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를 보며 '5월 광주' 떠올린 이유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9>] 양심의 빛으로 돌아온 세월호 희생자들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이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도보순례를 한다. 일차적으론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독려하는 목적이다. 아울러 근대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에 새겨진 분열의 역사를 되새기고, 역사적 진실을 마주할 내면의 용기를 회복하기 위한 순례이기도 하다.

순례단은 지난달 29일 서울에서 출발해 전라남도 진도 팽목항에 도착했다. 진도체육관에서 하루를 묵은 뒤, 도보순례를 시작한다. 지난달 30일 팽목항을 떠나 오는 18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 도착하는 일정이다. 이들은 순례 동안 매일 글을 쓰기로 했다. 그리고 그 글을 <프레시안>에 싣기로 했다. 도보순례단의 글을 소개한다. 편집자

팽목항에서 시작된 성공회 사제들과 평신도 대표의 발걸음이 어느덧 광주로 들어서고 있었다. 나는 팽목함에서 부터 속울음을 울으며 머릿속을 꽉 채우는 삼백 명의 아이들의 마지막 내지르는 비명소리를 귓가로 들으며 걷고 있었다. 집채만 한 바위가 구르며 내는 신음 같은 울음이 파도 속 깊은 바다에서 터져 나오던 팽목항! 그보다도 더 깊은 울음을 울고 있는 유족들! 시신이라도 찾아야겠다는 희망으로 세상 모든 시선을 여섯 달째 견뎌내고 있는 유족들의 병색이 완연한 얼굴들을 대하며 말문이 콱 막혔다. 마주 앉았으나 서로 얼굴을 마주볼 용기도 내기 힘들었던 유족들!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자식을 잃으면 문밖에 나오기도 싫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이 고통을 이 황량한 체육관에서 무슨 힘으로 버티고 있을까! 같이 동행했던 기자는 시신들이 부두에 내려지던 순간의 팽목항의 그 무서운 풍경을 떠올리며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경험이었다고 말했다. 잔인한 세월이다! 걷고 또 걷다 어느덧 광주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교회로 돌아와 급히 주일 미사를 준비했다. 다음날 미사를 끝내고 순례단이 기다리는 5.18묘역으로 향했다. 묘역에서 미사가 거행될 예정이고 나는 설교를 맡았기 때문이다. 함께 슬픔을 나누고 희망을 전하는 자리가 되어야 할텐데. 나는 미사 시작도 하기 전에 울음이 목에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광주 5.18! 내 인생의 큰 변곡점이었다. 그날 이후 내 인생의 계획은 모두 무너지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렸다. 우여곡절 끝에 1982년에 신학원에 입학하니 입학동기로 만난 친구는 나에게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렇게 정의가 뒤집혀진 시대에는 편안하게 사제가 되려고 하는 꿈은 접고 거꾸로 가는 역사에 저항하는 예언자가 되어야한다고. 친구는 교회갱신을 위해 다 같이 사제직의 꿈을 포기하자고 말했다. 온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사제가 되기 위해 신학원에 들어온 나는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피할 수도 없었다. 친구는 입학하기 직전 광주 상무대에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그는 조선대 뒷산에서 시민군의 시체를 나르는 일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 그가 무슨 온전한 정신으로 얌전히 신학공부만 할 수 있었겠는가? 결국 주교님들이 역사의 큰 파도에 떠밀려 모두 교구장직을 물러났고, 내 친구는 졸업하고 얼마 못 있어 갑자기 죽고 말았다. 자식을 잃은 늙은 부모의 눈물을 본 적이 있는가? 이미 죽은 아들의 입을 벌리고 연신 죽을 떠서 흘려 넣던 어머니의 그 심정을 헤아릴 수 있는가? 밥상머리에서 매번 한문 경구를 가르친 게 잘못이었다고 가슴을 치며 후회하는 친구 아버지의 한탄을 들어보았는가? 자식을 잘 키워보려고 욕심을 낸 게 오히려 자식을 잃는 결과를 빚었다고. 역사의 흙탕물에 자식을 떠내려 보낸 부모의 그 애 끓는 탄식을 들어보았는가? 아무리 강심장이라도 짐승이 아니라면 자식을 잃은 부모를 눈 똑바로 뜨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미사를 끝내고 순례단들과 광주 시민상주 회원들과 함께 구 묘역으로 향했다. 여기만 오면 언제나 1982년 가을의 그 기억이 떠오른다. 그 때만 해도 정리가 되지 않은 황량했던 그 묘역에 일본 목사님들을 모시고 가니 일본목사님들이 죽은 사람들이 불쌍하다며 울음을 터뜨렸다. 나도 같이 간 동행들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묘한 감정이 솟구쳤다. 군부독재에 짓밟혀 신음한 것도 서러운데 일본 사람들에게까지 동정을 받아야하는 신세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사연이 많은 비석의 뒷면은 모두 억지로 지워져 있었다.

그 중 한 비석에 용케 추도문이 남아있었다. "여보! 당신은 천사였소.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퇴근시간이 지났는데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 걱정되어서 임신한 몸으로 마중 나왔던 젊은 아내는 유탄에 맞아 숨졌다. 그의 남편은 짧은 글귀로 한 없이 길고 깊은 사랑과 사연을 단단한 돌 위에 남긴 것이다. 우리는 그 때 그 비석 앞에서 눈물로 뿌옇게 흐려지는 눈을 크게 뜨고 읽고 또 읽으며 그 사랑을 그 의미를 가슴 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 생명평화 도보 순례를 하고 있는 성공회 성직자와 신자들. ⓒ성공회 생명평화도보순례단
다음날 담양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는 햇빛 반짝이는 숲길에서 우리는 초라한 입간판을 보았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59년이 지나서야 규명한 양민학살! 여전히 유골은 찾지 못한 상태다. 단지 인민군에게 동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죽음을 당한 보도연맹 관련 400여 명의 양민들. 밥 먹다 말고 밭에서 일하다 말고 가족을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웃음 띤 얼굴로 마지막이 되고만 짧은 인사를 나누었을 그들! '잠깐 다녀올게.' 고무신 급하게 끌고 나간 소년티가 가시지 않은 아기 아빠, 어린 내 아들이 전쟁 전후로 이렇게 산야 이곳 저곳의 숲 속 풀잎 사이에 겹겹이 누워 백만 명이 넘는 숫자가 죽어갔다. 민중이 학살되는 이 땅의 서러운 역사를! 권력을 가진 지배자의 민중을 향한 이 반복되는 만행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이 땅에서 국민이 주인으로 대접 받는 역사를 반드시 우리 손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사실을 걷고 또 걸으며 가슴에 되새긴다.

세월호의 참사를 처음 접하는 순간! 왜 5.18을 떠올렸을까? 민중학살이 일상화되었던 어떤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반드시 지켜주고 보호되어야 할 국민의 생명을 왜 국가가 책임지지 않고 그냥 죽어가게 방치했을까? 이 의문에 대해 우리는 걸으며 그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진상규명이 이 시대 이 대한민국사회의 가장 큰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나는 이 모든 상황에 대한 신학적 정리를, 고(故) 이재욱 군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쓴 편지에서 발견한다. 나는 이렇게 나름대로 해석해 보았다.

“우리는 내 자식이 그 찬 바다에서 왜 죽어갔는지 그 진상을 반드시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그 소망을 거룩한 분노로 이 사회와 맞서서 고군분투하며 이루어 나가겠다. 금쪽같은 내 자식이 이렇게 억울하게 희생된 것은 세상 사람들이 깜짝 놀랄 눈부신 빛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그 빛은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양심을 밝힐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고 의로운 희생에 대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렇다! 세월호에서 300명이 넘는 생명이 온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꺼번에 죽어간 것은 어둠에 잠겨 거꾸로 가는 이 역사와, 거짓과 부패로 썩을 대로 썩은 이 사회에 양심을 밝히는 빛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서라는 것을.

- '팽목항에서 광화문까지' 생명평화 도보순례


첫째 날, "팽목항에 내려가며 느낀 흐린 날의 여운"

둘째 날, "우리는 왜 세월호 희생자들에게 미안했던 걸까?"

셋째 날, "'죽음의 권세'가 지배하는 세상, 생명의 길을 걷고 또 걷는다"

여섯째 날, "강변 꽃길 대신 매연 가득한 길을 걷는 이유"

일곱째 날, "자식 잃은 부모는 표현할 방법이 없어서…"

여덟째 날, "세월호 희생자 이름 적은 공책을 품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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