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나는 세상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다."
'노골리스트' 최규석(37)의 새 웹툰 <송곳>에는 이런 부제가 달려있다.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 생태보고서>, <100도씨>, <대한민국 원주민> 등을 통해 사회를 향한 '삐딱한' 시선을 유머러스하게, 그리고 실력 있게 내보인 만화가 최규석.
이번에는 본격 '노동 만화'로 돌아왔다. 몇 번의 좌절을 거듭한 끝에 시작된 연재라고 했다. 프롤로그에서부터 그는 무슨 '깡'인지 '근로기준법 36조'와 '최저임금'을 등장시켜버렸다. 그러나 '노동' 만화인 탓에 낯설고 지루할 거란 예단은 금물이다. <송곳>이 연재되고 있는 네이버 페이지에는 '썩고 망가진 세상'과 '아직은 살만한 사회'란 댓글이 회를 달리하며 뒤엉키고 있다. 말 그대로 보는 이는 '들었다 놨다' 하는 모양새다.
<송곳>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장교 출신의 대형마트 과장, 이수인의 성장 스토리다. 어딜 향해서 성장하느냐고? 바로 '노동조합'과 노동조합을 통해서 추구하려는 '그 무엇'이다. "성경에는 노조가 없다"고 말했던 누군가의 눈에는 '성장'이 아닌 '타락'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
지난 4일, 어디서도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성장 스토리를 만들어가는 작가 최규석을 한국만화영상진흥원 인근에서 만났다. <송곳>의 시작부터 최 작가가 했던 고민과 우려, 중심인물 이수인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 앞으로 <송곳>이 뻗어 나가려는 방향, 그리고 최규석 그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폭넓게 나눴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편집자>
"여러 번 포기했었다"
프레시안 : 새 웹툰 <송곳>이 연재되고 있다. 이번에는 소재가 노동(조합)이다. 만화 소재로선 생소한 만큼, 이런 저런 어려움이 많았을 것 같다.
최규석 : 시작 자체가 힘든 작품이었다. 충분한 자신감을 가지고 연재에 들어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런저런 자료를 보고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여럿 만났다. 투쟁하고 있는 사업장들도 여러 곳 방문했고, 대형마트에서 몰래몰래 사진도 많이 찍었다.
취재 기간이 짧지는 않았다. 사실 그 기간 여러 번 포기했었다. 처음엔 중심인물을 프롤로그에 등장하는 '구고신'으로 잡았었는데, 그게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전문가이자 지식인이고 경력이 오래된 노동 운동 활동가의 시각으로 뭔가를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예전에 노동조합 위원장을 했었던 한 남자를 만났다. 누군지는 비밀이다. (웃음) 유머 감각엔 좀 문제가 있었는데 여하간 나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딱 원하던 캐릭터(이수인)이기도 했다. 어차피 정리가 안 되던 찰나에, 편안한 캐릭터를 찾았으니 일단 이 인물로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런 걸 그려낼 실력이 되나 걱정이 끝이 없다"
최규석 : 처음엔 노동 문제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다가갈지 감이 안 왔다. 그래서 누가 봐도 '이건 정말 말이 안 된다' 싶은 사건을 등장시켜야 하나란 생각도 했었다. 이를테면 용역 깡패들이 식칼 들고 노동조합에 테러를 가하는 정도의 사건 같은 것…. 그래야 이수인이 목숨 걸다시피 노동조합을 만들고 싸우는 게 자연스럽게 보일 거란 생각이었다.
그러다 '나도 저런 상황에서 정말 억울했다'란 생각으로 약간의 대리만족을 느낄 수 있는 사건을 초반에 많이 깔기로 했다. 촌지를 챙기는 얘기랄지, 군대에서의 부조리함이랄지….
이런 것들은 누구나 한 다리만 건너도 어디선가 들어본 부조리한 상황이다. 여기에 옳고 그름에 집착하는 '이수인'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고 함께 따라가다 보면 재미있을 거라고 본다. 나도 걱정이 끝이 없다. 이런 걸 그려낼 실력이 되나 해서….
"대형마트, 공감대가 넓은 비겁한 소재"
프레시안 : 배경을 대형마트로 선택한 것도 그래서인가.
최규석 : 처음엔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등도 생각했었다. 그러다 일단 익숙한 장면을 그리기로 했다. 대형마트는 노동 문제를 대중적 서사로 풀어내기에 괜찮은 소재다. 마트는 누구나 다 가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공감대가 넓은 평범한 아줌마들이다. 과거 이랜드 파업 때 아줌마들은 그냥 매장에 앉아 밥을 먹었다. 그게 그들의 싸움 방식이었다.
이런 면에서 대형마트는 안전한 소재다. 한진중공업이나 현대자동차처럼 큰 곳은 전사(前史)만 수십 년이라 엄두가 안 났다. 게다가 쇠파이프가 등장하고 점거 투쟁이 등장하면 '전문 시위꾼' 이런 비방 같은 게 또 나올 거 같기도 했다. 반면 대형마트는 대중들 시선에 거슬리지 않으면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 만한 소재였다. 어떻게 보면 비겁한 소재 선택이었다. (웃음)
프레시안 : 배경이 대형마트인데, 아직 등장인물 중에 여성은 없다.
최규석 : 나온다. 아주머니들도 많이 나올 거다. 또 이수인과 둘이 서면 그림이 되도록 예쁜 여자도 한 명 등장시키려 한다. (웃음) 아직까진 등장 인물이 몇 안 되지만 앞으로는 굉장히 캐릭터가 많아질 거다. 이수인이 구고신을 만나면서 사랑방 같은 곳에서 지역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만나고 모여 노는 모습들이 나올 거다. 그런 사람을 대중 예술의 영역 안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러면서) 영웅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빡센지(힘든지)도 보이고 싶었다. 내외부에서 적들이 등장하고, 이수인이 그 때문에 고뇌하는 모습이 나올 것이다. 보는 사람은 '얘가 무너지면 어떡하지'란 생각이 들 텐데 이수인은 무너진다. 무너진 채로 가는 거다.
이 만화 제목이 <송곳> 인 이유
프레시안 : 이수인은 투표 조작을 거부했고, 집단 해고도 거부했다. 이수인이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중요한 가치를 지켜나가고 있다.
최규석 : 지금 상태의 이수인에게 그런 것은 없다. 그냥 자기가 (사관학교에서) 배운 것(군은 정치적 중립을 지키며 민주주의를 수호한다)과 상반되는 지시에 대한 분노, 그리고 사람을 '괴롭혀서' 직장 밖으로 쫓아내는 방식(<송곳> 속에서 이수인은 지휘 아래 있던 판매 직원들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쫓아내란 점장의 지시를 받는다. - 편집자)은 잘못됐다는 생각 정도를 하고 있다. 거창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생각해 보지 않았고, 만약 괴롭힘이 아니라 희망퇴직 같은 절차를 밟았다면 가만있었을 거다.
<송곳>은 그랬던 이수인의 성장 스토리다. 일상을 잘 보내던 사람, 그러니까 가만히 자기 자리에 서 있었던 사람인데 위에서 내리누르다 보니 종이를 뚫고 나오는 그런 이미지다. 그래서 만화의 제목도 <송곳>이 됐다. 실제 취재 과정에서 만난 많은 활동가에게서 그런 '송곳'과도 같은 인상을 받았다.
그저 몇 번의 선택,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다
프레시안 : 이수인 과장이 해고 지시를 거부하는 장면은, 지난 2002년 한 까르푸의 점포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을 배경으로 했다고 들었다. 새로 부임한 프랑스인 점장이 직원 15명을 '무조건 내보내라'고 지시하자 비교적 고연봉 정규직이었던 과장이 해고 지시를 거부하고 노동조합 위원장이 된다. 그리고 70일간의 파업을 벌여 승리한다. <송곳>이 앞으로 계속 이때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되나.
최규석 : 모른다. 얼마큼 갈 수 있을지도 지금은 모르겠다. 아마도 시즌제로 가게 될 것 같다. 첫 시즌을 끝내고 계속해도 되겠다 싶으면 하는 거고, 의미 없겠다 싶으면 그만둘 수도 있다.
첫 시즌에선 아주 작은 노조에서 새로 탄생한 활동가가 첫 파업에 약간 성공하는 이야기, 또 그 한 번의 경험으로 다시는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는 큰 변화를 다룰 생각이다.
사실 거의 모든 일이 그렇지 않나. 영화 <매트릭스>에서처럼 빨간 약과 파란 약 중에 하나를 선택에 인생이 뒤바뀌는 일은 현실에선 잘 없다. 사소한 결정들이 모여 사람을 만든다. 어느 대학생이 미팅을 가느냐 선배 따라 집회를 따라가 보느냐를 고민하다 하필 집회를 가서 운동권이 될 수도 있고 그런 거다.
전작 <변호사들>을 준비하며 노동 변호사들을 만나서 '어쩌다 사법고시 통과해서 이러고 있느냐'고 묻곤 했는데, 그때도 그래서 이 질문이 말이 안 된단 걸 알았다. 여하간 <송곳>에선 작은 선택들이 중첩되며 우연히 한 인간이 만들어지는 걸 보이려 한다.
"시즌제가 될 것…시즌 2에선 노조 활동가와 파괴자 등장"
프레시안 : 시즌 2는 어느 정도 구상이 됐나.
최규석 : 시즌 2가 되면 구고신이 본격 등장한다. 구고신은 1970년대부터 활동해 온 운동권이다. 계속해서 배신을 당하는데도 그래도 활동을 계속한다. 그렇다면 뭐가 이 사람을 계속 움직이게 만드나. 이게 주제가 될 거다.
그리고 악랄한 노조 파괴자도 등장한다. 웬만한 중소기업 노조는 다 깨고 다니는 파괴 전문가다. 그런데 배경으로 잡고 있는 시기가 창조컨설팅이나 컨택터스 같은 것들이 활개치는 복수노조법 시기 이전이라 고민이다. 극적인 노조 파괴 방법이 뭐가 있을까. 뭐 옛날이라고 노조 파괴자가 없었던 것 아니긴 하지만. (웃음)
프레시안 : 프롤로그에서 구고신이 짜장면집에 아르바이트생 떼인 임금을 받아주러 갔다가 문제를 해결하는 장면이 재미있다. 처음엔 점잖게 해결하려는 듯 노동법을 거론하고 최저임금 얘기를 하다가, 결국 '동생들(지역 노동조합 활동가들)' 에게 전화를 돌려 그 집에서 밥 시켜먹지 말라고 한다. 법이 아니라 힘으로 문제를 풀었다.
최규석 : 일부러 그랬다. 많은 부분이 법으로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법이란 게 생기기 전에도 노동이 있었고 노동운동이 있지 않았겠나. 결국은 힘과 힘의 싸움이다.
"꼴찌만 하지 말자…꼴찌는 정신적 타격이 너무 커"
프레시안 : 왜 네이버였느냐는 궁금증을 표하는 사람들도 있다. 만화 콘셉트가 네이버보단 다음에 어울린다는 생각에서다. 다음에서 연재를 시작했으면 지금보다 더 잘 나갔을 거란 얘기도 있다.
최규석 : 이 정도로 네이버에서 인기가 없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 중간은 가지 않겠나 생각했는데 판단 미스(실수)였다. (웃음) 일단 만화가 너무 '다음스럽다'는 생각이 있었다. '있을 데(다음)에 있네'란 느낌보다 '이게 왜 여기 있지'란 느낌이 더 좋지 않나.
청소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다음에는 청소년 사용자들이 적다. 네이버에선 10대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만화 보다가 얻어걸리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최규석 : 포탈이 다 죽어가던 만화계에 산소호흡기 역할을 했다. 원래 망한 판(업계)이었는데 지금은 만화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었다. 예전엔 전국에서 만화 하는 사람들이 웬만하면 서로 다 알았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웹툰' 등장 이후 생긴 변화다.
다만 포탈에서 만화가 인기 순서대로 공개되는 데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순위를 따로 공개할 수도 있는데, 지금은 뿌리는(보여주는) 방식 자체가 순위 순서다. 그러면 어쩔 수 없이 밴드웨건(편승) 효과가 생긴다. 인기 1등 작품부터 보지, 꼴찌부터 보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프레시안 : 어느 인터뷰에선가 '꼴찌는 하지 말자'가 목표라고 말했다.
최규석 : 꼴찌는 안 된다. 어후…. (꼴찌를 하면) 정신적 타격이 클 것 같다. (웃음)
"<송곳>에 반전 있다"
프레시안 : 인기작 <미생>의 블루칼라 버전이라는 평도 있다.
최규석 : 무슨 그런…. (웃음) 찬찬히 보면 내용이 완전 다르다. 다만, <미생>이 워낙 잘 돼서 신경 쓰였다. <미생>에서 한 번 쌍용자동차 노조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여기 노조 나오나 해서 불안해서 윤태호 작가한테 물어봤다. 노조는 안 나오더라. 괜한 걱정을 했다.
프레시안 : 전작 중 특히 애착이 가는 작품은 어떤 건가.
최규석 : 아무래도 <습지 생태보고서>다. 이게 유일하게 상을 못 받았다. 농담이고, <습지 생태보고서> 작품 할 때 즐거웠다. 에피소드도 짧고 일단 웃기니까 작업하는 맛이 났다. 평소 내 성격이 제일 많이 드러나는 작품이기도 하다. 심각한 얘기를 농담으로 바꾸고. 그런 썩은 농담들…. 독자들도 그렇겠지만, 좀 빨리 끝냈다는 아쉬움이 있다.
반면 <송곳>은 노동량이 워낙 많아 힘이 든다. 그림 스타일도 투시도법을 따르는 전통 스타일이다 보니 스피디하게(빠르게) 작업할 수가 없다.
프레시안 : 고생 속에서 탄생하고 있는 작품이다. 독자들에게 '이렇게 읽어달라' 하는 바람이 있다면.
최규석 : 그런 게 어디 있나. 읽고 싶은 대로 읽는 거지…. (웃음) 다만 10대가 많이 봤으면 좋겠는데, 팬 중에 몇몇이 '초딩'들은 이 만화를 이해 못 한다고 자꾸 쫓아낸다. 내 팬이 아닌가 보다….
그리고 작품에 반전이 몇 번 나온다. 지금 흐름대로만 가지는 않는다. 앞으로 볼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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