1년 반 안에 확고한 무엇이 보이지 않으면 임기 내내 그럭저럭 가게 된다.

게다가 대통령제에선 누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리더로서 별로 능력이 없어도 헌법적인 권한을 가지고 5년 동안 해먹을 수 있는 거 아닌가. 캠프에 있었던 사람들에게 자리 나누어주며 5년이 가는 것이다. 그런데 내각제에서 총리는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면 계속하기 어렵다. 이러니 대통령을 하고 싶은 사람은 절대로 개헌을 반대하는 것이다.

프레시안 : 개헌 논의는 무성하지만 각자 얘기하는 방향은 다 다르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는 최근 "중립지대를 허용해 연정으로 가는 게 사회를 안정시킬 수 있다"며 오스트리아의 이원집정부제를 언급했다.

김종인 : 이원집정부제를 제대로 하는 나라가 사실 없다. 오스트리아 얘기하는데, 거긴 대통령은 국민이 뽑고 총리는 의회에서 뽑는다. 대통령 권한이 아무것도 없다. 사실상의 내각제다. 프랑스 또한 이원집정부제와 거리가 멀다. 대통령이 황제 같은 나라다. 여당이 다수당을 차지하지 못할 때에야 야당이 내각을 맡게 되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제는 지난 2010년 대통령 임기를 7년에서 5년으로 조정함으로써 그조차도 어려워졌다.

결국은 내각제로 가는 수밖에 없다. 전 세계적으로 정치 체제가 가장 안정적인 곳이 내각제를 채택하고 있는 독일이다. 1949년 연방공화제를 수립한 후 계속 연정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내각제로 가야 한국 정치가 안정적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겠나. 내년을 넘기더라도 2016년 새 국회에서도 개헌을 얘기할 시간은 충분하다. 대통령 임기가 1년 반 정도 남아 있는 때이고, 동시에 그만두는 입장이니 대통령으로서도 개헌 논의에 거부감을 많이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 박근혜 대통령과 최경환 경제부총리과 대화를 나누며 걷고 있다. ⓒ연합뉴스
프레시안 :
독일 모델을 많이 거론했다. 박근혜 대통령에게 앙겔라 메르켈을 벤치마킹하라고도 했었는데, 지금은 어떤가.

김종인 : 내가 메르켈을 벤치마킹하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성격이 전혀 달라 어려울 것이다. 한국 사람들이 강한 걸 좋아해서 그런지 자꾸 대처 얘기를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나를 따르라' 식의 정치는 시대착오적이 되고 있다. 지금이 어떤 때인가. 글로벌 인터넷 혁명 시대다. 경청하고 타협하는 게 답인 시대다. 남의 얘기도 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메르켈의 리더십이 각광받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어느 순간 결정하는 능력이 대단한 사람이다. 세계 지도자 중 원전을 일거에 없앤 유일한 사람 아닌가. 자기가 물리학자인데도 몇백만 분의 1의 확률이라도 사고가 나면 그다음엔 방법이 없다며 원자력 발전을 안 하겠다고 했다. 나라를 끌고 가는 사람의 리더십이란 건 이처럼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다. 그러니 집권한 지 10년이 되어 가는데도 메르켈은 여전히 70%에 육박하는 높은 지지율을 자랑한다.

야수 풀어놓으면 안돼…'룰' 정하면 따라야

프레시안 : 경제민주화에 있어서만은 대통령의 강한 의지와 리더십을 강조했는데, 오히려 그 부분에선 의욕을 상실한 것 같다.

김종인 : 지금 대한민국 경제를 소생시키려면 경제민주화를 안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경제민주화는 최고 통치자의 확고한 의지에 달려 있다.

흔히들 미국이 자유 시장경제라 정부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생각하지만, 미국은 19세기 말에 여러 문제가 생기니 50~60년에 거쳐서 사회 구조 전반을 재조정했다. 이게 지금 미국을 세계적 국가로 만든 것이다. 독일도 마찬가지다. 통일 직후엔 여건이 어려워 구조조정을 할 수 없었지만 경제가 계속 취약해지니 2000년대 맞아 노동시장의 경직성 등 많은 걸 변화시키며 경제를 살려냈다. 여기서 역시 주목되는 것 역시 독일 사회가 오랜 기간 축적한 신뢰와 조화를 이루는 능력이다. 그 덕에 독일은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커다란 사회적인 동요가 없었다.

한편 한국과 일본은 2차 대전 이후 경제 발전에 도취돼 한 번의 구조조정도 안 거친 유일한 나라들이다. 우리는 1960년대 초반 산업화를 시작한 후 1987년 민주화를 했고, 그 후 25년이 지났는데도 경제 구조가 그대로다. 일본 또한 아직도 구조 문제에 관심이 없고 잘 되면 '니혼진(일본인) 정신'으로만 설명한다.

그 결과 어떻게 됐나. 재계가 경제에 힘을 꽉 잡았다. 보이지 않는 가장 큰 세력이 재계이고 이들이 관료와 정치를 좌지우지한다. 재계 이익에 반하는 건 하려야 할 수가 없다. 한편, 독일은 연방국 초대 경제 장관이자 철저한 시장경제 신봉자였던 루트비히 에르하르트가 독과점을 절대적으로 배격하며 콘체른(재벌)이 형성될 수 없게끔 했다. 지금 보면 이렇다 할 큰 기업이 없는 것 같지만 나라는 정상적으로 잘 운영되고 있다.

여기서 비교가 된다. 독일 정부부채가 통일 직전 GDP 대비 42%였다가 통일 후 20여 년 지나니 22%포인트가량 늘었다. 그런데 일본 정부부채는 1989년 GDP 대비 71%에서 최근에는 250% 가까이 가고 있다. 뭘 잘 모르는 사람들이 일본 경기가 1분기에 반짝한 걸 두고 아베노믹스의 성공을 말하고, 2분기에 형편없이 내려앉은 걸 두고 소비세를 도입해서 그런 거라고 얘기하는데 이렇게 분석하면 안 된다. 1분기 '반짝'은 증세를 앞두고 사전 구매가 몰려 생긴 착시 현상일 뿐, 일본은 소비세를 도입 안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결국은 경제 운용 시스템을 어떻게 할 거냐의 문제다.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동일시하면 안 된다.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만 얘기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손과 보이지 않는 손이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한 것이다. 자본가에겐 기본적으로 야수 같은 기질이 있는데, 이들이 멋대로 아무나 잡아먹히게 내버려두면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이 되겠나. 그래서 경제민주화를 하자고 했던 것이다. 어떤 룰(규칙)을 정하면 룰을 따르라는 것이다.

잃어버린 20년 만든 일본과 꼭 닮은 최경환 경제정책

프레시안 : 최근의 경제 상황과 최경환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정책은 어떻게 보고 있나.

김종인 : 최 부총리가 말로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답습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딱 일본처럼 하고 있다. 일본이란 나라가 어디서부터 취약한 점이 드러났는가. 1985년도 프라자 협정 이후에 환율이 절상되니 일본 수출 기업의 수익이 뚝 떨어졌다. 그러자 기업을 도와주려고 금리를 인하했다. 이는 곧 재태크 바람을 불러 부동산 가격이 뛰고 주가가 뛰었다. 거기에 일본 사람들이 황홀감에 빠졌다.

경제 여건, 그러니까 국내 수요를 떨어뜨리는 저출산 고령화 문제나 완제품 조립 대기업들의 경쟁력 하락 문제들도 일본과 똑 닮았는데, 이런 구조적인 문제로 상황이 나빠지니 '이까짓 것 경제 부양 정책 쓰면 금방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도 똑같다. 일본이 그렇게 해서 어떻게 됐나. 매년 1000억 달러씩 10년 동안 1조 달러를 경기 부양 자금으로 쓰고 경기는 살아나지 않았다. 종국엔 빚만 잔뜩 늘어났다.

우리의 경제 상황을 분명하게 진단해서 중장기적으로 어떻게 살 거냐 등 대비해야 할 게 정말 많다. 일본 아베노믹스도 보아하니 성공하긴 틀렸다. 아베노믹스가 실패하면 엔화 가치가 엄청나게 내려갈 것이다. 그때 경쟁 관계에 있는 우리 상품이 국제 시장에서 어떤 상황에 부닥칠 것이냐, 이런 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우리의 주요 산업인 조선업, 중공업, 석유 화학, 철강, 건설, 전부 취약한 분야가 되어가고 상황에서, 어떤 혁신으로 이들 산업의 경쟁력을 제고할 거냐, 이런 분야에서 노력해야 한다. 막연히 금리 내려주고 경기 부양한다고 되겠나. 그래 봐야 단기적으로 볏짚 태우는 것처럼 부르르 탔다가 꺼져버리는 것이지 효과가 없다. 경제 상황이 이럴 때일수록 경제민주화가 중요하다.

▲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 ⓒ프레시안(최형락)

내가 과욕을 부렸나…국민에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

프레시안 : 그러나 더는 경제민주화가 언급도 안 되고 있다. 시도라도 좀 하다 포기한 것도 아니고 박 대통령 당선과 함께 주요 구호에서 아예 사라졌다. 이유는 뭐라고 보나. 대선 때 박 대통령이 가진 경제민주화의 의지만큼은 높게 평가하지 않았나.

김종인 : 그땐 그 의지를 확실하게 믿었다. 그러나 어쩌겠나. 사람 속을 속까지 들여다볼 순 없으니. 일단 대통령이 경제민주화의 필요성을 잘 몰랐던 거 같고, 둘째로 주변 사람들이 너무 비판적이니 어려웠을 거라고 본다. 선거 때도 주변에서 자문하는 이들 상당수가 경제민주화에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아직 임기가 3분의 2 정도 남았지만 경제민주화를 이 정부가 더는 거론 안 할 거라고 본다. 복지 확대를 위한 증세도 이미 틀렸다. 복지 확대를 약속한 만큼, 집권과 동시에 세제 개편에 대한 고민을 해야 했다. 국민도 다 안다, 증세 없이는 복지가 안 된다는 것을. 그런 분위기가 조성됐을 때 1년 정도에 걸쳐 세제를 검토하고 올해 정기국회에선 세제 개혁을 해야 했었는데 이미 물 건너갔다.

남의 나라(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뻔히 보면서 우리가 다시 그걸 반복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불쌍한 거 같다. 했으면 좋았을 텐데, 애석하지만 어떻게 하겠나. 앞으로는 더는 누구 자문도 안 하겠단 결심을 했다. 한때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린 모양이다. 국민들에게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내가 너무 될 수 있는 것처럼 얘기했다.

프레시안 : 그런 박근혜 대통령이 연초부터 '통일 대박’을 밀고 있다. 통일과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다.

김종인 : 지금 박 대통령의 '통일 대박’은 하나의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하다. 물론 남한보다 더 큰 땅덩어리가 생기고 남한 인구의 반쯤 되는 인구를 얻는 면에선 대박이라면 대박이다. 예전 같으면 전쟁하지 않으면 절대 못 얻는 것이니 말이다.

그러나 돈 들어가는 거 생각하면…. 통일은 계획을 세워서 되는 게 아니다. 독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역사적 순간이 오면 하게 돼 있고, 그 통일에는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조화되지 않은 사회에서 우리 경제 능력으로 갑자기 통일 기회가 주어진다면 과연 우리가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을까.

가장 좋은 통일 준비는 경제력을 가능한 극대화하고 사회적인 조화를 빨리 달성하는 것이다. 그것이 통일을 위한 가장 큰 준비라고 생각한다. 지금처럼 조금만 북한에 원조하면 '퍼주기 한다'고 난리 치는 사회에서 통일이 되겠나. 통일이건 경제건 사회적 컨세선스를 이루는 게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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