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선 단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권력구조 개편에 대한 공방이 줄기차게 이어져왔다. 그러나 최근의 개헌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 체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형국이다.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개헌 추진 집단은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의 국회의원들이 초당적으로 구성한 ‘개헌추진 국회의원 모임’이다. 지난 이슈페이퍼 18호에서도 소개한바와 같이, 이 모임의 야당 간사인 우윤근 의원은 “새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다수결에 의한 승자독식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폐하고 협의 민주주의 형태의 분권형 또는 내각제 개헌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야 의원 150여명이 서명한 터라 발의 요건은 이미 채워졌고, 따라서 적절한 시기만 오면 이들의 주도로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보다 뜨겁게 달아오를 것이 예상되고 있다.
사실 승자독식 민주주의를 마감하고 협의제 혹은 합의제형 민주주의로 발전해가길 원한다면 그 최종 단계에선 분권형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를 도입함으로써 연정형 권력구조를 안정적으로 제도화해놓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다면 그 둘 중 어느 쪽이 한국의 합의제형 권력구조로 더 바람직할까? 물론 최종 선택은 국민의 몫이다. 여기서는 다만 그 선택에 참고가 될 만한 시론적 논의 정도를 전개해보고자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통령 직선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가 한국형 권력구조로 적합하리라는 것이다.
의원내각제 도입의 어려움
한국의 의원내각제 도입은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몇 가지 고민해야 할 지점이 있다. 그 중 두 가지만 언급하자면, 그 첫째는 한국과 같이 왕이 없는 나라가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경우, 모든 국민을 대표하는 초당파적 국가원수 혹은 “권위중심체”의 부재로 인해 국가나 사회통합의 안정적인 구심점 확보가 어려울 수 있다는 점이다.1) 이것이 아마도 입헌군주국이 아닌 유럽 공화국들의 대다수가 의원내각제 대신 분권형 대통령제를 택한 이유인지도 모른다. 한국이 만약 의원내각제를 택하면서 이 난점을 해결하고자한다면 독일이 그랬듯이 상징적 국가원수로서 의회에서 선출하는 대통령을 따로 둘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 대통령에게는 한국적 맥락에서 국가원수로서의 상징적 의미가 충분히 발휘될 수 있을 정도의 지위 및 권한이 주어져야할 것이다.
두 번째 고민은 과연 한국의 시민들이 87년 민주화 운동의 ‘쟁취물’인 직선 대통령제를 포기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수의 시민들은 대통령직선제를 한국 민주화의 징표로 여기고 그에 대한 애정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대통령제에 익숙해져있음은 물론이다. 반면, 의원내각제와 관련하여서는, 그것의 제도적 장점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한국의 정치현실 속에서 작동 가능한 권력구조인지에 대해서는 미심쩍어 하는 시민들이 다수이다.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시민 대다수는 제왕적 대통령제의 개혁 필요성은 인정하면서도 의원내각제의 전면 도입보다는 대통령 직선제를 유지하면서 권력의 집중이나 남용 문제를 해결하는 수준에서 방도를 찾아보자는 견해를 보이고 있다. 직선 대통령제에 대한 국민적 선호가 이처럼 높게 유지되는 한 이를 무시하고 의원내각제를 도입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의 난점과 장점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직은 존치시키되 행정부 수반으로서의 대통령 권력을 의회에서 선출하는 총리와 분담케 하는 권력구조이다. ‘분권형 대통령제’(semi-presidential government)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의한 뒤베르제에 의하면, 분권형 대통령제는 다음 세 가지 요소가 결합된 권력구조이다.2) 첫째,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선거권 행사에 의해 (직선 혹은 간선으로) 선출된다. 둘째, 대통령은 국가원수로의 권한과 함께 (국방이나 외교 등 일정한 영역의 정책결정과정에서) 상당한 실권을 보유한다. 셋째, 대통령과는 별도로 그 직이 전적으로 의회의 선출권과 불신임권에 의해 유지되는 총리 및 장관들로 구성되는 행정부가 존재한다. 결국 분권형 대통령제의 핵심은 국민이 뽑는 대통령과 의회가 선출하는 총리 간의 분권 구조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 분권 구조, 즉 권력의 분산 정도와 범위가 어떠한지에 따라 무수하게 많은 형태의 분권형 대통령제가 탄생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가장 일반적인 분권형 대통령제는 대통령은 국가원수직과 이른바 외치 영역에 해당하는 외교·안보·국방 정책 등을 담당하며, 총리는 내정과 관련된 그 나머지 정책들을 모두 맡는 형태의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로의 전환 역시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력 배분의 어려움 때문이다. 흔히 외교, 안보, 국방 등의 정책 영역은 대통령이 맡고 사회나 경제 등 국내 정책 영역은 총리가 맡는다고 하지만 그 영역 구분이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예컨대, 대외 통상과 금융거래 및 투자는 물론 세계화와 지역통합 그리고 FTA 등과 관련된 대외경제정책은 형식상은 외교정책이라 할지라도 국내 정치경제에 끼치는 효과가 막대함을 고려할 때 그것은 실질적인 국내정책에 해당한다. 안보도 이제는 경제 변수 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포괄적 정책 영역에 속한다. 결국 대통령과 총리 간에 정책 영역의 분담 및 권력 배분 문제를 놓고 (제도 성숙에 이르기까지는) 끊임없이 갈등과 대립 상황이 벌어질 소지가 크다는 것이다.
다른 문제를 하나 더 든다면 형식만 권력분산형이지 실상은 권력집중형인 분권형 대통령제도 등장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우는, 예컨대, 비슷한 이념과 정책 기조를 공유하고 있는 정당들 간의 연합체 혹은 특정 정당 하나가 의회의 다수파를 구성하고 그 정당이나 정당연합에서 대통령까지 배출된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다. 이때 대통령에게 프랑스 등에서와 같이 (결국 내각불신임권을 갖고 있는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긴 하지만) 총리 임명권까지 있다면 여기서의 대통령은 사실상 대통령중심제에서의 경우와 유사하리만큼의 거대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국가원수직은 물론 자신이 임명한 총리를 통해 실질적인 행정부 수반직도 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역시 프랑스에서와 같이 대선과 총선 시기를 일치시킴으로써 여소야대의 생성 가능성을 구조적으로 낮출 경우 분권형 대통령제의 의미는 거의 퇴색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게 운영되는 분권형 대통령제를 합의제적 권력구조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요한 것은 분권형 대통령제라는 형식이 아니라 거기서 이루어지는 권력분산의 실질적인 양과 질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합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권력구조의 개편을 추진한다면 상기한 한국적 현실을 감안할 때 그 지향점은 의원내각제 보다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돼야 하리라고 여겨진다. 일단 분권형 대통령제는 의원내각제와 달리 상당한 실권을 가진 대통령을 지금과 같이 국민이 직접 뽑는 권력구조이므로 그 도입 과정에서의 국민적 반대는 비교적 크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국민의 힘으로 이루어낸 대통령 직선제는 그대로 유지하되 단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를 없애고 민의 반영에 뛰어난 합의제적 민주체제를 발전시켜가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분산하는 방향으로의 개혁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칠 경우 국민들은 그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분권형 대통령제 도입 조건
그렇다면 남은 과제는 위에 기술한 분권형 대통령제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우선 분권형 대통령제가 실질적인 대통령중심제로 바뀔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생각해보자. 물론 그러한 우려는 충분히 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평가를 위해서 과잉 우려는 삼가야 한다. 분권형 대통령제일지라도 대통령과 총리가 같은 정당(연합)에 속해있는 경우 대통령의 권력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해 매우 강력해질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권력이 대통령제에서의 경우만큼 막강해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분권형 대통령제에서의 총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으로부터의) 독립성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총리의 진퇴는 오직 의회만이 결정할 수 있다. 따라서 총리는 “일단 임명된 순간부터는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 대해 상대적 독자성을” 갖고 내각 주도권이나 장관 인사권 등의 자기 권한을 자유로이 행사할 수 있다.3) 총리의 이러한 독립성과 독자성으로 인해 대통령의 권력은 어느 경우든 분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분권형 대통령제의 합의제적 특성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대통령이 과도한 권력을 차지할 수 있는 조건이나 환경을 애당초 만들지 않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이념 및 정책 중심의 구조화 수준이 높은 다정당체계를 구축해 놓아야 한다. 진보, 중도, 보수 등으로 구분되는 다양한 이념 및 가치의 공간마다 각기 유력 정당들이 하나 이상씩 포진해 있는 높은 수준의 정당구조화를 이룬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에서는 단일정당이 의회의 다수파가 되거나 이념이나 가치지향이 유사한 여러 정당들이 정당연합체를 결성하여 그들만으로 다수파 진영을 구축하는 경우는 웬만해선 발생하지 않는다. 유력 정당들이 여럿인 구조에서 어느 한 정당이 홀로 다수파가 될 가능성은 낮으며, 그 유력 정당들이 서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이념 또는 가치 정체성으로 각자 무장하여 서로 다른 정책기조로 치열하게 경쟁하는 구조에서는 이른바 ‘범진보’나 ‘범민주’ 또는 ‘범보수’연합 따위의 진영정치가 발전할 가능성도 낮기 때문이다. 이렇게 다정당체계의 구조화 수준을 높이기 위해선 비례성이 충분히 보장되는 선거제도는 물론 특히 유력한 중도정당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다. 중도정당이 국회 의석을 그 좌우 쪽에 위치한 정당 혹은 정당연합이 자기(들)만으로는 국회의 다수파를 구성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차지하고 있을 경우엔 언제나 초이념적인 연립정부가 구성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 경우엔 대통령과 총리가 동일한 정당(연합)에서 배출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진다.
대통령과 총리 간의 권한배분 문제
분권형 대통령제에 있어 더 심각하고 풀기 어려운 문제는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권한 분배와 관련된 것들이다. 그 둘 간의 역할분담이 확실하지 않을 경우엔 권한 행사를 둘러싼 잦은 갈등으로 인해 국정운영이 교착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권한을 어떻게 나눌지에 대한 절대적 기준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구성원들의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분권의 합리적 기준을 스스로 마련해야 한다. 물론 공론화 과정을 거쳐 사회적 합의를 도출해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와 관련하여 황태연(2005, 49-52)의 제안은 좋은 참고가 될 수 있다. 그는 국가의 원수인 “대통령은 전 국민의 이익과 전체적 가치관을 대변하고 집행하는 초당파적 임무”를 부여받은 헌법기관인바, 그러한 대통령에게는 초당파적인 입장에서의 숙고와 심의, 그리고 판단이 요청되는 영역에서의 결정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사회구성원들의 다양한 선호와 이익이 여러 정당들에 의해 대표되고 경합하는 의회에서 선출되는 총리는 “불가피하게 당파적일 수밖에 없는 내정의 각 부문을 관장”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유럽의 많은 입헌군주국들이 정치적 안정을 누리는 까닭은 상당 부분 “초당적 절대존엄”인 왕의 존재 덕분이라며, 공화국들이 왕 대신 대통령을 세움으로써 같은 효과를 얻고자 한다면 그 대통령은 “당파적 정쟁에 말려들지 않게끔 전국민적 임무만을” 맡게 함으로써 국가원수로서의 권위와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 같은 합리적 제안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의 분권형 대통령제에서는 통일과 국방 정책만을 대통령에게 맡기고 그 나머지인 외교와 내치 영역은 모두 총리의 소관 사항으로 돌리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한다. 외교정책마저도 총리에게 넘기자고 하는 것은 그 영역에서는 상기한 대로 국내정치적 파급효과가 큰 대외경제정책 등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로, 대통령이 그러한 영역을 담당할 경우 그는 계급, 계층, 집단별 이해관계의 갈등과 대립 상황 속에서 자신의 초당파적 위치를 유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외교에 비하여 국방과 통일은 초당파적, 거국적, 전 국민적 이슈로서의 성격이 매우 뚜렷한 정책 영역에 속한다. 국방과 통일이야말로 당파적 유불리를 초월하여 오롯이 국민적 공감대에 기반을 두어 수립하고 추진해야할, 따라서 전 국민을 대표하는 대통령이 전담하기에 매우 적합한 정책 영역이라 할 것이다. 실제로도,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들 가운데 대통령의 외교권을 인정하는 나라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군통수권을 대통령에게 부여한 나라들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4)
역할분담을 위와 같이 분명히 하더라도 대통령과 총리 간의 체계적인 협의 기제는 별도로 준비돼있어야 한다. 국방과 통일 정책이 여타 영역과 아무리 차별성이 큰 영역일지라도 세부로 들어가면 외교는 물론 경제, 산업, 사회, 복지, 교육, 국토해양 등 거의 모든 정책 영역과 중첩되는 부분이 즐비하기 마련이다. 대통령과 총리는 이러한 부분들에서 권한 충돌 가능성이 상존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 그에 대한 조정이 상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유기적인 협의체계를 마련해 놓아야 한다.5)
그와 같은 협의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여 대통령과 총리 사이의 잠재적이거나 실재적인 갈등이 적시에 순조롭게 조정될 수 있을 때 분권형 대통령제는 안정적인 권력구조로 정착할 수 있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핀란드, 프랑스, 아일랜드,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의 많은 선진국들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그렇게 성공적으로 운영해왔다. 그 나라들만이 아니다. OECD 34개 회원국 가운데 대통령중심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는 한국, 미국, 칠레, 멕시코 등 4개국에 불과하다. 나머지 30개국은 의원내각제 15개국과 분권형 대통령제 15개국으로 정확히 반씩 나뉜다. 15개 의원내각제 국가 중 독일과 아이슬란드를 제외한 13개 국가가 입헌군주국이다. 독일과 아이슬란드는 실권이 없는 대통령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고 있다. 그리고 15개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들은 모두 왕이 없는 공화국들이다.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 회원국들의 절대다수가 대통령중심제가 아닌 의원내각제나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라는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리고 그 절반이 분권형 대통령제 국가라는 점 역시 의미 깊다. 분권형 대통령제는 의원내각제에 못지않게 상당히 안정적인 정부형태임을 웅변하는 것이다.
이상의 논의 결과를 종합해본다면, 공화국인 한국이 현행 대통령중심제에서 벗어나 합의제 민주주의에 부합하는 권력구조로의 전환을 모색할 경우 선택지는 둘로 좁혀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직선 대통령을 상징적 국가원수로 두고 의원내각제를 전격 도입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전환하는 것이다. OECD 국가들의 정부형태 분포가 말해주듯, 어느 경우든 권력구조 자체의 불안정성으로 인해 선택을 꺼려할 필요는 전혀 없다. 최종 결정은 오직 국민의 선호에 따라 내려지면 된다.
1) 황태연. 2005. “유럽 분권형 대통령제에 관한 고찰.” 『한국정치학회보』 제 39권 2호. pp. 52-53
2) Duverger, Maurice. 1980. "A New Political System Model: Semi-Presidential Government" European Journal of Political Research vol. 8. no. 2. p. 142
3) 황태연(2005, 56)
4) 장영수. 2014.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 의원내각제 혹은 분권형 대통령제.” 동아시아미래재단 신년세미나 발제문. p. 12.
5) 상게논문 p. 14.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