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민교협의 정치시평] 누가 진정한 경제민주화를 방해하나

이론과는 달리, 현실에서 신자유주의는 시장의 극대화, 국가의 후퇴가 아니라 국가가 친시장적이고 친자본적인 성격을 강화한 것일 뿐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순수한 이론 논쟁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 하고 있다. 또한 한국사회의 문제들은 신자유주의와 무관하거나 혹은 그 이전부터 구조화된 측면이 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를 만물상자처럼 여기고 있는 분위기도 만연해 있다. 

이러한 답답한 지식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10여 년이 넘도록 지루하게 이어져 온 일부 한국 경제학자들 간의 재벌과 해외 금융자본 관련 논쟁 여기 최근 이와 연관된 학자들의 여러 책들이 출간되면서 다시 점화되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불거졌던 대선 이전의 경제민주화와 복지국가 논쟁 국면들은 정치적 민주주의조차 위기를 맞으며 이미 사라져 버린 듯하지만, 이와 연관된 대안적 정치세력에 대한 논의만큼이나 매우 중요한 논의임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진전이 없다.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비중심부 국가들에서는 중심부 국가에서보다 한층 더 정권 교체를 무색케 하고, 정당 정치를 마비시키는 거대한 과두지배세력들이 국가를 포획,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동안 진보진영에서조차 정당 중심적 권력 교체에만 관심을 가져 온 탓에 우리 사회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과두지배세력 혹은 헤게모니 블록에 대한 연구는 거의 수행된 바 없다. 또한 집권 정당 교체와 무관하게 이어지고 있는 이러한 우리 사회의 진정한 지배 블록에 대한 무지는 불필요한 논쟁들도 끊임없이 유발하고 있다. 

자본주의체제가 존재하는 한, 그리고 그 대안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지 않는 한, 그 어느 누구도 너무나 쉽게 신자유주의자의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논쟁 구도는 서로 신자유주의자로 뒤집어씌우고, 대안 없는 급진화를 요구하는 논자들의 암묵적 승리로 끝나는 시나리오를 반복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자본주의 체제 비중심부에서의 과두지배세력에 대한 이해가 없다 보니, 많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곧 '민주 대 반민주'가 아니라, 유럽과 같은 '진보 대 보수'로 정치 구도가 빠르게 정비될 것으로 착각했다. 자유주의가 여전히 진보적 의미를 띠고 있는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진보의 의미도 매우 혼란스럽지만, 비중심부 국가들에서 보수는 제도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고 있는 서구의 보수 지배 세력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집단임을 이해하지 못 하고 있다. 이렇듯 정당 정치가 잘 작동하기만 하면 정책이 잘 작동할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면서 자신들의 지배를 철저하게 위장하고 있는 재벌, 관료, 언론, 사회 기득권층들, 그리고 국제금융자본이 동맹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과두지배세력에 대한 이해는 거의 전무하다.
  
과거 권위주의 체제에 의해 조직되고 성장해 온 한국의 특권 집단들은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사회경제적 민주화가 이루어지지 않음으로써 단순히 지속성을 유지해 왔을 뿐 아니라, 국가의 통제를 받는 지배 일분파로부터 떨어져 나와, 거꾸로 국가를 포위, 자신의 이익 추구의 도구로 삼는 적극적 지배자로 성장했다. 지구상의 모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와 유사한 지배동맹은 존재하지만, 상대적으로 많은 제약이 제도적으로 가해져 온 서구 중심부 국가에서는 노골적인 지배가 크지 않은 반면, 그러한 제약이 미약한 비중심부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글로벌 금융자본과 국가 금융엘리트, 대자본, 정치엘리트, 관료, 언론, 전문가 집단 등이 다양한 네트워크를 이뤄가며 노골적으로 과두지배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에서도 민주화 이후 국가의 공적 기능은 현저하게 약화되면서, 다양한 특권집단들의 이익을 보장해 주는 도구로 전락했다. 이들은 소위 민주정부로 일컬어지는 정권 교체 메커니즘과는 상관없이 혹은 별도로 독자적인 이익을 추구할 수 있는 구조를 공고화해 왔다. 민주화에 이은 세계화라는 이름 하의 개방화 속에서 재벌들은 국가 권력이 권위주의 시대처럼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보호해 주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이에 대비할 수 있는 장치들을 전 지구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갖추어 나갔다. 국내적으로도 지배 동맹의 범위는 언론과 각종 정치 엘리트, 관료들, 전문가들, 그리고 이들과 여러 인맥으로 얽혀 있는 각종 사회 기득권 집단으로까지 확장되어 국가는 철저하게 이들에 의해 포획되었다.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이라는 위력적인 세력의 침투로 인해 이에 대한 경고가 이어졌고, 상기한 재벌에 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국제금융자본은 재벌들과의 잠시 동안의 긴장 관계 이후 곧바로 공생 관계로 전환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역사가 증명하듯, 자본은 자신을 스스로 파괴할 정도로 경쟁하지 않고 언제나 공생의 길을 찾는다. 현재 국내자본 역시 국제금융자본과 동화되거나 공동행보를 하기 때문에 양자의 구별은 의미가 없다. 특히 외환위기 이후 국제금융자본은 한국 사회 과두지배 동맹의 주축으로 급속히 성장했다는 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히 국제금융자본의 이해관계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그것이 재벌들의 이해관계와 일치되거나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본시장 개방으로 국제금융자본이 침투하게 되면서 한국의 재벌들을 포함한 많은 기업들 역시 주주가치 경영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주주를 내국인과 외국인으로 구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게다가 국제금융자본뿐 아니라 재벌들 역시 자신의 기업 주가를 높이기 위해서 주주들에게 더 많은 배당을 지급하는 것이 주요 목표가 되었다. 즉 주주자본주의의 수혜자는 해외 자본만이 아닌 것이다. 주요 재벌 대기업들의 주식분배에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외환위기 이후 급속히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주주가치 경영의 강화로 이익을 본 것은 외국인 투자자만이 아니라 재벌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으며, 재벌 스스로 자본소유자로서 막대한 자본 축적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국제금융자본의 유입은 기업의 경영권 방어를 둘러싸고 재벌과의 관계에 있어서 갈등관계를 형성하기도 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이해관계가 서로 밀접하게 얽히면서 유착구조가 형성되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결단코 제대로 성공한 적도 없고, 현재의 조건 속에서 쉽게 실현되기 어려운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노동자와 노동조합의 권익을 향상시키고, 나아가 노동자공동경영제와 같은 산업민주주의를 이루는 것, 협동조합 경제를 지원하여 국가와 시장이 아닌 사회적 경제를 확장시키는 것, 중앙은행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강화하는 것 등등, 그 모든 단위 속에서 민중의 직접적 참여를 보장하는 경제를 창출하는 것, 즉 생산의 사회화 정책이야 말로 경제민주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고 있는 세력은 누구인가? 적어도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에서 국제금융자본보다는 그 국제금융자본을 포함한 그 국가의 과두지배세력 중 주요 동맹 세력인 대자본이 그러한 세력의 핵심이다. 따라서 재벌 해체론자들이 이러한 요소를 무시하면서 '재벌 개혁과 경제민주화를 거의 동의어로 쓸 정도로 재벌 해체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님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나아가는 데에 우선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재벌 개혁이기 때문에 재벌의 개혁이 선행되지 않고서는 다른 정책들은 실현 불가능은 아닐지라도 지속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고용 없는 성장, 비정규직 양산, 인건비와 하청단가의 삭감, 청장년층 실업과 빈곤층의 만연'과 같은 현상은 신자유주의화 이전에 재벌 체제 하에서 양산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재벌은 주주자본주의의 희생물이 아니라, 그 주주자본주의의 한 축으로서 이러한 현상을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이는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영향 속에서 전적으로 주주자본주의 이전 식의 재벌 체제가 주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사회경제적 현상들은 재벌 체제가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적극적으로 내재화하여 이용한 결과이기도 하다. 즉 현재 벌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의 심각한 위기는 국제금융자본과 재벌 양자가 모두 강제할 수 있는 것이다.
  
국제금융자본/주주자본주의의 폐해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차원이 아니라, 국제금융자본의 공격을 방어해 줄 구원자로 이미 국제금융자본과 동맹하고 주주자본주의의 일원이 된 재벌을 옹호하는 것을 넘어 복지 국가 건설의 주역으로 승격시키는 것은 급진적이긴 하지만, 그것은 관념론에 불과하다. 재벌개혁론자들의 장은 '진보의 가면을 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이 아니라, 국제금융/재벌 자본의 지배 동맹을 깰 수 있는 이론과 정책들을 합심하여 창출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진보적 경제학자들의 소중한 주장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본을 권력의 한 형태로 간주하는 닛잔과 버클러의 권력자본론에 의거 이러한 답답한 논쟁의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일각의 시도도 있다. 즉 지배계급이 사회를 규정하고 지배하는 권력기구가 곧 자본이라는 권력 자본론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 시장은 국가를 배척하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국가를 자본의 권력 논리에 종속시키는 메커니즘인 것이다. 

또한 권력자본론의 기초를 이루는 베블런의 전략적 사보타주 이론에 따르면, 산업자본과 금융자본모두 생산과정과 무관한 투자자일 뿐이라는 점에서 두 자본 간의 구분은 무의미하게 되는데, 결국 채권과 주식의 형태로 존재하는 재벌의 실물들, 그리고 총수들의 실제 목적은 금융 수익에 있는 한국 재벌들의 모습에서도 두 자본 간의 구분의 의미가 크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한국의 대재벌은 초국적 부재소유자의 그룹에 들어 가 하나의 지배 세력으로서 산업의 자본화를 통해 금융자산으로 전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외국 금융자본과 한국 산업자본은 이미 한 통속이기 때문에 외국 투기자본에 맞서 국내 자본을 보호해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총수와 대자본을 구별하자는 주장도 있지만, 과연 현재, 그리고 아마도 앞으로 상당한 기간 동안 한국의 재벌을 개인과 제도로 쉽게 구별 지을 수 있을 만큼 그들이 스스로 구별을 자처할지에 대해서는 매우 비관적이다. 재벌이 복지 국가 건설의 주요 행위자로 거론되고, 경제민주화가 재벌 개혁으로 축소된 채 정의되어지고 있는 현재의 논쟁은 사회적 경제 혹은 생산수단의 사회화를 진정한 경제민주화로 생각하며, 노동(정당, 조합)과 시민사회가 복지 국가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본적 개념부터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경제민주화는 재벌 체제 개혁이나 골목 상권 보호 등으로 축소되어져서도 안 되며, 복지국가 건설의 주요 행위자가 재벌이 되어져서도 안 된다. 국가권력과 결탁한 자본권력, 자본권력에 지배당한 국가권력을 사회적으로 통제해야 한다는 이론적 원칙을 넘어 즉각 다양한 형태의 생산의 사회화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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