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터리 2천 권 읽고 나면 당신도 이미 소설가!

[윤영천의 '하우, 미스터리'] S. S. 밴 다인의 <그린 살인 사건>

1.
"탐정 소설은 일종의 게임인 동시에 스포츠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는 독자에 대해 공정함을 유지해야 한다. 작가는 브리지 게임을 할 때 사기가 허락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속임수나 책략 따위에 의존해서는 안 되며, 순수한 창의력만으로 독자의 의표를 찌르고 독자의 흥미를 끌어야 한다. 탐정 소설을 쓸 경우에는 매우 명확한 법칙들이 존재한다. 이것들은 성문화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구속력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존중받는 동시에 자긍심을 갖춘 문학적 미스터리의 작가라면 모두 이 법칙들을 준수한다." - <파일로 밴스의 정의>(S. S. 밴 다인 지음,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펴냄)

▲ <파일로 밴스의 정의>(S. S. 밴 다인 지음, 김상훈 옮김, 북스피어 펴냄). ⓒ북스피어
1928년, 미국의 미스터리 작가 S. S. 밴 다인은 '탐정 소설을 쓰기 위한 스무 가지 규칙(Twenty Rules For Writing Detective Stories)'을 <아메리칸 매거진(The American Magazine)>에 발표했다. '위대한 작가들의 관습에 입각하고, 성실한 작가의 내적 양심에서 본능적으로 우러나온' 이 신념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단서는 공정하게 제시할 것, 2. 독자를 기만하지 말 것, 3. 연애 요소는 배제할 것, 4. 탐정이나 수사 주체를 범인으로 하지 말 것, 5. 논리적 추론을 기반으로 할 것, 6. 탐정을 등장시킬 것, 7. (확실히 죽은) 시체를 등장시킬 것, 8. 사실적인 수단으로 수수께끼를 해결할 것, 9. 탐정은 한 명으로 제한할 것, 10. 범인은 텍스트 내에서 일정 역할을 지닐 것, 11. 의심할 수 없는 인물을 범인으로 설정하지 말 것, 12. 범인은 한 사람으로 할 것, 13. 비밀스러운 조직을 개입시키지 말 것, 14. 살인 방법의 수단은 합리적이고 과학적일 것, 15. 문제의 진상은 항상 명백할 것, 16. 장황한 묘사나 문학적인 기술을 피할 것, 17. 범죄자는 아마추어일 것, 18. 사고와 자살 같은 우연을 배제할 것, 19. 동기는 개인적일 것, 20. 너무 흔한 수법은 피할 것(담배꽁초, 강령술, 가짜 지문 등)

2.
90여 년 가까이 흐른 지금, 저 규칙들을 모두 준수하는 미스터리 작품은 아마 눈 씻고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시기의 가장 그럴 듯한 작품을 가져와도 사정은 마찬가지일 듯하다. 장르 소설을 구분 짓는 가장 큰 특징은 '규칙성'이다. 미스터리는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규칙이 많은데, 그 대부분이 황금기에 만들어졌다.

황금기의 미스터리는 '사회성'과 점점 멀어져 마침내 '동화' 같아졌다. 작품 속 모든 요소는 '수수께끼와 그 놀라운 해결'에만 집중됐으며, 생동감을 불어넣을 만한 다양한 현실적인 면들은 보수적인 관점 아래 아예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작가들은 미스터리 소설을 진지한 문학이 아니라 독자와 벌이는 '별도의 게임'이라고 생각했고 결과적으로 미스터리 장르는 틀에 갇혀 딱딱하게 굳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 시기는 게임을 즐기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즐거운 시절이었다. (현대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도 아련한 향수의 지점이다.) 거만한 명탐정과 사악한 범죄, 기묘한 수수께끼가 흥겹게 어우러지고 오래도록 기억되는 걸작 장편들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3.
▲ <위대한 탐정 소설>(윌리엄 헌팅턴 라이트 지음, 송기철 옮김, 북스피어 펴냄). ⓒ북스피어
감히(?) 규칙을 제안한 S. S. 밴 다인은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작가였다. 문학, 미술, 음악 등 문예 전반에서 왕성한 비평 활동을 보였던 윌리엄 헌팅턴 라이트는 삼십 대 중반 과로로 장기 요양을 하게 되는데, 그 이후 미스터리 작가로 변모하더니 너무나도 완벽한 탐정 파일로 밴스와 함께 S. S. 밴 다인이라는 이름으로 화려하게 등장한다.

이 2년 동안의 요양 기간에는 전설과도 같은 일화가 남겨져 있다. 과로를 염려한 그의 담당 의사는 미스터리 소설 같은 가벼운 독서만 허락했고, 타고난 비평가였던 밴 다인은 병상에서 2000권의 미스터리 소설을 체계적으로 읽어낸다. 결점투성이 작품들이 잘 팔리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밴 다인은 마침내 1926년 첫 작품 <벤슨 살인 사건>(S. S. 밴 다인 지음, 김재윤 옮김, 황금가지 펴냄)을 발표하게 된다.

사실, 730일 동안 2000권 독파는 고개를 갸웃할 만한 일이다. 게다가 그때까지 출간된 전 세계의 미스터리 소설이 채 2000권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어서, 오로지 밴 다인만이 증명할 수 있는 이 일화는 어느 정도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그가 당대 누구보다 많은 작품을, 그것도 꼼꼼히 읽었다는 사실을 의심할 필요는 없다. 1927년에 본명으로 발표한 앤솔로지 <위대한 탐정 소설(The Great Detective Stories)>(송기철 옮김, 북스피어 펴냄)은 아직까지도 탁월한 미스터리 연구 사례로 기억된다.

제대로 된 미스터리 작가라면 여섯 작품 이상 쓸 수 없다던 밴 다인은 일생 동안 총 열두 작품을 남겼다. 평론가든 독자든 전작(全作)에 대한 평가는 대부분 일치하는데, 초기 작품들이 특히 뛰어났다. 1928년 작 <그린 살인 사건>(안동림 옮김, 동서문화동판 펴냄)은 밴 다인의 세 번째 작품으로, 그가 개요를 정리해 출판사 문을 두드리던 시절 탄생된 세 권 중 하나이다.

탁월한 비평가적 성향과 놀라운 박식함, 기존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열정, 미스터리 장르를 꿰뚫고 있다는 한없는 자부심이 똘똘 뭉친 <그린 살인 사건>은 초판 6만 부가 매진됐으며 미스터리 소설로서는 처음으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다. 밴 다인 인생의 정점이자, 미스터리 장르에 있어 미국 시장이 화려하게 재조명된 인상적인 순간이었다.

4.
<그린 살인 사건>은 100년이 넘은 유서 깊은 그린 저택에서 시작된다. 어느 날 저녁 그린 집안의 두 딸이 총에 맞는 사건이 발생한다. 막내딸 에이더는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큰딸 줄리아는 목숨을 잃는다. 3분의 간격을 두고 발생한 두 방의 총성.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범인은 때마침 쌓인 눈 위에 발자국만 남긴 채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절도설을 주장하는 경찰이 못 미더웠던 그린 가의 맏아들 체스터 그린은 지방검사국을 직접 찾아 나서고, 친구 마크햄 검사와 담론을 나누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던 (역대 최고의 현학성을 뽐내는 왠지 얄미운 유한(有閑) 탐정) 파일로 밴스는 사건에 자문으로 참여한다.

▲ <그린 살인 사건>(S. S. 밴 다인 지음, 안동림 옮김, 동서문화동판 펴냄). ⓒ동서문화동판
그린 가문의 아들딸들은 서로를 증오하고 있었다. 전신 마비 환자인 그린 부인은 쉴 새 없이 악담을 퍼붓고 고용인들조차 수상한 분위기를 잔뜩 풍긴다. 그럼에도 이들은 작고한 트바이어스 그린의 이상한 유언장 때문에 25년 동한 한 집에서 살아야 할 운명이었다.

흉기는 체스터 그린의 32구경 총으로 밝혀지지만 그조차 같은 흉기로 살해당하고, 주치의를 범인이라고 열성적으로 지목하던 둘째 아들 렉스 또한 이마에 총을 맞은 시체로 발견된다. 그 와중에 주치의가 소지하고 있던 극약이 도난당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이틀 후 막내딸 에이더와 그린 부인이 독약을 먹는다. 파일로 밴스의 면밀한 주의 덕분에 에이더는 살아남지만 노부인은 끝내 목숨을 잃는다.

이제 그린 집안에 남은 이들이라고는 막내딸 에이더와 둘째딸 시벨라뿐. 집안의 구성원 모두를 죽이려는 듯한 끔찍한 살인자가 내부에 있음을 확신한 파일로 밴스는 마지막 연결 고리를 발견하고 한 가지 가설을 세운다.

5.
한 가문의 멸망기라 불러도 좋을 기괴한 연쇄 살인은 거침없이 진행된다. 밴 다인은 특유의 현학성으로 혼을 빼놓은 후에 유력한 용의자를 족족 처단하며(?), 게임에 참가하는 독자의 의지를 차례차례 꺾어 놓는다.

<그린 살인 사건>이 걸작으로 분류되는 이유는 집착이라고 해도 좋을 만한 완벽한 구성 때문이다. 파일로 밴스는 수수께끼가 해결되기 직전, 사건들을 97개의 항목으로 정리하고 그 항목들을 시간 순으로 재배치해 범인을 지목해낸다. 거꾸로 생각하면 시간 순으로 배열된 97개의 항목들은 밴 다인이 구상한 <그린 살인 사건>의 전체 개요이며, 그 개요를 교묘하게 흐트러뜨리고 공정하게 단서를 배치함으로써 하나의 '게임'이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수수께끼와 그 해결 외에 모든 요소는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밴 다인의 이러한 태도는 경외감이 느껴질 정도로 당당해 보인다. 스스로 제안한 스무 가지 법칙을 모두 만족한 <그린 살인 사건>은 어떻게 보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미스터리일지도 모르겠다.

한편, 기묘한 수수께끼와 그걸 지탱하는 플롯만으로 구성된 황금기의 작품들은 스스로 한계를 만들고 있었다. 결국 그에 대한 반발이 일어나고 미스터리 장르는 다른 가지를 뻗기 시작한다. 그 가지 중 굵직한 하나를 우리는 흔히 '하드보일드'라고 부른다.
함께 읽어볼 만한 작품들

-<위대한 탐정 소설>
본업이 비평가였던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스스로 만들어낸 미국 미스터리 황금기 이전의 작품들을 평한 글이다. 그는 수많은 작품의 장단점을 차례차례 논평하는데 유럽 대륙은 물론 스칸디나비아반도까지 아우른다. 윌러드 헌팅턴 라이트가 갖고 있는 '탐정 소설'에 대한 확고한 범주 그리고 탐정 소설에 대한 열정을 살필 수 있다.

▲ <비숍 살인 사건>(S. S. 밴 다인 지음, 최인자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비숍 살인 사건>(S. S. 밴 다인 지음, 최인자 옮김, 열린책들 펴냄)
마더 구스의 동요에 맞춰 일어난 연쇄 살인. 경찰의 수사를 비웃기라도 하듯 유력한 용의자는 차례차례 시체로 발견되고 시민은 공포에 사로잡힌다. S. S. 밴 다인의 네 번째 작품으로, 초기 걸작의 경향을 마무리 짓는 작품이기도 하다. 현학적인 등장인물과 복잡하고 현란한 고도의 플롯, 심리학적 성찰이 돋보인다.

-<흑사관 살인 사건>(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북로드 펴냄)
그 유명한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 중 한 권. 밴 다인의 현학성이 마음에 쏙 든다면 한번 도전해볼 만한 작품이다. 후리야기 가문의 건물 흑사관을 무대로 한 기괴한 연쇄살인을 명탐정 노리미즈 린타로가 도전한다는 내용인데, 그야말로 인지 능력을 초월한(?) 현학성을 보여준다. 별도의 주석서가 필요한 수준의 작품이며 다 읽어낼 경우 극도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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