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 없는 5.18 기념식…수난의 '임을 위한 행진곡'

[현장] 불심검문부터 동원 논란까지…"보훈처 위한 행사"

"아니 그 노래가 무슨 북한 찬양가도 아니고, 겁나 슬픈 노래일 뿐인데. 그걸 대체 왜 못 부르게 한대?"

5.18 광주민주화운동 34주년을 맞은 18일 오전. 망월동 국립 5.18 민주묘역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 박모(62) 씨가 분통을 터뜨렸다. 국가보훈처가 올해도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을 거부하고 이 노래의 제창 역시 금지한 탓이다. 박 씨는 "노래 하나 부르는 게 뭐 그렇게 안 될 일이라고, 부르고 싶은 노래도 못 부르게 하는데 광주 사람 누가 그 행사(정부 공식 기념식)에 가겠나"라고 혀를 찼다.

묘역 일대는 기념식 시작 전부터 경비 인력 일색이었다. 주차장에서 묘역 입구까지, 빽빽하게 늘어선 경찰은 입장을 통제하며 중간중간 '수상한' 참배객들에게 가방을 열어볼 것을 요구하는 등 불심검문을 하기도 했다. 기자 역시 가방 검문을 요구받아 이유를 묻자, 경찰은 "시위 용품이 나와서 그런다. 양해 바란다"고 사과했다.
유족석엔 합창단, 묘역엔 보훈단체...'알바 합창단' 논란도

입장 허가를 받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자, 추모탑 앞에 마련된 행사장 곳곳에 텅 빈 자리들이 눈에 띄었다.

보훈처의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금지 방침에 반발해 5.18 유족들과 5월단체(유족회, 부상자회, 구속부상자회)들이 이날 기념식에 전면 불참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주관하는 공식 기념식에 유족들과 5월 단체들이 불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주인공들이 빠진 빈 자리는 상이군경회 등 보훈단체 회원들과 고등학생, 사복경찰 등이 대신 메웠다. '오월 어머니회' 회원 등 유족들이 앉던 유가족석은 합창단원 일부와 사복 경찰이 차지했다.

▲34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이 18일 오전 광주 5·18민주묘지에서 거행된 가운데 유족과 5월 단체들이 대거 불참해 곳곳에 빈자리가 눈에 띤다. 올해도 국가보훈처는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거부해 유족과 5월단체들이 기념식에 불참하는 등 '반쪽 행사'로 진행됐다. ⓒ연합뉴스

전날 따로 추모제를 진행한 5.18 기념재단과 5월 단체들은 추모제 후 기자회견을 열고 보훈처가 보훈단체 회원 등 '가짜 참배객'을 동원했다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5월 단체들의 '보이콧' 요청에, 야당 정치인들도 대거 기념식에 불참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전날 따로 추념식을 가졌고, 진보당과 정의당 역시 각각 별도의 기념 행사를 진행했다.

박근혜 대통령 역시 기념식에 나타나지 않았다. 통상 대통령 불참 시 총리가 대독했던 대통령 기념사도 국무총리 기념사로 대체됐다. '민주의 문' 앞에서 만난 시민 권모(56) 씨는 "5.18을 이렇게 홀대할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이번에도 합창으로 대체됐지만, 그 역시도 급조된 '전국 연합 합창단'이 불렀다. 행진곡 합창은 통상 광주시립합창단이 맡아왔지만, 보훈처는 최근 수년간 지역사회와의 갈등으로 합창단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어 왔다.

보훈처는 이들을 '전국 연합 합창단'이라고 내세웠지만, 실상은 아마추어 합창단과 예술고 학생, 일반 대학생들로 급조돼 일당 5만 원을 받고 기념식에 투입된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공연 전 제대로 된 연습 한 번 해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6년째 퇴출…수난의 '임을 위한 행진곡'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논란은 이명박 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보훈처는 그전까지는 항상 제창되오던 '임을 위한 행진곡'을 2009년 본 행사에서 밀어내 식전 행사의 공연단 합창으로 편성했고, 2010년 30주년 기념식엔 난데없이 '방아타령'을 공연으로 넣었다가 들끓는 여론에 못 이겨 이를 제외했다. 그러나 '임을 위한 행진곡'은 끝내 제창되지 못하고 악단 연주로 밀려났다.

박근혜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이 노래의 '수난의 역사'는 계속됐다. "특정 세력이 이 노래를 애국가 대신 부르기 때문"(박승춘 보훈처장, 2013년6월20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기념곡으로 지정할 수 없다는 게 보훈처의 논리였다. 지난해 6월 여야는 '임을 위한 행진곡 5.18 공식 기념곡 지정 촉구 결의안'까지 통과시켰지만, 보훈처는 완강했다.

5월 단체들과 각계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이 노래가 정부 공식 기념식에서는 6년째 퇴출된 셈이다.

지난해 기념식에선 합창 순서에 야당 의원들과 5월 단체 회원들이 모두 일어나 이 노래를 함께 불렀지만, 이번엔 이들이 행사에 아예 불참하면서 제창 모습 역시 찾아보기 힘들었다.

정부 행사가 진행되는 동안, 정작 이날의 주인공인 유족들과 5월단체 회원들은 기념식장에 가지 못한 채 묘역 주변만을 맴돌았다. 개별적으로 참배를 한 시민들도 하나같이 이번 기념식이 "말 그대로 관제 행사"라고 입을 모았다. 구묘역 인근에서 만난 참배객 홍모(52) 씨는 "매년 5.18 이곳에 오지만, 이렇게 초라한 행사는 이번이 처음"이라며 "동원된 공무원들 밖에 없는데 저쪽(기념식장)은 쳐다보기도 싫다"고 했다.

대학생 서모(21) 씨 역시 "모두가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하는데 끝까지 안 된다는 이유를 모르겠다"면서 "저런 보여주기 식 행사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같은 시각 일부 단체는 구묘역에서 따로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대회'를 열기도 했다. 진보연대가 마련한 이 행사엔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를 비롯한 당원들과 시민단체 회원, 단체로 참배를 온 대학생들이 참석했다.

정부의 공식 기념식은 25분 만에 종료됐다. 기념식이 끝나자 손학규, 천정배, 천호선 등 야권 정치인들도 개별적으로 참배를 진행했다. 신묘역 참배를 마치고 나선 한 50대 남성은 "임을 위한 행진곡도 못 부르게 하는데, 이게 무슨 국민 통합이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날 기념식의 공식 슬로건은 '5.18 정신으로 국민 화합 꽃 피우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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