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동반자는 살인마, 하루키는 힙스터

[취미는 독서] 열 번째 날

노정태(자유기고가·<논객시대> 저자) : 이 코너의 제목이 '취미는 독서'인데, 업무상 읽은 책에 대해 써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지만, 기왕 이렇게 된 거 일단 홍보의 말씀을 드려야겠다. 진보정당에 꾸준히 투표하긴 했지만 본인이 좌파인지 늘 의심하는 본인이, 자타공인 좌파 혹은 진보적인 삶을 살아온 세 분의 선생님들을 모시고 토론회를 진행하게 되었다. 장석준, 정희진, 엄기호. 이름만 들어도 지성과 실천의 향기가 느껴지는 세 분과 본 서평자를 만나고 싶으신 분들은, 3월 19일 저녁 7시 30분으로 예정된 <좌파로 살다> 토론회에 참석해 주시기 바랍니다.

▲ <좌파로 살다>(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 사계절 펴냄). ⓒ사계절
아무튼 그래서 <좌파로 살다>(뉴레프트리뷰·프랜시스 멀헌 엮음, 유강은 옮김, 사계절 펴냄)를 읽었다. 두껍고, 만만치 않다. 사실 본인은 좌파로 살아오지 않은 터라(내가 내 입으로 좌파라고 해봤는데 뭐라고 막 하는 사람들이 있었음) 그런가 했는데, 등장인물의 면면을 보면 원래 그렇게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은 또 아닌 것이다. '죄르지 루카치'(게오르그 루카치)는 워낙 유명한 인물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이후로는 4장이 시작될 때까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20세기 초중반의 좌파 운동을 이끌어나갔거나, 그 속에서도 아웃사이더였던 이들에 대해, 나 혹은 평균적인 독서 대중은 아는 게 많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좌파로 살다>는 어떤 면에서, 과거 대학 동아리 혹은 학회의 '커리'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혼자 통독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이 모여 읽으면 좋은 책이고, 그 중에는 좌파의 역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을 듯하다. 그러니 3월 19일에 많이들 와주시면 좋겠고, 또 이 책을 읽는 모임 같은 것도 몇몇 만들어보시는 게 어떨까 싶다. 물론, 관심이 있는 분들끼리.

이명현(천문학자) : "과학의 역사에서 혁명을 발견한 쿤은 스스로도 혁명적인 관점에서 과학을 바라보았습니다."

안형준이 청소년들을 위해서 쓴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강성모 그림, 씽크하우스 펴냄, 현재는 '오디언'에서 펴낸 오디오북으로 접할 수 있습니다)의 마지막 구절이다. '과학'을 'XX'로 대체하고 싶은 나날이다. 3월 14일 오늘 그리고 현재, 달콤한 사탕보다 아인슈타인의 생일을 기리며 강렬한 혁명의 정신으로 뇌를 자극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 <조이랜드>(스티븐 킹 지음, 나동하 옮김, 황금가지 펴냄). ⓒ황금가지
안은별(<프레시안> 기자) : 사람들이 여행에서 기대하는 것은 큰 틀에서 비슷하다. 세부는 달라도 어쨌든 '비일상적인 특별한 경험'. 그러면서도 안전함과 편안함을 바라는데, 이는 모순이 아니라 모든 여가의 본질이다. 아이들의 비명은 놀이공원 어트랙션의 안전벨트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 제주 여행 동반자로 스티븐 킹의 <조이랜드>(나동하 옮김, 황금가지 펴냄)를 선택했고,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우연히 <스티븐 킹 단편집>(김현우 옮김, 황금가지 펴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여행 중 특별한 연애의 탄생이나 나중에 이야기할 만한 에피소드를 소망해 본 적은 있어도 진심으로 공포의 경험을 바라 본 적은 없구나…. 그렇지, 피를 봐서는 안 되지. 킹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포 소설을 읽는 사람들은 끔찍한 교통사고를 한 발 멈춰서 다시 돌아보는 사람이라는데, 그런, 뭔가 나는 안전하다는 감각 때문에 떳떳하지 못하지만 그래서 더 매력적인 간접 체험에의 열망이 여행애도 놀이공원 어트랙션에도, 물론 공포 소설 읽기에도 깔려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조이랜드>는 무섭다기보다는 매우 감상적인 성장 소설이다. 아직 다 보지는 못했다. 마감 때문에 출근하면서 읽은 대목에서 주인공이 OO을 했고, 곧이어 뭔가를 각성한 그에게 살인범으로부터 전화가 온다. 살인범은 상당히 유치한 방법으로 주인공을 불러냈다. 21살짜리 주인공은 지금 벌벌 떨고 있다. 그러니까 클라이맥스를 앞두고 한 주의 업무 클라이맥스로 복귀해야만 했다는 이야기다. 그렇다. 이것이 현대인의 공포다.

성현석(<프레시안> 기자) : 이번엔 '읽지 않은 책' 소개다. 우연히 알았다. 공원국이 쓴 <춘추전국 이야기> 시리즈 6권(역사의아침 펴냄)이 지난해 말에 나왔다는 걸. 온라인 서점에서 보자마자 주문했다. 5권까지는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 <춘추전국 이야기>(공원국 지음, 역사의아침 펴냄). ⓒ역사의아침
어릴 때 친척집에 갔다가 정비석의 <소설 손자병법>(은행나무펴냄)을 읽은 뒤부터, 중국 춘추전국 시대 이야기는 내 상상이 뛰노는 무대가 됐다. 중국 지도를 놓고 머릿속으로 '땅따먹기 놀이'를 해본 경험이 역사소설 독자들에겐 대개 있으리라. <삼국지(연의)>를 읽고 나선 더 했다. 후한 말기의 다양한 인물들에게 나를 대입해보는 공상을 끊임없이 했다. 그런데 이런 공상을 하고 나면, 늘 공허했다. 무대가 되는 중국 땅을 실제로 본 적이 없는 탓이다. '오'와 '월'의 무대였던 양쯔강 하류가 실제로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흔히 중원(中原)이라 불리는 황허 중하류는 바람과 물줄기가 어떤지, 도무지 그려지지가 않는다. 어른이 되면 꼭 '중국 유람'을 해봐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아직 실행을 못하고 있다.

이 빈 곳을 메워주는 게 공원국의 책이다. 그저 역사 이야기만 담긴 게 아니다. 인간의 삶에, 특히 고대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리'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잘 녹아 있다. 실제로 저자는 “생활·탐구·독서의 조화를 목표로 10년 동안 중국 오지를 여행”했다고 한다. 나로선 그저 부럽기만 한 삶이다. '중국 유람'은 언제할지 모르지만, <춘추전국 이야기> 6권은 빨리 읽어야겠다.

김용언(<프레시안> 기자) : <작가란 무엇인가>(파리 리뷰 엮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다른 펴냄)의 부제는 '소설가들의 소설가를 인터뷰하다'이다. 밀란 쿤데라, 움베르토 에코,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포크너 등 그야말로 저런 부제를 붙이기에 이견이 없는 작가들을 <파리 리뷰> 지 기자들이 만난 심층 인터뷰집이다. 저 작가들 중 '싫어한다'라고 말할 수 있는 이름은 감히 없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마음이 끌리는 이들의 인터뷰부터 먼저 읽기 시작했다.

▲ <작가란 무엇인가>(파리 리뷰 엮음, 김진아·권승혁 옮김, 다른 펴냄). ⓒ다른
E. M. 포스터의 대단히 방어적인 태도와 대조적으로 '뭐든지 물어보세요' 같은 친절한 레이먼드 카버의 태도, “일본 문화가 지루하고 너무 끈적거린다고 생각해서 벗어나고 싶었”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다소 '힙스터'적인 태도를 비교해보는 건 뭔가 독자로 하여금 작가-아이돌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은밀한 기쁨을 맛보게 한다. 혹은 20대의 나이에 문단에 데뷔했던 스스로를 “문학적 시골 쥐 같은 신참”이었다고 겸손하게 표현하는 이언 매큐언의 회고담 속에서 “모두 자신의 첫 번째 책을 출판하려 하고 있었”던 마틴 에이미스와 줄리언 반스와 어울렸다는 얘길 읽을 때면 문학계의 어떤 시기가 막 꿈틀거리며 태동하는 순간을 결과론적으로 음미할 수 있다.

소설가가 되고 싶은 사람만이 이 책을 읽는 건 아니다. 소설을 사랑하고, 어떤 위대한 작품을 쓴 개인에 대한 호기심이 충만한 독자라면 어느 페이지를 펼치든 보석 같은 순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알코올 중독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레이먼드 카버가 “술을 마시던 시절에는 정오 무렵까지 잠을 잤고 온몸을 떨면서 일어났지요”라며 유감스럽게 회상할 때에는 지금의 나(술을 마시진 않지만 정오 무렵까지 잠을 잔다)를 돌이켜보며 움찔하게 되는 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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