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외조부 "돈으로 박정희를 만족시키면 된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64> 한일협정, 두 번째 마당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법이다. 사회 전반의 분위기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른바 진보 세력 안에서도 부박한 담론이 넘쳐나는 이 시대에 역사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 절실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를 이어간다. 서중석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은 한국 현대사 연구를 상징하는 인물로 꼽힌다. 매달 서 이사장을 찾아가 한국 현대사에 관한 생각을 듣고 독자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여덟 번째 이야기 주제는 한일협정이다. <편집자>

프레시안 : 이승만, 장면 정권 때와 달리 왜 박정희 정권 때만 한일 회담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는지를 살피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부분을 찬찬히 짚었으면 한다.

서중석 : 이승만 정권은 누가 봐도 대일 강경책을 썼다. 1953년 구보타 발언 직후 상당히 오랫동안 한일 회담을 중지했다. (1953년 10월에 열린 제3차 한일 회담에서 일본 측 수석대표였던 구보타 간이치로는 "한국 통치는 일본이 한국인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라는 등의 망언을 했다. 이를 계기로 결렬된 한일 회담은 그 후 4년 반 동안 열리지 않았다. <편집자>) 그 후 재개됐을 때도, 그리고 1957년 기시 노부스케(아베 신조 총리의 외할아버지) 정권이 들어서서 적극적으로 나올 때조차도 계속 강경책을 썼다.

그뿐만 아니라 친일파를 중용하면서도 반일 운동을 1954년부터 계속 펴지 않았나. 이게 맨 처음에는 한일 회담 문제와 연결되지만, 이승만 정권의 반일 운동은 점차 반공 투쟁화했다.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이 중국 접근 정책을 펴고, 그것이 소련과 국교 정상화 및 북한 접근으로까지 이어지면서 그렇게 됐다. 이렇게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일 운동은 나중에는 민족 감정을 이용한 정권 유지책으로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러니까 '이승만 정권이 일본에 저자세를 취했다. 굴욕적이다', 이렇게 볼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많은 국민들한테는 '이승만 정권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것 아닌가', 이렇게 비쳤다. 반일 운동이 어떤 맥락에서 전개된 것인지 잘 몰랐고 한일 회담의 내막도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승만 대통령은 민족의 자존심을 보여준 분이다',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야당에서만 '해도 너무한 것 아니냐. 한일 회담을 저런 식으로 해선 안 된다. 한일 관계를 이런 식으로 놔둬선 안 된다'고 계속 비판했다. 그러니까 이때는 거꾸로 됐던 것이다. 야당이 오히려 '왜 한일 관계에 더 적극적이지 않느냐', 이렇게 나왔다.

▲ 이승만 정권 시절 반일 운동은 반공 투쟁의 일환으로 전개됐다. 사진은 1959년 2월 1일, 재일 교포 북송 반대 차량 시위 모습. ⓒ연합뉴스


한일 회담에 적극적이던 장면, 그러나 방식은 박정희와 달랐다

프레시안 : 이승만 정권과 달리 장면 정권은 한일 회담에 적극적이었다.

서중석 : 장면 정부의 경우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장면이 국무총리로 인준 받은 직후인 1960년 9월 6일 고사카 젠타로 외상이 내한했다. 일본 고위 관리가 해방 후 한국에 처음으로 온 것이었다. 이 사람은 바로 미국에 가서 크리스찬 허터 국무부 장관을 만난다. 그러면서 크리스찬 허터 미국 국무부 장관이 9월 8일 '한일 간의 협력이 아주 중요하다', 이렇게 연설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해 10월 25일부터 제5차 한일 회담이 열렸고 11월에는 대재벌이 포함된 민간 경제 시찰단이 한국을 다녀갔다.

장면 정부는 한일 회담을 초정권적으로 하려고 했다. 그래서 정부, 국회, 초당적으로 구성된 외교자문회 같은 걸 통해 한일 회담을 진행했다. 그러면서도 물론 비밀 통로 같은 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박흥식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개인 사절로 파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친일파들이다. 그쪽과 잘 아니까 일본에 가서 여러 가지를 하도록 한 것이다.

(박흥식은 일제 때 화신백화점 등을 세우며 한때 '조선 제일의 부자'로 불렸다. 해방 후인 1949년 반민특위에서 첫 번째로 검거한 친일파이기도 하다. 1999년 <문화일보>에 연재된 김동조 전 외무부 장관의 회고 '내가 겪은 한국 외교'에 박흥식과 1950∼1960년대 한일 관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이에 따르면, 박흥식은 전범으로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풀려난 기시 노부스케를 화신의 도쿄 사무소 고문으로 위촉해 생활을 돌봐줬다고 한다. 장면 정부가 들어선 후, 장면 총리와 가까운 사이였던 박흥식은 김동조를 찾아와 장 총리의 집에 함께 갔다. 이 자리에서 박흥식은 '이번에 도쿄에서 만났을 때 기시 노부스케가 한일 회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김동조와 맺은 인연을 설명했다'며 '한국에서 초청하면 일본 중진 의원 몇 사람이 방문할 것'이라고 밝혔다. 5.16쿠데타 후 박흥식은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에서 일정한 역할을 한 인물로 꼽힌다. 김동조는 1965년 한일 회담이 타결될 때 한국 측 수석대표였으며, 정몽준 전 새누리당 의원의 장인이기도 하다. <편집자>)

민의원(하원)은 1961년 2월 3일 한일 관계에 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자주 정신의 견지와 호혜 평등 원칙의 관철이라는 거족적인 요청과 필요성에 입각해" 한일 회담을 점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는 결의였다. 또 이 결의에서 민의원은 "정식 국교는 양국 간의 역사적인 중요한 현안 문제의 해결, 그중 특히 일본의 강점으로 인한 우리의 손해와 고통의 청산이 있어야만 성립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경제 협조는 국교 정상화 이후 국내 산업이 침식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 총리는 이 결의안의 취지가 당연하다며 이를 받아들인다. 그러면서 구체적으로 해나갈 때는 국회의 양해를 받고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1961년 봄에 한일 회담은 어려움을 겪었다. 어업 문제, 이게 한일 회담에서 참 어려운 문제이지 않았나. 사실 청구권 문제는 액수 문제로 여겨졌고 구체적인 건 어업 문제였다. (2월 3일 민의원 결의에도 어업 문제 관련 사항, 즉 평화선 수호가 포함돼 있었다. <편집자>) 그래서 정일형 외무부 장관이 4월 미국에 가서 딘 러스크 미국 국무부 장관과 회담했다. 5월 초에는 중량급의 일본 자민당 의원단이 내한했는데 이때 동행한 일본 관리는 국교 정상화를 낙관했다.

프레시안 : 장면 정권도, 박정희 정권도 한일 회담에 적극적인 점은 같았지만 국민들의 반응은 달랐다.

서중석 : 장면 정권은 한일 회담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지만 국민감정을 거스를 정도로 친일적이진 않았다. 사실 장면 내각은 지일 내각 또는 친일 내각으로도 불렸다. 장면 총리 자신이 1960년 3.15 부정 선거 때 자유당한테 공격받을 정도로 일제 때 친일적인 언동이 있지 않았나. 장면 총리와 내각 주변에는 친일파라고 이야기할 만한 사람이 꽤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그 때문에도 국민들의 정서를 거스르면서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장면 집권기에 한일 교섭과 관련해 거센 반대 데모가 일어나지 않았던 건 기본적으로 개방적이고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해 한일 회담을 했고 국민에게 쭉 공개하는 방식을 택함과 동시에 외교 자세에서도 민족 감정에 역행하는 처사를 하지 않아 그런 게 아니겠나.

장면 정부 때 대일 청구권 문제를 포함해 한일 간 현안이 진전된 것을 어떻게 평가할지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자가 다른 의견을 보이고 있다. 상당히 진전시켰다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것에 대해선 판단하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더라. 사실 불과 몇 개월밖에 존재하지 못했던 정권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하기가 어렵다. 워낙 짧은 기간이어서 그렇다. (제5차 회담이 어떤 성과를 낳았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엇갈리지만, 이 회담에서는 이승만 정권 때와 달리 분과별로 구체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예컨대 청구권 문제의 경우 이승만 정권 때는 실질적인 내용에 대한 논의보다는 법리 논쟁 위주로 전개됐지만, 제5차 회담에서는 청구권 분과위원회를 32차례 열어 청구권의 각 항목을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편집자>)

▲ 1961년 11월 3일, 제6차 한일 회담을 위해 한국을 방문한 일본 측 수석대표 스기 미치스케와 만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연합뉴스


일본 극우가 박정희의 군정 연장 시도를 환영한 이유

프레시안 : 왜 박정희 정권만 그렇게 심한 반대 운동에 부딪힌 것인가.

서중석 : 그렇게 된 데에는 군사 정권의 미숙함, 무경험, 경솔함, 독단, 독선이 작용하지 않았는가 싶다. 우선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경우를 보면 일제 때 하급 장교들이 갖고 있었던 것과 맥을 같이하는 사고방식이 남아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제 때 젊은 장교들이 가진 사고는 아주 단순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일정한 몇 가지 기본 사고를 강하게 주입받지 않았나. 민간인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들, 예컨대 복잡하게 사고한다든가 하는 것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이분은 해방 후 한때 좌익 활동을 했지만 거기서도 굉장히 고민했다든가 하는 걸 잘 알 수가 없다. 한국전쟁 이후 군 경험이라는 것도 별다른 게 없다.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건 사단장인데 그 사단장에도 그렇게 오래 있지 않았다. 군수기지사령관, 2군 부사령관 같은 직책을 맡은 적도 있지만, 이런 데서 박 의장은 중요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것에 임하는 적절한 태도나 경험을 충분히 쌓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다보니 미숙할 수 있지 않나. 그건 김종필을 비롯한 다른 군인들도 비슷하지 않았겠나 하는 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군정이라는 것은 정당성을 갖지 못한 것 아닌가, 그래서 5.16쿠데타가 났을 때 처음에는 일본 측 관료 등 가운데선 '군인 정권이라는 건 한시적인 것 아니냐. 그러니 우리가 어떻게 한일 회담을 진전시킬 수 있겠느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어쨌든 군정이기 때문에 더 신중을 기해야 하고, 국민들한테 알릴 것은 알리고, 그러면서 민족 감정 같은 것도 여러 가지로 살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본 측에선 점차 '군정이니까 좋다. 군사 정권은 군사 정권대로 좋다', 또 이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예컨대 기시 노부스케를 중심으로 옛날 만주국에서 주로 활동했던 사람들, 또는 만주에 주둔했던 관동군이라든가 만주군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만주 인맥이라고 하지 않나. 5.16쿠데타가 났을 때 이 사람들이 박정희 소장의 사진을 보고 '아 이 사람은 다카키 마사오 아닌가' 하면서 놀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면서 '한일 관계에 새날이 찾아왔다', 이런 반응을 보였다. 이승만 정권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 이승만 정권 때 혼나지 않았나.

프레시안 : 일본 극우들이 박정희 소장의 사진을 보고 바로 알아봤다는 식의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는데, 그때마다 든 의문이 있다. 박정희가 일제 때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까지 쓴 건 사실이지만, 해방 전 그렇게 고급 군인은 아니었다. 그런 박정희를 저들이 단번에 알아봤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서중석 : 그건 과장된 표현이라고 봐야 한다.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라는 사실은 아마도 만주군관학교 동기생들이 먼저 지적했을 것이고, 그게 신속히 퍼진 것으로 봐야 한다. 군인들 세계에서 그 사람들끼리는 만나고 있지 않았나. 그런 만주 인맥이 그 사실을 쉽게 포착한 것이다. 5.16쿠데타가 일어난 후, 박정희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바로 파고들었을 것 아닌가. 그렇게 보는 게 합리적이다. 사실 (5.16쿠데타를 일으키기 전 일본 극우의 핵심 인물들 중에서) 누가 박정희를 알았겠는가. 한국 군인들의 상당수도 잘 몰랐는데.

어쨌건 기시 노부스케, 시이나 에쓰사부로, 고다마 요시오, 야쓰기 가즈오, 이시이 미쓰지로 등 만주국을 실질적으로 경영했던 만주 인맥은 박정희 군사 정권의 출현을 환영했다. 5.16쿠데타 이후에 기시 노부스케가 이렇게 얘기하는 걸 볼 수 있다. "다행히 한국은 군사 정권이기 때문에 박정희 등 소수 지도자들의 나름대로 된다. 따라서 어느 정도의 액수로 박 의장을 만족시키기만 하면 저쪽에는 국회도 없는 것이고, 만일 신문이 이것을 반대한다 하더라도 박 의장이 그들을 봉쇄해버릴 수 있으니까 되는 것이다." (시이나 에쓰사부로는 1965년 한일 회담 타결 당시 일본 외상이다. 고다마 요시오는 기시 노부스케와 마찬가지로 A급 전범이었고, 일본 정계의 흑막으로 불렸다. 기시 노부스케와 마찬가지로, 시이나 에쓰사부로와 고다마 요시오는 박정희 정권 때 한국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았다. 야쓰기 가즈오는 기시 노부스케의 측근으로 일본 우익의 실력자였다. 이시이 미쓰지로는 일본 참의원 의장을 역임했다. <편집자>)

민정 이양기에 박정희가 군정을 연장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한 일본 극우 세력은 적극적으로 환영했다. 놀라운 일이다. 예컨대 박정희가 군정 연장을 이야기한 바로 다음 날인 1963년 3월 17일, 오노 반보쿠 자민당 부총재는 이렇게 말한다. "지난달 도쿄에서 김종필 씨는 '3월 중순 한국 정치 정세가 서너 번 바뀔 것이며 그 결과는 일본에 유리할 것'이라고 내게 말한 바 있다. 16일 박 의장이 '국민이 승인한다면 군정을 4개년 연장하겠다'고 발표한 건 김 씨의 예측이 옳았음을 보여준다. 군정의 계속이 일본에 유리하리라는 것은 한일 국교 정상화 회담의 조기 타결을 가능케 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구권 문제가 해결되면 어로 및 독도 문제 등의 제(諸) 난관이 손쉽게 제거될 것이라고 내게 김 씨가 말했던 것에 비추어 난 그렇게 생각한다."

이렇게 일본 측에서는 군정 연장을 환영했다. 그러나 새뮤얼 버거 주한 미국 대사가 앞장서서 군정 연장을 반대하지 않았나. 일본 정부는 미국이 군정 연장을 반대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일 회담이 조기 타결되지 않겠다며 단념하는 것으로 뉴스가 들어온다. 이와 관련해, 1963년 4월 9일 야당의 허정은 일본 수상을 비롯한 자민당 수뇌가 한국의 군정 연장에 찬성하고 미국까지 설득해보겠다고 하는 건 "해괴하기 짝이 없는 중대 실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한다.

일본 자민당 정권의 극우 실세들이 이렇게 군정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는 건 나중에 유신 체제에 대해 미국과 또 다르게 아주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과 일치한다. 또한 이들은 1979년 12.12쿠데타, 1980년 5.17쿠데타 때 신군부, 그리고 그 후 전두환 정권을 적극 지원한다. 일본 극우 세력이 어떤 사람들이고 왜 그렇게 했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하여튼 만주 인맥을 중심으로 한 자민당 간부들이 '군정 하에서 한일 관계가 정상화돼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박정희·전두환 세력과 일본 극우의 수상한 밀월

프레시안 : 일본 극우 세력의 위험성은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오늘날에도 엄존하는 문제다. 박정희 세력은 그러한 일본 극우를 상대로 한일 회담을 조기에 끝내려 무리수를 둔다.

서중석 : 군사 정권도 '계엄 하에서 아무도 반대 의견을 얘기할 수 없고 모든 정치 활동이 중지돼 야당도 존재할 수 없는 속에서 속결로 한일 회담을 해나갈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일 교섭을 1962년에 할 때 한국 측 교섭 대표들이 일본 측에다가 "한국의 군정 기간 동안 교섭을 마무리해야지, 민정 이양이 되면 시끄럽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발언이다. 더군다나 일제 때 군 경력을 갖고 있는 경우 친일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자주적인 모습, 떳떳함, 당당함을 더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이런 걸 군정 하에서 속전속결로 해치우려 한다면 그건 상당히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나중에 한일 회담 반대 운동으로 폭발하는 것 아니겠나.

그런데 1964∼1965년에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건 일본에 취한 태도와 관련돼 있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당시 외무부 장관이던 이동원의 책 <대통령을 그리며>에도 이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이때 그렇게 큰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제일 큰 이유는, 물론 한일 회담 내용도 관련돼 있지만 그것보다는 오히려 일본에 보인 굴욕적 저자세, 졸속 처리하려는 태도 같은 것들이었다. (이동원은 <대통령을 그리며>에서 일본의 오만한 태도와 더불어 이 문제를 언급했다. "박 대통령의 '고개 숙임'이 '굴욕 외교'라는 학생 데모의 시발점이 되기도 했지만 거기엔 이후 협상 과정에서 격을 무시한 일본의 외교 행각도 일조했음을 빼놓을 수 없다." <편집자>)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예순다섯 번째 편도 조만간 발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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