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존 공천제도의 문제들
선거제도는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초(定礎)하는 기능을 한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선호와 의사를 누가 어떻게 대리 혹은 대표할지를 결정하는 근본 제도이기 때문이다. 선거제도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따라 양당제와 단독정당정부 등으로 운영되는 승자독식 혹은 다수제 민주주의가 발전해갈 수도 있고, 다당제와 연립정부 등으로 가동되는 권력분점 혹은 합의제 민주주의가 발달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금만 더 자세히 살펴보면 민주주의를 정초한다는 그 중요한 선거제도는 각 정당의 공천제와 밀접히 연결되어 작동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국민의 대리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대개 정당공천을 받아야 유의미한 후보로 선거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사실상 각 정당이 공천한 후보자들 중, 즉 정당이 이미 제한해놓은 범위 내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대리인을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정당의 공천과정이 비민주적이거나 불법적인 경우 민주주의는 그 근간부터 흔들리게 된다.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 그 자체 혹은 국회의원 등 주요 선출직 공직자들에 대한 우리 국민의 불신이 깊은 까닭 중의 하나는 정당공천의 비민주성 때문이다. 지역주의가 여전히 결정적 변수인 영남이나 호남의 지역구 국회의원 선출 경우를 들여다보자. 영남권에선 그게 누구든 새누리당의 공천만 받으면 대개는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호남권에선 새정치민주연합이 공천한 사람이 그리된다. 이 경우 선거는 단지 요식행위일 뿐, 국회의원은 사실상 당내 공천과정에서 선출되는 것이다. 비례대표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다. 정당공천으로 정당명부의 당선 안정권 내에 이름을 올린 후보자들은 이미 그 순간 사실상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다. 두 경우 모두 공천과정이 실질적인 당선자 확정과정인 셈이다. 그러니 당내 민주주의가 엄격히 지켜지지 않는다면 선거에 의한 대의제 민주체제란 허울뿐인 것으로 전락한다.
요컨대, 대의제 민주주의의 실질적 민주성은 상당 부분 공천과정이 얼마나 민주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국민은 87년 민주화 이후에도 비민주적이거나 불합리하게, 심지어는 불법적으로 이루어지는 공천과정과 그 결과인 무능력 혹은 저질 국회의원들의 양산을 너무나도 자주 목격해왔다. 국회의원들과 그들이 하는 정치에 대한 국민 불신은 당연한 일이었다는 것이다. 더구나 그 정당공천제가 한국 정치의 고질병이라고 하는 이른바 보스정치와 계파정치, 혹은 패거리 정치의 원인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진 터이다.
한나라당 사무총장을 지낸 원희룡 전 의원의 증언대로 "특정인을 중심으로 한 특정세력"이 틀어쥐고 있는 정당의 공천권이 바로 "그 (공천)시스템이 우리 정치를 삼류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이다. "당내 권력은 대통령과 차기 대권 주자 그리고 당 대표와 사무총장 등에게 집중된다. 일종의 이너서클인 이들은 당의 가장 중요한 권력인 국회의원 후보 공천권을 사실상 독점하게 된다. (중략) 제아무리 대중들에게 인기 있고 능력 있는 국회의원이라도 다음 선거에서 출마 기회조차 얻지 못하게 것이 바로 공천의 힘이다."1) 그러니 총선에 (재)출마하고자 하는 이들은 공천권을 쥐고 있거나 그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이 소수 실력자에게 줄을 설 수밖에 없다. 보스를 중심으로 한 계파와 패거리는 이렇게 형성되는 것이다. "많은 국민은 진정으로 나를 대변해줄 정치인을 원한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공천 구조와 정당 구조로는 사실상 이룰 수 없는 꿈이다."2)
당내 과두에 의한 공천권 행사의 폐해는 특히 비례대표제의 운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정치와 정책결정 과정에 사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선호와 이익이 최대치로 반영될 수 있는 정치체제를 갖추는 것은 민주사회의 오랜 염원이다. 시민·사회와 학계 등에서 직능, 계층, 소수자 대표성 제고를 위해 비례대표제의 획기적 강화를 부단히 요구해온 까닭이다. 그런데 터무니없이 작은 수의 비례대표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현행 선거제도 아래에서 몇 안 되는 그 비례대표 의원들조차 직능 혹은 계층 대표로서의 자기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지 않는다는 (혹은 못한다는) 비판이 거센 것이 사실이다. 비례대표 공천과정이 소수 실력자와 계파 간 흥정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대표성이 부족하거나 심지어는 부패하고 무능한 사람들도 종종 비례대표 의원이 되곤 한다. 청렴하고 유능한 사람일지라도 일단 비례대표 국회의원이 되면 자신을 간택해준 특정인 혹은 특정세력의 은혜를 무시하긴 어려운 것이 인지상정이다. 결국 공천과정이 지금과 같이 운영되는 한 적임자들이 비례대표 의원으로 선출되어 그들이 당내 권력의 동학으로부터 자유롭게 자신들 소임을 다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국민의 지지에 힘입어 비례대표 의석 비중을 크게 확대하기 위해선 공천제도의 개혁이 선행 혹은 동반돼야 한다는 주장이 십분 타당한 이유이다.
2. 해법이 될 수 없는 완전국민경선제의 도입
물론 그동안 공천제 개혁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002년 이후 국민경선제 혹은 ‘개방형 예비선거제’(open primary)의 도입은 그중 가장 주목을 받아온 해법이었다. 정당의 공천과정에 국민이 직접 개입함으로써 소수 보스에 의한 공천권 독과점 현상이 해소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이 주목받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국민경선제의 부정적 측면에 대한 우려도 상당했다. 사실 일반국민이 특정 정당의 공천과정을 좌지우지한다는 것이 정당정치의 활성화와 대의제 민주주의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특히 완전국민경선제는 결코 바람직한 해법이 아니다. 이미 우리가 여러 차례 경험했듯이, 그 제도 아래에선 낮은 경선 참여율로 인한 대표성의 왜곡, 후보자들 간 거친 상호 비방과 조직 동원, 당 밖 지지의 획득 경쟁으로 인한 당내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과 연대의 약화, 인물 중심의 국민경선에 따른 정당 간 이념 및 정책 차별성의 둔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한다.3)
미국은 개방형 예비선거제 혹은 오픈 프라이머리가 선거제도의 일부로 확립돼있는 나라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것은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미국의 50개주 모두에서 프라이머리, 즉 예비선거의 실시를 법으로 정해놓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중 오픈 프라이머리 즉 일반국민의 경선 참여를 허락하는 개방형 예비선거제를 택하고 있는 주는 1990년 현재 23개 주에 불과하다.4) 나머지 주의 다수는 당원만 혹은 당원과 ‘정당 연계자’(party affiliate)만이 참여하는 폐쇄형 예비선거제 즉 ‘클로즈드 프라이머리’(closed primary)를, 그리고 그 남은 소수가 중간형태의 예비선거제를 운영하고 있다. 미국에서도 완전국민경선제의 실시는 위헌의 소지가 있다는 논란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그에 대한 반론이 상당히 거세다.5) 외부 개입으로 인해 정당 고유의 결사 자유 침해, 당원 권리 훼손, 대표성 왜곡과 정당 조직 약화 등의 문제가 야기될 수 있다는 것이 주요 논거이다. 오픈 프라이머리를 허용하고 있는 주가 전체의 반에도 못 미치는 까닭 중의 하나도 바로 이러한 부정적 시각이 팽배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많은 문제 중에서도 국민경선제의 핵심 문제는 그것이 대의제 민주체제의 골간인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약화할 수 있다는 데에 있다. 정당은 영어로 파티(party)라고 불리는 바와 같이, 사회 전체가 아니라 사회의 부분(part) 이익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정당은 국민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대표하는 계층이나 집단의 선호와 이익을 관철하고 수호할 책임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의 주요 계층과 집단들이 모두 자신들을 대표하는 그러한 정당을 갖고 있고, 그 정당들 모두가 자기 고유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충실히 지켜나갈 때, 사회전체의 집합적 이익은 그 정당 간 대화와 타협, 절충과 협의로 형성되고 유지된다는 것이 대의제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것이다. 그런데 국민경선제는 정당의 이 부분, 이익 대표성을 훼손할 가능성이 크다.
각기 노동과 자본을 대표하는 두 정당이 존재하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만약 일반국민이 그 두 정당의 국회의원 후보들을 모두 결정한다면, 각각 노동과 자본의 이익을 제대로 대리할 수 있는 차별화된 자질과 능력을 갖춘 후보들을 내세워야 할 양 정당이 어떻게 그러한 후보들을 구분하여 본선에 내보낼 수 있겠는가? 소속 정당만 다를 뿐 결국 본선 진출 후보들은 모두 소위 ‘국민후보’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진보파 정당과 보수파 정당의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찾을 수 있겠는가? 어느 당의 후보로 나가길 원하든 모든 경선 출마자들은 자기 정당이 대표하는 특정 사회집단이 아닌 일반국민을 대상으로 한 경쟁에 돌입할 것이며, 그들이 그러는 만큼 각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은 약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정당의 공직 후보자들은 원칙적으로 당원과 그 당의 지지자들이 걸러내야 한다. 그래야 각 정당이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며 고유의 이념과 정책 기조로 경쟁할 수 있고, 그럼으로써 대의제 민주주의가 균형 있게 작동할 수 있다.
기존 공천제도의 폐해에 대한 해법으로서 완전국민경선제보다 더 과격하고 더 ‘반(反)정당정치’ 혹은 ‘정치의 탈(脫)정당화’ 조치에 가까운 것은 공천제의 폐지이다. 그것은 정확히 빈대 잡자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에 해당한다. 당연한 얘기를 새삼 강조하자면, 공천 그 자체는 전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정당공천제는 정당을 통해 이루어지는 대의제 민주주의 작동의 필수 요소이다. 문제는 (중앙과 지방 차원에서) 소수실력자가 공천권을 전횡한다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공천과정을 당내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개혁할 일이지, 그것을 일반 국민에게 떠넘기거나 아예 없애버릴 일은 결코 아니다.
3. 민주적 공천제도의 법제화 필요성
민주적 공천제도의 확립은 한국의 모든 정당에 요구되는 개혁 과제이다. 후보를 내는 정당들 모두의 공천과정이 민주적으로 이루어져야 그 후보들을 놓고 치러지는 선거와 그 결과에 따라 구성되는 의회 및 정부의 민주성을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정당으로 하여금 민주적 공천제를 시행케 할 수 있는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방법은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다. 공천은 자율적 결사체인 정당의 내부 결정에 해당하는데 그 과정을 국법으로 규제하자는 것은 위헌적 발상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정당 후보의 최종 결정과정을 법제화해놓은 미국이나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그러한 반론을 다음과 같은 논거로 극복한 바 있다. 즉 “비민주적이고 불법적인 공천관행은 곧 비민주적인 국가구성과 직결되므로 정당공천은 정당의 내부사항이 아닌 공직선거과정의 일부”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6)
한국의 선거법은 제47조에서 “정당이 (중략)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민주적 절차에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을 뿐 어떻게 해야 ‘민주적’ 절차인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은 다르다. 독일 연방선거법 제21조는 소선거구의 후보는 당해 선거구의 당원총회나 대의원회의 비밀투표를 거쳐 선출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으며, 동법 제27조는 비례대표명부에 등재하는 후보자 및 그 순위에 대한 정당내부의 결정 역시 소선거구 후보자 결정절차에 따라 당원총회나 대의원회의 비밀투표에 따라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의 선거법이 이 정도로만 구체화한다면 소수 유력자에 의한 공천권의 전횡과 그에 따른 여러 폐단은 상당히 줄어들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미국의 모든 주도 정당의 개방형 혹은 폐쇄형 예비선거 실시를 법으로 정하고 있다. 그러한 곳에서의 공천과정에선 보스나 계파의 선호가 영향을 발할 수 있는 여지가 별로 없다. 한국의 선거법에도 독일이나 미국의 다수 주에서와같이 (준)폐쇄형 예비선거의 실행이 명문화돼야 할 것이다.
4. 폐쇄형 예비선거제의 도입에 따른 현실 문제들
다만 그 경우, 즉, 각 정당의 후보자 결정은 당원총회나 대의원회의 비밀투표에 의한다는 내용의 법제화가 이루어질 경우, 한국적 현실에선 그것에 선행하거나 병행하여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있다. 세 가지만 거론하자면, 그 첫 번째는 대의원의 당원 대표성과 관련된 문제이다. 한국의 주요 정당들에서 대의원 임명권은 사실상 당원들이 아니라 해당 지역의 국회의원 또는 지역위원장이 쥐고 있다. 만약 특정 지역의 국회의원이나 지역위원장이 당내 어느 계파의 소속원일 경우 그 지역 대의원회의 결정은 결국 그 계파의 입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구조다. 그렇다면 당원들의 의사를 대표하기보다는 지역위원장이나 그가 속한 계파의 의지를 관철하는 역할에 그칠 가능성이 큰 그런 대의원회에서 지역구 후보를 결정한다는 것은 민주적 공천제도의 법제화 취지에 전혀 맞지 않는 일이다.
두 번째는 후보 난립과 관련된 문제이다. 물론 지금까지의 관행이던 중앙당 ‘공심위’에 의한 경선 출마자 압축과정은 그 자체가 당내 실력자들 간의 힘겨루기 과정이었다. 소수에 의한 독과점적 공천권은 바로 그 자리에서 가장 적나라하게 행사돼왔다. 그러나 압축과정 없이 경선에 모든 후보가 출마할 경우엔 그와는 또 다른 문제들이 발생할 수 있다. 우선 ‘소수대표’(minority representation)의 문제이다. 수많은 후보가 난립하게 되면 표가 널리 분산됨에 따라 1등 후보자의 득표율이 50%를 넘는 경우는 매우 드물게 된다. 1당 1후보 원칙에 의해 치러지는 국회의원 본 선거에서도 30% 내외의 득표로 1등으로 당선되곤 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아무런 원칙 없는 예비선거에선 20%대나 심지어는 10%대의 낮은 득표율로도 정당 후보가 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가령 25%의 득표로 당선된 경우라면 그 후보는 사실 지역구 당원들의 대다수인 75%가 반대하거나 지지하지 않은, 즉 오직 소수를 대표하는 후보일 뿐이다. 원리적으로는 지역구 대표성, 현실적으로는 본선 경쟁력에 대한 의구심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또한 수많은 후보자 중 1등만을 골라내는 예비선거는 지명도나 인지도가 높은 현역의원 또는 지역 명망가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선거구조가 되므로, 자칫 당원 인기투표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그 경우 부분 이익에 대한 정당의 대표성과 책임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데에 크게 기여 할 수 있는 가치 지향성이나 정책 전문성이 뛰어난 후보들, 특히 신인 정치인들에겐 상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이 되고 만다.
마지막으로 거론해야 할 것은 진성 당원의 부족과 당원의 불균형적 분포 문제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이든 새누리당이든 주요 정당들의 당원수는 지속적인 감소세 혹은 정체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미 위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가치와 정책 중심의 정당정치 활성화를 위해서는 독일과 미국의 다수 주에서 시행하고 있는 폐쇄형 예비선거제도가 가장 바람직한 공천제도임이 틀림없다. 당의 이념과 정책기조를 공유하고 있는 당원들과 대의원들이 자신들의 대표를 외부 개입 없이 스스로 뽑아 본선에 내보내는 것은 결사권 행사차원에서도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정당들은 당원을 충분히 보유하지 못하고 있다. 당원과 대의원들 만에 의한 폐쇄형 예비선거제도를 운영하기엔 당원 구조가 너무 취약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새누리당은 영남인들 그리고 새정치민주연합은 호남인들이 각기 진성 당원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 상황에서 대통령 후보나 전국구 비례대표 후보자 선출을 위한 예비 선거를 폐쇄형으로 치를 경우 양당은 가치와 정책 중심 정당으로 발전해가기는커녕 각각 영남당과 호남당으로서의 정체성만 더욱 강해질 것이다.
5. 준(準)폐쇄형 예비선거제도의 도입과 동반 과제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이른바 준(準)폐쇄형 예비선거제도를 법제화해야 한다. 그 제도의 핵심은 후보자 선출을 위한 비밀선거에 당원과 대의원 외에 ‘등록 지지자’(registered supporter)의 참여를 허용하는 것이다. 특정 정당의 당원이 되길 꺼리는 시민들, 특히 젊은이들의 그러한 경향을 주어진 현실로 인정하는 가운데 그들의 정당정치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선 당원이 아닌 단순 등록자로 그들을 최대한 끌어안아야 한다는 취지이다. 그렇다면 선거법 제47조는 “정당이 (중략) 후보자를 추천하는 때에는 지역구 또는 전국구의 당원총회나 대의원회의 비밀투표 결과에 따라야 한다. 단, 소정 절차에 따라 정당 지지자로 등록된 자의 투표권 부여 여부와 그 상대적 비중은 당헌당규로 정할 수 있다.”는 정도로 개정돼야 할 것이다.
지지자로 등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정당이 운영하는 각종 온라인 플랫폼에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정당이 지정한 특정 교육과정에 수강생으로 참여하는 것, 그리고 정당이 발행하는 정기 뉴스레터 등의 구독자로 이름을 올리는 것 등이 그 예들이다. 정당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다양한 등록 방법을 개발하여 어떻게든 많은 수의 등록 지지자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유의미한 예비 선거를 치를 수도 있고, 보다 장기적으론 체계적인 당원 증대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같은 준폐쇄형 예비선거제를 도입할지라도 대의원의 선거 참여를 배제할 수 없는 한 상기한 첫 번째 문제, 즉 대의원의 당원 대표성 결핍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사실 이는 예비선거제도의 민주성 확보라는 특정 목표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정당 민주주의의 확립이라는 일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해법은 간단하다. 예컨대, 5인 혹은 10인 이상의 당원들이 뜻을 같이하면 언제든 자신들을 대표하는 대의원 1인을 뽑을 수 있고, 그렇게 뽑힌 대의원들이 다시 지역위원장을 선출하는 구조로 간다면 그야말로 “풀뿌리 당원이 주인이 되는” 민주 정당으로 발전해갈 수 있고, 거기서 대의원의 당원 대표성 문제는 당연히 사라진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지역위원장의 핵심 기득권인 대의원 임명권을 박탈하고 대신 이러한 상향식 당직 선출제를 확립할 때 민주적 정당과 민주적 공천과정의 발전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기한 두 번째 문제에 대한 해법도 마련해야 한다. 이에 대해서는 소위 ‘새정치비전위원회 안’을 참조할 만하다.7) 그 안에 따르면, 중앙당의 공심위는 객관적 기준에 따른 자격 심사만을 하고, 토론과 면접 등을 통해 후보자의 자질과 능력을 검증한 후 예비경선의 참여자 수를 압축하는 역할은 ‘공천배심원단’에게 맡겨진다. 지역구 예비후보를 (2명으로) 압축하는 공천배심원단은 당해 지역구의 당원과 ‘등록 지지자’ 중 추첨으로 무작위로 선정한다.8) 비례대표 후보자에 대한 검증 및 압축 과정 역시 지역구 절차에 따라 이루어진다. 단, 비례대표 명부작성을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할 경우엔 중앙 공천배심원단, 권역별로 할 경우엔 권역 공천배심원단을 구성한다. 그리고 지방자치선거에 나가는 후보의 공천과정도 시․도당 공천배심원단의 구성과 준폐쇄형 예비선거의 시행 등으로 진행된다. 이렇게 할 경우 당내 과두나 유력 계파의 공천과정 개입을 봉쇄할 수 있을뿐더러 예비 선거에서 발생할 수 있는 소수대표의 문제를 미리 방지하고 그것이 인기투표로 전락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대의원 및 지역위원장의 상향식 선출 방안 마련, 공천배심원제의 도입, 그리고 준폐쇄형 예비선거제도의 법제화 등을 요청하는 민주적 공천제도의 확립은 매우 어려운 과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 과제를 완수해내지 않는 한 당내 민주주의는 물론 한국의 대의제 민주주의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특히 비례대표제의 강화를 통한 합의제 민주주의 발전은 요원한 일이 된다. 어려우나 반드시 달성해내야 할 개혁과제이다.
1) 원희룡. 2014. 『무엇이 미친 정치를 지배하는가』 (서울: 이와우). pp. 21-22.
2) ibid. p. 25.
3) 박수형. 2013. “국민경선제는 왜 민주주의 정치에 기여하지 못하는가?” 최장집․박상훈․ 박찬표 외. 『논쟁으로서의 민주주의』 (서울: 후마니타스). pp. 259-274.
4) 이상돈. 2010. “미국의 프라이머리(예비선거) 제도에 관한 연구” 『법학논문집』 34집 3호. p. 14.
5) ibid. p. 33.
6) 박상철. 2008. “정당공천의 헌법적 쟁점과 개선방향: 국회의원 공천제도의 비교법적 분석” 『공법학연구』 9집 2호. pp. 113-114.
7) 새정치비전위원회. 2014. “민주적 공천제도의 확립을 위한 이중과제: 법제화와 공천배심원제의 도입.” 『국민을 위한 새정치』 (서울: 새정치민주연합)
8) 새정치비전위원회 안에는 후보를 “2명으로” 압축한다는 제한이 없으나, 필자는 2명으로 한정하는 것이 적어도 상기 문제에 관한 한 더 적절한 해법이라고 생각한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