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 조선의 그 수많은 사찰들은…

[오항녕의 '응답하라, 1689!']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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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제학이 걸었던 길 ②

선입견의 추억

역사학은 과거 인간이 살아온 사실에 대한 탐구, 경험에 대한 탐구를 통해 우리의 인식을 채우거나 수정하고 삶을 개선하거나 고양시키는 공부이다. 마치 새로 사귄 사람의 지나간 경험을 알면서 친해지듯이, 또는 지난 누군가에 대한 사실이나 정보를 통해 그동안 가지고 있던 편견이나 인상을 수정하면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조선시대에 대해 각자 가지고 있는 선입견이 있겠지만, 아마 공통된 것 중의 하나가 조선후기는 성리학이 지배이념이 되면서 뭔가의 획일성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느낌이 아닐까 한다. 나 역시 그렇게 배웠으므로 별반 다르지 않았다. 불교의 근거지인 사찰은 이미 태종 때부터 도성에서 쫓겨났으니 말할 것도 없고, 노자나 장자의 글을 과거시험에 인용했다고 하여 낙방하는 일을 거론하면서, 이런 경직성을 증명하는 자료로 삼기도 했다. 그리고 선입견에는 뭔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입견에 대한 의문은 비교적 일찍 내게 다가왔다. 사학과에서는 봄, 여름으로 답사를 다닌다. 답사 지역은 아무래도 흔적이 남아 있는 장소가 되게 마련이다. 그러다보면 서원(書院)보다 절집이 더 많이 남아 있음을 알게 된다. 우리도 수덕사, 해인사, 송광사, 낙산사 등 사찰을 많이 다녔다. 서원은 근대 계몽주의에 밀려 죽었지만, 사찰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사실의 힘

그런데 사찰을 다니면서 나는 묘한 점을 발견하였다. 사찰의 중건(重建) 연대가 조선 숙종, 영조 때에 많았던 것이다. 그렇다. 바로 내가 성리학의 극성기이자 경직화되던 시대로 이해하고 있었던 바로 그 시대였다. 나중에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에서 사찰 중건에 대한 DB를 만든 적이 있는데, 나의 경험은 실제로 통계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전국의 모든 사찰을 조사했을 때, 중건된 70% 이상의 사찰이 숙종, 영조 때 집중되었던 것이다.

뭔가 설명이 필요하였다. 사찰 중건이 필요했던 것은 임진왜란 때 불탄 사찰이 많았기 때문이다. 광해군 때는 궁궐공사로 재정을 탕진했고, 인조 때는 두 차례의 호란을 겪었기 때문에 물력을 동원하여 중건할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효종, 현종대를 거쳐 다소 숨을 돌리고, 숙종 때 대동법을 바탕으로 민생과 재정이 안정되고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중계무역으로 국부가 증가하면서 비로소 사찰도 중건이 가능하였고 이것이 영조대까지 이어졌다.

또한 사대부 집안에서 사찰 중건을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 얼핏 보면 상종하지 않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다. 충분히 연구가 진행되지는 못하였지만, 지역의 사대부 집안에서 사찰 중건 때 물력을 지원한 사례는 많이 보인다. 이유가 있다.

불교는 종교이고 유가는 정치이자 학문이라는 점에서 보면 각각 사람들의 삶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자리가 있었다.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종교가 인간의 실재적 유한성 때문에 상정될 수밖에 없는 절대성, 초자연성, 무한성에 대한 신앙이나 감정이라고 한다면 불교는 종교 쪽으로 기울지 않을까? 반면 제사나 상례를 보면 종교적 성격을 배제할 수 없지만 유가는 아무래도 현실주의에 방점을 찍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노장(老莊) 철학도 마찬가지이다. 유가는 문명을 컨트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비하여, 노장은 문명 자체가 기만의 체계라고 보기 때문에 아예 컨트롤 자체를 고려하지 않는다. 이런 입장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교, 유가, 노장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이들 사상이 인간이나 이 세상의 어떤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고, 또 살아가는데 깊이 있는 지혜를 주기 때문일 것이다.

▲ 충남 예산 수덕사 대웅전. 대웅전은 성리학의 시대로 알려진 영조 27년(1751), 영조 46년(1770)년에 중건되었고, 수덕사 괘불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시대인 현종 14년(1673)에 조성되었다. 수덕사에서 덕숭한 너머 서산마애불 쪽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라는 고운 절은 경주 김씨 집안에서 후원하였다. 우리가 다룬 적이 있는 추사의 7대조 학주(鶴州) 김홍욱(金弘郁) 집안이다.

스님에게

그래서인지 조선 한복판을 살았던 문곡의 글에도 스님들과 나눈 시가 여러 편 실려 있다.

그대 단청 좋아하니 필법이 신묘하고 愛爾丹靑筆有神
시원한 풍미는 더욱 천진하기도 하다 蕭然風味更天眞
승려는 예로부터 원래 기예 많았지만 浮屠從古元多技
자네 같은 화가는 지금도 드물도다 畫史如今亦少倫
좋은 선물 받고 은근한 정 알면서도 佳貺卽知情繾綣
짧은 시편조차 청신치 못해 부끄럽네 短篇還愧句淸新
훗날 시 짓는 향산사 함께 결성하여 他時共結香山社
시골에 묻혀 자유로운 나를 그려주게 寫我林泉自在身

<문곡집> 권2 '처인 스님에게 주다[贈處仁上人]'라는 시이다. 상인은 승려를 뜻한다. '처인(處仁)'이 법명이었던 듯한데, 법명으로 보면 불제자라기보다는 유학자 느낌이 강하다. '처인'이란 말은 <논어> '이인(里仁)'에, "사람은 사는 곳을 택할 때 어진 곳을 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진 사람들이 사는 곳을 택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혜롭다고 하겠는가.[里仁爲美. 擇不處仁, 焉得知?]"라는 구절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향산사는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승려 여만(如滿) 등과 함께 결성한 시모임이었다. 문곡도 처인과 함께 백거이처럼 시 모임을 만들려고 생각했었나보다. 처인은 문곡에게 그림을 그려주었다. 아마 초상화였을 것이다. 원문의 '단청(丹靑)'은 절집에서 건물이 예쁘게 보이라고 칠하는 공예도 단청이지만, 그림을 단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림 잘 그리는 처인에게 문곡이 그림을 선물로 받고 지어준 시인 셈이다.

현 스님

대제학이 되었을 무렵에도 문곡은 스님과 교류하였다. '현 스님'이라고 나오는데, 문곡의 말에 따르면 "현 스님이 궁벽한 내 처소를 자주 방문해 시를 지어달라고 몹시 간절히 부탁하였다. 무더위를 무릅쓰고 벼슬살이하느라 시상(詩想)이 전부 메말랐지만 그의 뜻을 끝내 저버릴 수가 없어서 마지못해 시축 가운데 운자에 차운해서 준다"고 하였다.

아담한 집 산 빛에 묻혀있고 小齋山色裏
편히 누워 물소리 듣고 있네 高枕水聲中
그대 홀연 궁벽한 곳 찾을 때 爾忽來尋僻
나는 막 공직에서 물러났다네 吾方退自公
자넨 금강산 달빛 속 참선하고 禪心東嶽月
난 북창 바람결에 낮잠 잔다오 午夢北窓風
언젠가 연화사에서 모일 때면 他日蓮花社
율리의 늙은이 받아주시게나 能容栗里翁

현 스님은 금강산(金剛山)에서 수련하고 있었나보다. 동악(東嶽)은 금강산을 가리킨다. 중국 진(晉)나라 때 도연명(陶淵明)은 여름이면 늘 북창(北窓) 아래에서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희황상인(羲皇上人)이라고 자칭하였는데, 문곡도 그 표현을 빌려와 북창 바람 쐬며 낮잠을 잔다고 지은 것이다.

여기도 스님들과 결성한 시 모임 얘기가 나온다. 연화사(蓮花社)는 백련화사(白蓮花社) 즉 백련사(白蓮社)를 가리킨다. 동진(東晉)의 혜원법사(慧遠法師)가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에서 승인(僧人)과 속인(俗人) 18명을 모아 염불하는 결사(結社)를 맺고 백련사라고 하였던 고사를 가져온 것이다. 맨 끝에 율리(栗里)는 도연명이 벼슬을 그만두고 은거했던 곳이다. 결국 문곡은 퇴임한 뒤에 현 스님과 함께 시 모임을 만들어 함께 어울리자고 권하는 말이다.(<문곡집> 권2)

산사에서 묵고

아마 문곡도 여행을 다닐 때면 산사에서 묵고는 했나보다. 그럴 때 지은 시 몇 편을 마저 감상해보자.

신선산의 숱한 구름 다 밟고 올라 仙山踏盡萬重雲
등불 걸린 고찰 한 밤중에 이르니 古寺懸燈到夜分
잎 진 나무 샘물 소리 한 데 섞여 落木風泉渾不辨
베개 머리엔 되려 빗소리로 들리네 枕邊還作雨聲聞

'밤에 금장사에서 유숙하다(夜宿金藏寺)'라는 시이다. 문곡이 이조 판서로 대제학을 겸하고 있던 현종 5년(1664) 경에 지은 시가 아닌가 한다. 대전 문화재로 지정된 <갑진북정록(甲辰北征錄)>에 따르면 문곡이 함경도에 시관(試官)으로 갔다가 함경도(현 함경북도 명천군)에 있는 칠보산에 답사하면서 지은 것으로 판단된다. 함경도 시관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올린 문곡의 상소가 남아 있고 그 안에 음미할 만한 좋은 자료가 많아 따로 다루어볼 생각이다. 여기서는 그때 지은 시라는 것만 생각하고 편하게 감상하기도 한다.

'신선이 사는 산'인 칠보산은 695미터의 높지 않은 산이다. 그리 '숱한 구름[重雲]'이 있을 만하지 않지만, 시인의 감흥으로 보면 되겠다. 그곳 금장사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자려고 누웠는데, 입 떨어진 나무에 부는 바람 소리, 샘물 소리가 한 데 섞여 들리면서 빗소리처럼 들린다는 정경이다. 실록에 따르면 함경도 시관으로 나간 것이 윤6월이고 서울로 돌아온 것이 10월이고, 또 북쪽 지방이므로 충분히 가을이 무르익은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 지은 시 두 수를 아울러 감상해보자. '개심사(開心寺)'와 '도솔암(兜率菴)'이다.

옛 절의 스님들은 어디로 갔나 古寺僧何去
황량한 마당에 해가 뉘엿뉘엿 荒庭日欲西
목어 바람 따라 저절로 울고 木魚風自響
산새 저물녘 둥지 찾아가구나 山鳥暮還棲
불당엔 이끼 불상까지 번지고 佛殿苔侵座
산문엔 낙엽이 오솔길 메우네 巖扉葉沒蹊
이따금 보이는 건 유람객 와서 時看遊客至
깨진 벽에 써 놓은 이름뿐이네 破壁姓名題

지척간의 제천 오를 수 없었는지 咫尺諸天不可登
암자 천불상 절로 층을 이루었네 寺巖千佛自層層
호젓한 석실의 구름과 노을 속에 依然石室雲霞裏
그때 참선 든 스님을 상상해 보네 想見當時入定僧

여기서 말하는 개심사는 충청도 개심사가 아니다. 전국에는 개심사라는 절이 여럿 있다. 함경도 칠보산에 있는 개심사는 무척 썰렁하였나보다. 스님들도 별로 없다. 닦아주지 않아서 이끼가 불상에까지 끼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오항녕 다녀가다. 2014년 3월 14일' 하는 식으로 낙서를 남기는 여행객들이 있었든지, 깨진 벽에는 낙서만 눈에 띌 뿐 달리 보이는 것이 없다.

도솔암은 작은 암자였던 듯하다. 제천은 불교 용어로,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천신(天神)을 말한다. 또한 여러 신상(神像)이 모셔져 있는 곳이란 뜻으로, 사원(寺院)의 별칭이기도 하였다. 문곡은 "암자에 곡기 끊은 스님이 들어와 지냈는데 지금은 없다고 한다"고 코멘트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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