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해결, 평화협정이 답이다

[재미동포 의사가 본 통일 미래상]<3> 남북 간 걸림돌, 북핵문제

찬란한 남북연합방 경제공동체 청사진과 민족사 최고에 이를 경제번영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도 이를 현실화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남북의 지도자들이 뚜렷한 통일의 미래상을 떳떳하게 제시하지 못하고 있고, 둘째는 조국을 둘로 갈라놓고 그 사이에 틀어 앉은 미국의 굴레에서 남북이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이 끝난 지 61년째인데도 평화체제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난 20년 동안은 북핵 때문에 안 된다고 논란하고 있다. 평화협정이 되었더라면 북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핵 없던 40년(1953-1993), 핵 의혹만 있었던 11년(1994-2005) 동안에는 왜 안 되었을까? 평화협정과 북핵 개발의 전후 관계를 살펴보면 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 지난해 2월 12일 북한 조선중앙TV는 '제3차 지하핵시험을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발표했다. ⓒ조선중앙TV=연합뉴스

1953년 정전협정에는 3개월 안에 참전유관국회의를 열어 한반도에서 외국 군대의 철수와 평화적 해결을 논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2개월 뒤 협정을 위반하며 남/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미군의 영구주둔을 규정했다. 1958년 북은 중국군을 완전 철수시킨 반면 미국은 남녘에 6만 미군과 핵무기를 배치하고 북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1960년 북은 남에게 평화협정을 제안했다. 그 뒤 되풀이해서 외국군 철수와 평화협정을 제안했으나 남은 응하지 않았다. 1974년 남이 북에 불가침협정을 제안하자 북은 군사지휘권이 없어 평화협정 제안에 응하지 못한 남이 불가침협정은 어떻게 담보할 수 있느냐며 실권을 행사하는 미국에 ‘북미평화협정’을 제안했다. 이에 미국은 1978년 북남이 먼저 대화하고 그 뒤 남북미 3자회담을 제안하자 북은 1984년 남과는 불가침조약, 미국과는 평화협정을 역제안했으나 남도 미국도 응하지 않았다.

1990년 공산권이 붕괴되자 남북은 1991년 유엔에 따로 가입하고 북은 유엔회원국 앞에서 주한유엔군사령부 해체, 미군 철수, 북미평화협정을 다시 제기했다. 남북은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고, 미국은 남녘에서 핵무기를 철거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핵잠수함과 핵폭격기는 남녘에 드나들며 핵우산을 제공하는 3만 미군이 지금도 주둔하고 있다. 전력 생산을 위해 1992년 북이 핵발전소 건설을 계속하자 미국은 핵무기 개발 의혹을 제기하며 팀스피릿 대북미한합동전쟁연습을 재개하자 1993년 북은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 의사를 발표했다. 이에 김영삼 정부는 “핵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며 북핵문제 협상에 스스로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북핵은 북·미 사이의 문제가 되었다.

남이 북핵 문제 해결에 아무런 역할도 못하게 되자 클린턴 정부가 1994년 북과 ’기본합의’를 했다. 내용은 북의 중수로를 동결하면 10년 안에 100만 킬로와트 경수로 2기를 남한의 경비로 건설해 주고, 경제제재를 완화하며 국교를 정상화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공산국가들처럼 붕괴를 예상했던 북이 흔들림이 없자 미국은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기 시작했다. 기본합의를 관장하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보스워스(S. Bosworth)총장은 이런 사실을 “기본합의는 서명한지 2주일도 안돼 고아가 되었다(The Agreed Framework was a political orphan within 2 weeks after its signature.)”고 했다. 북은 미국에 합의 사항 이행을 압박하기 위해 1998년 태평양 너머로 미사일을 발사함으로써 복합적 의미가 있는 무력시위를 했다.

1998년 출범한 남의 김대중과 북의 김정일 정부가 화해·협력을 표방하고 2000년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선언을 내왔다. 남북 사이에 교류가 활발해지자 일본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2002년 9월 중순 북·일정상회담을 하고 수교를 위한 평양선언을 했다. 이에 놀란 미국 부시 정부는 10월 초 켈리(J. Kelly)를 평양에 보내서 북에 우라늄 고농축 의혹을 제기하고 귀국한 뒤, 북이 핵무기 개발을 시인했다고 일방적으로 발표했다. 그리고 ‘기본합의’를 파기했다. 중수로 동결 8년에 북은 빈손이 된 채 당했다. 이를 보고 북미 기본합의 협상팀에 참여했던 국무부의 위트(J. Witt)는 “북미 합의의 기념물은 콘크리트로 메워진 두 개의 거대한 구덩이뿐이었다.” 라고 했다.

이에 북은 2003년 초 NPT에서 탈퇴했다. 그 해 3월, 핵개발을 저지한다며 핵 없는 이라크를 침공하는 미국을 본 북은 핵무장만이 나라를 지킬 수 있다고 확신했던 모양이다. 마치 197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패퇴하는 미국을 본 남녘 박정희 정부가 자주국방을 위해 핵무기개발을 비밀리에 시작했던 것처럼 말이다. 북은 이때부터 핵개발에 적극 나선 모습이었다. 퇴임 뒤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북이 1994년 북미 기본합의를 안 지킨 것은 없다.” 고 했다.

대북 강경적인 보수 부시 정부는 중국을 앞세워 2003년 일본과 러시아도 참여하는 6자회담을 출범시켰다. 중국 주도의 6자회담에서 ‘Korea반도’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모색할 2005년 9.19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날 미국은 돈세탁 의혹을 제기하며 마카오은행 북 계좌를 동결했다. 무고한 이 조치에 대항해 북은 2006년 7월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10월 제1차 핵시험으로 맞섰다. 다시 협상이 시작되었고 2007년 2.13과 10.3 원자로 불능화 합의 등에 따라 2008년 북은 영변 핵발전소 냉각탑을 공개 폭파했다.

2007년 10.4 남북 평화번영합의를 한 노무현 정부에 이어 2008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자 남북 정상이 발표한 6.15, 10.4선언 무력화를 시작했다. 한편 집권하면 북과 직접대화 하겠다던 오바마 정부가 2009년에 출범했으나 김정일 위원장의 건강문제로 북의 붕괴를 기대한 남녘 정부가 반대하자 ‘전략적 인내’ 정책으로 돌아섰다. 이에 북은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을 압박하기 위해 2009년 4월 인공위성 실은 미사일 발사에 이어 5월에는 제2차 핵시험 시위를 했다. 유엔안보리는 미국과 남의 주도로 제2차 대북제재 조치를 채택하고 북의 평화협정 체결 요구를 무시하는 정책을 계속 했다.

이런 역사가 지난 60년 동안 북·미 사이에 되풀이되어온 미국의 핵위협 - 평화협정 제안-불응- 미사일 발사- 핵개발 의혹- 북미기본합의- 파기- 핵 시험- 유엔 안보리 제재 반복의 요약이다. (<통일의 날이 참다운 광복의 날이다 - 밖에서 본 한반도>, 오인동 지음, 솔문 펴냄, 2010) 그러면 평화협정과 핵개발 문제로 합의했던 사항을 어긴 쪽은 누구 인가?

미국은 북, 북은 미국이라고 한다. 약육강식이 국제관계 역학의 상식이라는 말도 무색하게 남녘 보수정부와 수구언론에선 언제나 미국의 주장을 따라 복창해 왔다. 한편 부시 정부의 라이스 국무장관 조차 미국이 "축구경기 도중 골대를 옮긴다 (Moving the goal posts in the middle of a football game)"는 말도 했다. 즉 합의 내용 바꾸기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이 합의 사항을 어기면 북이 미사일이나 핵시험 시위로 협상을 압박하는 것을 미국은 북의 ‘벼랑 끝 전술’이라 했다. 6자회담에서 북과 미국이 벌여온 논쟁과 타협과정을 지켜본 남녘정부의 목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미국이 합의를 지키지 않은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남녘 지도계층이 “북의 도발-제재-타협-보상의 나쁜 버릇을 더 이상 묵과 할 수 없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미국 정부 관료들은 어떻게 듣고 있을까? 최근 오바마 정부 국가안보회의 베이더 국장의 저서, 에 미국은 “궁극적으로는 북 정권 붕괴와 남의 흡수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단기, 중기적으로는 근본적 해결 아닌 협상과 대화를 통해 시간을 지연시킨다는 ‘전략적 인내'였다”고 했다. 이렇게 미국 정부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주장들을 역대 여러 관료들조차 말 할 수 있는 것이 미국의 성숙한 민주주의 언론의 자유이고 여유다. 이런 양심적 애국 인사들로 인해 미국은 그나마 체면을 유지하지만 계속 세계의 패권을 주도하고 있다.

미국의 Korea 전문가 씨갈(L. Sigal)이 말하는 북미 사이의 Tit For Tat(치고받고,티격태격) 의 반복을 돌이켜 보면 북의 핵개발을 저지하겠다는 미국 주장의 진정성에 의심마저 생긴다. 왜냐하면 미국이 합의 사항 이행을 지연시키거나 ‘골대를 옮겨’ 다시 협상해 합의하고 또 파기하는 동안에 북의 핵미사일 능력은 높아져만 갔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의도적이 아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북에 핵 미사일 개발을 은근히 강요해온 셈이 아닌가.

2012년 북은 헌법 전문에 핵 보유를 명기했고 드디어 실용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유엔안보리가 또 제재결의를 채택하자 북은 2013년 봄, 경량화·다종화 했다는 제3차 핵시험을 했다. 그 뒤 미국은 대북 미·한 합동전쟁연습에 스텔스폭격기를 동원해 핵탄 투하연습까지 했다. 이에 북은 ‘핵대핵 대결’을 선언하고 ‘정전협정 백지화’와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을 무효화 했다. 그리고 또 새로운 유엔 대북제재조치가 뒤따랐다. 정의든 불의든 15개 유엔안보리 국가들도 각기 국익에 따라 패권 미국의 주도를 따르고 있다. 핵 없던 이라크, 핵 개발 중도 포기한 리비아가 침공당했고 핵 개발하는 이란이 위협받고 있다. 유엔도 언제나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만도 않은 현실 세계이다.

이와 같이 미국 국익에 따라 세계 질서를 유지하느라 북미평화협정 체결을 이런저런 이유와 상황변화로 무시, 기피, 거부해 오다 보니 미국은 결국 우리 겨레의 한쪽에 핵미사일을 선물한 셈이다. 그러나 미국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해 강요된 선택으로 개발한 북핵은 지역 평화를 위협하니 폐기되어야 한다고 미국은 또 주장한다. 즉 미국의 핵은 평화를 위한 것이고 남한은 안보의 명분으로 미국의 패권정책을 따르며 복창하고 있다. 그래서 평화협정은 안 되었고 북의 핵무기가 개발된 것이 남북미 상관관계의 현주소이다.

그런데 북핵의 당사자인 남은 이 문제를 미국이 해결해 주어야 한다 하고, 북은 남의 군사주권을 행사하는 미국과 타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북·미(남) 사이에 반복되어온 역사를 문제의 당사자인 남과 북이 이제, 똑바로 깨달았다면 앞으로 조국의 북녘에 있는 핵을 어떻게 하는 것이 조국 반도에 평화체제를 마련할 수 있고 또 겨레의 만년대계와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인지 허심탄회하게 논의해 봄 직하다. 겨레의 앞날은 오직 우리 겨레가 결정하기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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