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인 스스로 공정성 안 믿고 출세지향적"

[토론회] 사장 선출 방식에 '사장추천위' 제안

한국방송공사(KBS)가 길환영 사장 해임 이후 빠르게 정상화되고 있다. 일손을 놓았던 직원들이 현업에 복귀하고, 시청률도 차츰 회복하는 추세다. 그러나 'KBS 사태'가 모두 끝난 것은 아니다. 총파업을 주도한 KBS 양대 노조는 "길환영 사장의 해임은 끝이 아니라 공정성과 독립성 확보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누차 강조해왔다. 파업도 전면 중단이 아닌 역시 '잠정 중단'인 상태다. 차제에 KBS 공정성과 독립성을 담보하기 위한 확실한 내부 합의를 이끌고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겠다는 의미다.

19일 오후 KBS 신관 국제회의실에서는 'KBS 독립성과 공공성 실현을 위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KBS 양대 노조와 4대 직능 협회, 언론학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길환영 이후의 KBS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인가'에 대해 장장 3시간 30분 동안 열띤 토론을 벌였다. 차기 사장 선임 문제 등에 대한 내부 관심이 집중돼있는 만큼 이날 토론회는 KBS 사내 방송을 통해 실시간 중계됐다.

▲지난달 19일 KBS 길환영 사장 퇴진을 요구하며 KBS 본관 앞에서 손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 조합원들. ⓒ프레시안(서어리)

"공정성을 기계적 균형으로 오인…언론인 규범 내면화해야"

토론의 초점은 공정성 확립을 위한 방안, 독립성 확보를 위한 구체적 지배 구조 개선 방안 등 둘로 나뉘었다. 첫 발제를 맡은 이준웅 서울대학교 교수는 공정성 문제에 주안점을 두고 발표했다.

이 교수는 최근 사태를 비롯, KBS의 가장 큰 문제로 '공정성 시비'를 꼽았다. 이 교수는 공정성 논란이 반복된 데에는 한국 정치체계와 언론매체가 특정한 방식으로 상호작용해왔던 역사적 배경이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이같은 언론의 환경을 '정치병행성(political parallelism)'이라는 용어로 축약했다.

그는 "이런 배경 속에서 기자들 스스로도 '어차피 공정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라며 믿지 못하거나 '나 혼자 출세할 거야'라는 생각으로 정권과 가깝게 지내느라 원칙을 내면화하지 못한다. 공정성 개념을 기계적 균형성으로 받아들이기도 한다"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여기에 공정성 관련 내부 장치들이 미비한 문제들까지 중층적으로 나타나 공정성 시비가 발생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특히 "공정성은 언론의 내면화된 규범"이라며 언론인 스스로 공정성 원칙을 내면화할 것을 강조했다. 이 교수는 언론인이 숙지할 공정성의 기본 원칙으로 △포괄성의 원칙, △최소 다양성의 원칙, △내재적 공정성 원칙, △약자 대변의 원칙 등을 제시했다.

포괄성의 원칙이란 중요 사안을 빠뜨리지 않고 보도하는 것이다. 이 교수는 "KBS가 공정성 논란을 애초에 회피하기 위해 타 방송에 비해 갈등 자체를 보도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며 "낙종이 두렵거나 다루기 어려운 문제라면, 당일 못 하더라도 다음날, 다음 달이라도 하는 게 의무"라고 했다.

최소 다양성의 원칙은 둘 이상의 독립적 정보원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 내재적 공정성 원칙은 해당 보도로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당사자 의견을 뉴스에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이 교수는 "방송통신심의위원회 같은 외부에서 규제적으로 주어지는 것보다 언론인 스스로가 실천해야 한다"며 언론인이 스스로 성찰하고 규범을 실천할 것을 거듭 당부했다.

▲KBS 길환영 전 사장 해임 이후 KBS는 문창극 총리 내정자 관련 보도로 호평을 받았다. ⓒKBS 화면 갈무리

이 교수의 발제에 대해 반론과 반성의 의견이 각각 나왔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 3기 위원 명단에 오른 윤석민 서울대학교 교수는 "발제에 결정적인 게 빠져 있다"며 "KBS가 공정하기 위해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나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저는 '일상적 실천'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윤 교수는 최근 화제가 됐던 문창극 총리 내정자 보도를 예로 들었다. 윤 교수는 "(문 내정자가) 일국의 총리로서 성숙한 태도를 갖췄는지 의심이 간다"면서도 "KBS가 보도한 교회 발언에 대해선 선뜻 동의하기 쉽지 않다. 이리저리 짜 맞춰서 하나의 내러티브를 이끌어갔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언론인이 스스로 공정한 보도에 대한 믿음이 없다거나, 출세 지향적 생각을 한다고 한 이 교수의 발언에 대해 "언론에 대한 모독"이라고 표현하며, "(이 교수의 발언을) 얼마든지 내러티브로 구성할 수 있다. 이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이 공영방송"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반면, 조일수 KBS 기자협회장은 발제 내용에 대해 "당사자 의견을 듣거나 약자 목소리를 담는 게 실제 현장에서 쉽지 않지만 저희들이 뼈아프게 새겨들을 대목"이라고 했다. 특히 "KBS는 기계적 균형감 있게 기사를 쓴다. 논설이 없고 해설만 있다. 내부 토론에서도 수십 년간 나오는 얘기다. 다시 한 번 생각을 해보겠다"고 말했다.

아울러 윤 교수의 토론 내용에 대해 "사실 보도를 했으나 진실이 아니라는 입장인데, 진실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한 과정에서 윤 교수와 저와는 소통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견해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지난 5일 '길환영 해임제청안' 표결을 앞두고 KBS 본관 건물 안에서 침묵 시위를 벌이는 전국언론노동도합 KBS 본부 조합원들. ⓒKBS 본부

"'특별다수제'가 시대정신… 여건 안 되면 '사장추천위' 소집해야"

강형철 교수는 '공영방송 자유와 독립을 위한 구상'을 발제했다. 무엇보다 차기 사장 선임 방식에 청중의 관심이 쏠렸다.

강 교수는 △추천위원회, △특별다수제, △여당 과반불가제, △회의록 공개, △공개 검증, △자격 강화, △편성위원회, △낙하산 방지 등 현재까지 나온 사장 선임 제도 개선안들을 소개했다. 그러면서 "사장 선임에 이사회 3분의 2나 4분의 3이 동의하는 '특별다수제'가 시대정신인 것 같다고 했다"고 했다.

그러나 "방송법에서는 이사회 의결을 과반으로 규정했는데, 방송법이 개정이 안 된 상태에서는 특별다수제를 바로 시행하기 어렵다"며 "이사회에서 정관 개정 권한이 있어 정관 개정 얘기도 나오지만, 방송통신위원회 인준이 필요한 사항이라 시일이 걸릴 수 있다"이라고 했다. 코앞으로 다가온 차기 사장 선출 과정에서는 '특별다수제' 도입이 어렵다는 얘기다.

강 교수는 언론단체와 시민단체 등으로 구성된 '사장추천위원회'를 제안했다. 이사회 정관 개정안에 대한 방통위 인준이 늦어질 경우를 염두에 둔 대비책이다. 그는 추천위원회 방식에 대해 "여야 동수 원칙을 준수해 위원회를 구성하고 여기서 단수 후보를 추천해 이사회에서 만장일치 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추천위를 통해 선출된 사장의 '덜 정파적인 성향'이 조직 운영에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도 경고했다. 그는 "덜 정파적인 사장이 오면 과연 그 사람이 복잡한 KBS 조직을 장악할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덜 정파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과 함께 새로운 사장의 리더십을 인정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KBS 내부 구성원에게 당부했다.

이사회에도 "이사들이 보통 사장을 뽑고 '임명의 빚'을 지게 되는데, 이번에 사장을 선임할 때는 (추천위원들이 임명의 빚을) 놔야 한다. 이게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이고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민이 요구하는 사항"이라고 말했다.

차기 사장 선임 방법을 고심 중인 양대 노조 위원장은 강 교수의 사장추천위원회 구성 제안에 모두 '동의' 입장을 밝혔다.

전국언론노동조합 KBS 본부는 강 교수의 제안을 포함해 차기 사장 선출 방식을 묻는 설문조사를 조합원들을 상대로 실시한 뒤, 다음 주 이사회에 결과를 전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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