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물리학자가 되고 싶었던 고등학생이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평생 도전했던 통일장 이론, 그러니까 우주를 지탱하는 여러 종류의 힘을 하나의 원리로 꿰어 설명하는 이론을 만드는데 삶을 던지고 싶었다.
그래서 자연과학을 전공으로 골랐는데, 대학 문턱을 넘고 나서 인생길이 달라졌다. 대학 내 신문 만드는 일을 했는데, 선배들이 사회과학 책을 권했다. 그 중 하나가 토머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 당시엔 최신 이론이었다. 그걸 읽고 나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에 꽂혔다. 세상을 설명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어졌다. 물리학의 통일장 이론 대신 사회과학의 통일장 이론을 꿈꾸게 된 셈이다.
대학 문턱을 나선 뒤엔 설탕 회사에서 14년 간 일했다. 설탕 가격을 예측하는 게 일이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각각 4년, 8년을 보낼 기회도 있었다. ‘가격’의 세계는 오묘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시장원리가 지배한다. 따라서 시장에서 정해지는 ‘가격’의 원리를 깨우친다면, 세상을 설명하는 일반이론에 다가갈 수 있을 터였다. 이는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는 일반 원리’, 통일장 이론을 만들고 싶었던 어릴 적 꿈으로 향하는 길이기도 했다.
<프레시안>에 원고 뭉치를 보낸 건, 그 길을 따라 걷던 어느 날이었다. <프레시안>에 실린 원고에 대한 독자의 반향은 컸고, 결국 책으로 묶여 나왔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 출간된 <혁신하라 한국경제>가 그것. 이권경제, 혁신경제, 요소경제, 공공경제 등의 개념으로 한국경제를 설명한 책이다. 전통적인 좌파-우파 구분으론 딱히 분류하기 힘든 내용이다. 대개의 좌파와 달리, 그는 시장의 역동성을 중시한다. 진보 진영의 격렬한 비판을 부를 만한 내용이 많다.
그리고 그는 기득권에 매몰된 우파에 대해서도 날선 비판을 한다. 시장의 한복판에서 청장년을 보낸 그가 보기에, 한국의 우파는 입으로만 시장을 말할 뿐 실제론 시장경제의 적에 가깝다. 애초 그의 집필 활동의 시작이 설탕 시장에서 이뤄지는 담합에 대한 고발이었다.
동시에 그는 직접민주주의 제도의 강력한 지지자다. 혁신과 도전의 싹을 자르고, 공동체를 병들게 하는 이권경제에 맞설 수 있는 힘은 직접민주주의 제도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진영 역시 직접민주주의 제도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었다. 그의 저술에 관심이 가는 이유다.
인터넷으로 증권정보를 제공하는 기업인 팍스넷 창업자로 잘 알려진 박창기 (주) 에카스 대표 이야기다. 그가 새로운 책을 들고 나타났다. <블랙오션 - 그들은 어떻게 이권의 성벽을 쌓는가>가 그것. 영국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남충현 씨, 윤범기 MBN 기자 등과 진행한 대담집이다.
박창기 대표는 <혁신하라 한국경제>를 낸 뒤에 내용이 어렵다는 지적을 들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읽힐 수 있는 책을 궁리하게 됐고, 이번 책은 그 결과물이다. 경제학자와 기자가 참여하면서, 내용이 더 정교해졌다. 표현이 조금 바뀌기도 했다. 예컨대 이전 책에서는 요소경제라는 표현을 썼는데, 이번 책에선 경쟁경제라는 말로 바뀌었다.
기업인의 저술답지 않게 ‘개념’을 만드는데 몰두한다는 게 앞서 낸 책에 대한 흔한 평가였다. 긍정과 부정의 뉘앙스가 함께 섞인 평가다. 이런 평가는 이번 책에 대해서도 반복될 듯하다. 그러나 구체적인 현실에서 추상적인 개념을 낚아 올리려는 노력이 인류 지성의 역사였다. 특히 사회과학은 더욱 그렇다. 정신적 에너지를 실물경제 영역에만 가둬두지 않으려는 기업인의 시도는, 그래서 의미가 있다.
저술 활동에 나선 계기에 대해 박 대표는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 그 질문의 답 속에 살고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라는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난 14일 서울 서교동 프레시안 편집국에서 박창기 대표를 만났다. 박인규 프레시안 협동조합 이사장이 진행한 이날 인터뷰를 정리했다. <편집자>
"양극화가 신자유주의 탓?"
프레시안 :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에 대해 진보 진영은 흔히 ‘신자유주의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런데 이번 책은 이런 진단을 반박한다. 많은 이들에게 우상타파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겠다.
박창기 : 신자유주의의 특징은 크게 네 가지다. 우선 세금을 줄인다. 그리고 복지를 줄인다. 또 관치 및 규제를 완화한다. 마지막으로 노동조합의 힘을 뺀다. 한국에서 신자유주의가 득세했다면, 이들 네 가지 특징이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찬찬히 따져보면 꼭 그렇지가 않다. 한국에선 1990년대 이후 세금과 복지가 대체로 증가했다. 관치와 규제도 크게 줄지 않았다. 규제란 곧 법인데, 법이 계속 생산됐다. 공무원의 힘도 약해지지 않았다. 다만 노동조합은 조합원 규모가 줄었다. 그러나 그 영향력은 약해지지 않았다. 신자유주의가 지닌 대표적인 특징이 대부분 구현되지 않았는데, ‘신자유주의 탓’이라는 설명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한국에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은 분명히 사실이다. 그러나 그게 신자유주의 탓이라는 진단은 틀렸다. 진단이 잘못되면, 처방 역시 제대로 나올 수 없다. 배가 아파서 병원을 찾아간 환자가 있다. 실제로는 맹장염이다. 그런데 의사가 대장염이라고 진단한다면, 환자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겠나. 그렇지 않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현상에 대한 진단이 딱 이런 식이다.
"1995년엔 상위 10%가 29% 가져갔는데, 2010년엔 44% 가져가"
프레시안 : 양극화가 신자유주의 탓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 때문인가?
박창기 : 이권집단의 누적현상이 한 원인이다. 나는 이번 책에서 ‘5G+i’ 모델을 제시했다. 사회 전체를 다섯 개의 그룹으로 나눴다. 상위 0.1%인 'G1' 그룹은 이권 장악 집단이다. 상위 1%인 ‘G2' 그룹은 이권 비호 집단이다. 그 아래 계층으로 전체의 10~20%를 차지하는 ‘G3’ 그룹은 이권 추종 집단이다. 그 아래에 있고 50~60%를 차지하는 ‘G4’ 그룹은 침묵 대중 집단, 맨 아래에 있는 ‘G5’ 그룹은 극빈 소외 집단이다. 이렇게 다섯 그룹을 뜻하는 ‘5G’에 이데올로기를 뜻하는 ‘i'를 포함한 게 ‘5G+i’ 모델이다.
1987년 이전까지만 해도, G1과 G2가 이권을 장악했고, G3의 숫자는 적었다. G1과 G2는 재벌과 보수언론과 관료의 카르텔이다. 노동자 대부분은 G4, G5에 속했고, 평등하게 못 살았다. 그런데 1987년을 지나면서 대기업 정규직 중심으로 조직화된 노동자들이 G3에 속하게 됐다. G1, G2, G3가 차지하는 몫이 커지면서, G4와 G5에 속한 이들의 몫은 줄었다.
1995년에는 상위 1%가 국가 전체 소득의 7%를 차지했다. 그런데 이들이 2010년이 되면 12%를 가져간다. 그 아래에 있는 9%(차상위 9%)가 차지하는 몫은 같은 기간에 22%에서 32%로 늘었다. 상위 10%가 차지하는 몫이 늘었으니(29% → 44%), 그 아래 90%의 몫이 줄어드는 건 당연하다. 90%의 소득은 같은 기간에 71%에서 56%로 감소했다.
2010년 기준으로 한국의 차상위 9%가 가져가는 소득이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32%라고 했다. 그런데 이 비율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같은 조건에서 미국의 차상위 9%는 29%, 영국은 27%. 프랑스는 25%를 가져간다. 뒤집어 말하면, 하위 90%, 즉 국민 다수가 차지하는 몫은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진보 진영이 1% 대 99%의 대결만 강조하는 건 현실을 호도하는 것이라고 본다. 10% 대 90%의 대결, 또는 20% 대 80%의 대결 역시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대기업과 공기업의 정규직, 교사 및 공무원이 기득권층이 된 현상도 함께 비판해야 한다.
나는 앞서 출간한 <혁신하라 한국경제>에서 ‘최소승리연합’이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정치학자인 윌리엄 라이커가 창안한 개념인데, 한국에선 G1, G2, G3가 ‘최소승리연합’을 구성한다. 기득권을 확보한 세력이 G4, G5를 지배하고 이익을 얻으려면 전투에서 승리할 만큼 충분한 동지를 규합해야 한다. 그러나 동지의 수가 너무 많아져도 안 된다. 각자에게 돌아갈 전리품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결국 G1, G2, G3는 ‘최소’의 수로 ‘연합’체를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나는 대기업 정규직이 중심이 된 민주노총 역시 ‘최소승리연합’을 원한다고 본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의 정규직 수가 너무 늘어나면 월급을 더 올리기가 어렵다. 따라서 그들은 비정규직 문제에 소극적으로 대응한다. 비정규직이 정규직이 되는 걸 내심 원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가 체감하는 경제적 양극화는 결국 G3와 G4의 격차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엔 민주노총 및 그들을 옹호해 왔던 진보 진영에게도 책임이 있다. 진보 진영은 G4, G5에 비해 G3의 목소리를 주로 대변했다.
"재벌 봉건 체제 무너져야 혁신이 산다"
프레시안 : G1에 속하는 재벌의 영향력 역시 계속 확대돼 왔다.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를 설명하려면, 재벌 변수를 빠뜨릴 수 없다.
박창기 : 삼성으로 대표되는 재벌은 외국에선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구조다. ‘제왕적 지배구조’와 ‘봉건적 사업구조’가 그 특징이다. ‘제왕적 지배구조’란 얼마 되지 않는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현상이다. 한마디로 회장의 힘이 비정상적으로 크다는 이야기다. 또 ‘봉건적 사업구조’란 그룹 내에서 수많은 사업을 벌려 놓고 내부 거래를 이용해 경쟁력을 얻는 구조를 가리킨다. 예컨대 전산 분야, 이른바 SI(System Integration)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재벌 그룹마다 SI업체를 보유 하고 있다. 삼성SDS, LG CNS, SK C&C 등이다. 이들 SI업체의 매출 순위는 이들이 속한 재벌 그룹의 순위와 거의 일치한다. 그룹 자체 전산 개발 사업에서 매출을 올리고, 이를 근거로 정부 시장의 큰 주문을 따내고, 외부 시장에선 덤핑을 해서 시장을 장악하는 전략을 쓴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한국에서 소프트웨어 산업이 낙후된다. 또 벤처기업의 싹도 잘려나간다. 이게 바로 ‘봉건적 사업구조’에서 비롯된 현상이다.
재벌들의 이런 사업 형태는 중세 봉건 영주들과 닮았다. 그들은 외부와 단절된 성을 쌓고, 폐쇄적인 세계를 만든다. 동시에 이들은 자신들의 부도덕성 때문에 하위 계층을 일부 끌어들인다. 이들이 작은 지분으로 황제경영을 할 수 있는 이유다.
봉건 체제가 무너져야 혁신경제가 살아난다. 이는 역사가 증명한다. 일본이 그랬고, 독일이 그랬다. 비스마르크가 길드 중심의 봉건 구조를 무너뜨리니까, 독일 경제에서 혁신이 불붙었다. 작은 시장에 성을 둘러치고 황제경영을 하는 재벌의 행태는, 혁신경제의 적이다.
"자본이 가장 좋아하는 건 '블랙오션'"
프레시안 : 앞서 <프레시안> 기고와 <혁신하라 한국경제> 등에서 CJ제일제당의 설탕 담합 사례를 예로 들어 이권경제에 대해 설명했다. 내수 시장에서 인허가 및 부동산 기득권을 활용 하거나 담합을 하는 방법으로 독과점 상태를 만들어 이익을 취하는 재벌의 행태가 이권경제의 대표적인 사례다.
박창기 : 한국에서 계급 질서가 점점 강화되고 있다. 부모의 계급을 자식이 물려받는 사례가 늘어난다. 재벌이 주도하는 이권경제가 강화된 것과 맞물린 현상이다. 이를 견제하려면, 혁신을 통해 소비자에게 차별화된 가치를 제공하여 이익을 내는 혁신경제가 활성화돼야 한다. 혁신을 통해 창조된 새로운 시장이 ‘블루오션’이다. 이와 대비되는 개념으로 내가 창안한 게 ‘블랙오션’이다. 이권경제와 짝을 이루는 시장이다. 창조적인 가치를 만드는 게 아니라 권력을 이용해 초과이익을 만드는 게 마치 암시장(블랙마켓)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붙였다.
재벌이 가장 좋아하는 시장은 ‘블랙오션’이다. 기득권을 활용해 쉽게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혁신을 해야만 하는 ‘블루오션’은 그 다음이다. 그래서 재벌이 늘 하는 궁리가 공공경제에 있는 것을 빼와서 ‘블랙오션’으로 만들려는 것이다. 예컨대 4대강 사업, 철도나 발전소의 민영화 등이 그렇다. 이렇게 해서 큰돈을 번 사례가 많다. SK가 대한석유공사를 인수해서 SK정유를, 한국이동통신을 인수해서 SK텔레콤을 만든 사례가 대표적이다. 재벌에겐 좋지만 국가 전체적으론 해로운 일이다. 다른 경제 주체에게 돌아가야 할 몫을 재벌이 가로챈 셈이 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양극화가 심해지고, 혁신도 어려워진다. 양극화가 문제라고 본다면, 재벌이 더 이상 ‘블랙오션’에 발을 들이지 못하게 해야 한다. 많은 자본을 동원할 수 있는 재벌이 혁신경제 영역, 즉 ‘블루오션’으로 진출하도록 강제해야 한다는 말이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외국자본이 한국에 들어왔다. 신자유주의 문제를 지적하는 이들은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국부를 유출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이 문제에서 진짜 중요한 대목은 외국자본이 주로 이권경제에만 진출했다는 점이다. 당시 외국자본이 주로 진출한 게 은행이었다. 그런데 은행업은 정부의 인허가가 중요한, 대표적인 이권경제 영역이다. 예금자들이 왜 은행에 저축을 하나. 5000만 원까지는 정부가 지급을 보증해주니까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외환위기 당시 한국정부는 이권경제 영역인 은행을 외국자본에 개방했다. 가장 손쉽게 돈 벌 수 있는 이권경제 영역에 투자할 길이 있는데, 외국자본이 굳이 골치 아픈 혁신경제 영역에 들어갈 이유가 없다. 은행은 함부로 개방하는 게 아니다. 요컨대 당시 핵심적인 문제는 외국자본에게 시장을 연 게 아니다. 이권경제를 개방한 게 진짜 문제였다. 이는 중국과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국은 은행 등 이권경제 영역은 외국에 개방하지 않는다. 외국자본이 혁신경제 영역으로 들어가게끔 유도한다. 공장을 짓고 기술을 개발하는 쪽으로만 자본이 흐르게끔 한다.
한국과 중국 모두 ‘관치’가 강력한 나라인데,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둘 중 하나다. 관료들의 실력이 없거나, 아니면 매수당했거나.
"'정리해고 없는 나라' 아니라 '정리해고 돼도 살만한 나라' 만들어야"
프레시안 :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복지국가가 화두로 떠올랐다. 그런데 진보진영의 전통적인 입장인 ‘정리해고 반대’와 복지국가가 양립할 수 없다는 게 이 책의 주장이다.
박창기 : 국민이 행복한 나라는 ‘정리해고가 없는 나라’가 아니다. ‘정리해고 돼도 살만한 나라’다. 실제로 이런 나라가 많다. 가장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꼽히는 스위스를 보자. 스위스에선 중고등학교는 물론 대학 학비마저 무료다. 대학 진학률이 30% 정도로 묶여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대학 졸업자와 고교 졸업자 사이의 임금격차가 크지 않다는 점이 그 배경이다. 굳이 무리해서 대학에 갈 필요가 없다. 이 나라에선 실업자에게 통상 임금의 80% 정도를 2년 간 지급한다. 그래도 취업이 되지 않으면 최소 생활비를 지급한다. 노동자 입장에선 해고당해도 살 길이 있으니, 해고에 대해 크게 저항하지 않는다. 경영자 입장에선 해고가 쉬우므로, 신규 채용에 대한 부담도 적다. 나중에 해고하기 어렵다면, 꼭 필요한 사람을 뽑을 때도 망설여지기 마련이다. 비정규직 비율이 늘어난 건 해고가 어려운 조건과 맞물려 있다. 해고가 쉽다면 굳이 비정규직을 뽑을 필요가 없다.
진보 진영이 선망하는 스웨덴, 덴마크 등 북유럽 국가들도 이 점에선 스위스와 비슷하다. 이른바 유연안정성(플렉시큐리티, Flexicurity) 모델이다. 유연성(flexibility)과 안전성(security)을 합친 표현인데, 해고가 자유로우면서 실업자에 대한 안전망은 튼튼하다는 뜻이다.
무작정 ‘정리해고가 없는 나라’만 외치는 건, 결국 앞서 말한 대기업 정규직이 중심이 된 G3 집단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주장에 불과하다고 본다.
프레시안 : 지금까지 나온 비판은 주로 진보 진영을 향한 것 같다. 그렇다면, 새누리당을 비롯한 우파는 문제가 없나?
박창기 : 새누리당은 그저 수구, 이권 집단일 뿐이다. 그들이 시장 친화적인 세력이라고? 천만에, 절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엄청난 규제를 만들어내는 집단이다. 입으로는 ‘규제 완화’를 외치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그런 점에서 겉과 속이 다르다.
그들이 생산하는 규제는 주로 재벌의 이권을 위한 규제다. 설탕에 대한 규제가 어떻게 재벌의 이권에 봉사하는지에 대해서는 앞서 여러 차례 설명했다. 맥주 생산에 대해서도 규제가 있다. 왜 우린 아주 다양한 맥주를 마실 권리를 박탈당해야 하나. 왜 한국에는 맥주 회사가 두 개뿐인가. 이들 맥주 회사의 이권을 지키기 위한 규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선 관료 역시 동맹세력이다. 규제가 있어야 관료가 힘을 얻는다. 따라서 관료는 태생적으로 반(反)시장적이다.
불필요한 규제를 통해 보호받는, 이권경제는 국민경제를 살찌우지 못한다. 오로지 혁신경제만이 국민경제를 살찌울 수 있다.
"새누리당은 反시장 세력이다"
프레시안 : 이권경제가 시장원리와 양립하기 어렵다는 점은 잘 알겠다. 그렇다면, 국민경제에서 이권경제가 차지하는 비율을 줄이려면 어떤 조치가 필요할까?
한양대 김차동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2009년부터 2011년까지 3년 간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된 부정행위는 586건, 매출액은 186조 원이다. 이에 따른 부당이익액은 25조 원으로 추산됐다. 그런데 담합은 은밀하게 이뤄지는 탓에 실제 범행의 15%정도밖에 적발되지 않는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 점을 고려하면, 3년간의 부당이익액은 167조 원에 달한다. 1년에 55조 원인 셈이다. 우리나라 정부 예산이 350조 원 규모라는 점을 떠올리면, 얼마나 큰 낭비인지 짐작이 간다. 5000만 국민이 매년 1인당 110만 원씩 손해를 봤다. 4인 가족 기준으로는 440만 원을 매년 날린 셈이다. 그런데 3년 간 정부가 물린 과징금은 2조4000만 원에 불과했다. 드러난 부당 이익의 10%에 불과한 금액이다.
결국 매년 55조 원이 부당한 방식으로 국민 호주머니에서 소수재벌에게 넘어간다는 이야기다. 담합 범죄에 대한 처벌이 너무 약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재벌 입장에선 벌금을 내더라도 남는 게 많은 장사다. 이래서는 담합을 근절할 수 없다. 게다가 수사가 이뤄져도 결국 재벌에게 면죄부가 주어지는 경우가 많다. 훗날 검찰총장 후보자가 될 변호사가 재벌 측 변호를 맡는다. 이들 변호사들은 수사검사에게 일을 가르쳤던 선배였다. 사수가 변호하고 조수가 수사하는 상황에서 뭘 기대하겠나.
적어도 세 가지 법은 통과돼야 한다. 첫 번째는 이른바 ‘김영란 법’이다.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이 발의한 ‘부정청탁 금지 및 공직자의 이해충돌방지법’인데, 공직자가 일체의 금품 접대를 받지 못하게끔 규정한 내용이다.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은 경우에도 처벌받는다.
두 번째는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다. 범죄에 대한 과징금이 범죄로 인한 이익보다 적다면, 범죄를 막을 수 없다. 과징금 규모가 범죄로 인한 이익보다 압도적으로 커야 한다. 담합 등 불공정경쟁을 유발하는 범죄를 저지르면 기업이 망한다는 인식을 심어야 한다.
세 번째는 ‘집단 소송제’다. 기업이 다수에게 입힌 피해에 대해, 피해자 가운데 일부가 다른 피해자를 대표해서 소송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판결의 효과는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 미친다. 이제까지는 대기업의 담합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이 나서서 소송을 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 제도가 도입되면 그게 가능해진다.
이런 세 가지 법을 저지하는 세력이 새누리당이다. 겉으로는 법과 시장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이권 카르텔에 불과하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민주당 역시 비슷한 생각이다. 그들은 법과 시장에 대해 안 좋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건 잘못이다.
"같은 상품에 대해선 같은 가격!"
프레시안 : 입만 열면 시장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실제로는 반(反)시장적이라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시장에 대한 개념 혼란이 있는 건 그래서일수도 있겠다.
박창기 : 시장원리가 바로 서려면, 결국 ‘일물일가’(一物一價) 원칙이 확고해야 한다. 같은 상품에 대해선 같은 가격이 적용돼야 한다는 말이다. 한국에선 아주 먼 이야기다. 예컨대 내가 익숙한 설탕 가격을 예로 들어보자. 국제시장에선 설탕 가격이 떨어지는데, 국내시장에선 가격이 그대로다. 이게 말이 되나. 왜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이 달라야 하나. 국제가격이 떨어지면, 국내가격도 떨어지는 게 맞다. 이게 ‘일물일가’ 원칙이다.
수출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대기업이 생산하는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예로 들어보자. 이들 제품은 국내 가격과 수출 가격이 다른 경우가 많다. 수출 가격이 더 싸다. 국내 소비자는 똑같은 제품을 왜 더 비싼 값에 사야 하나. 이들 제품을 생산하는 대기업에게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이다. 역시 ‘일물일가’ 원칙이 적용돼야 한다. 수출 가격과 국내 가격이 달라야 할 이유가 없다.
전기와 같은 에너지 가격도 ‘일물일가’ 원칙을 따라야 한다. 전기가 부족하면 가격을 올리는 게 맞다. 그런데 정부는 전기를 많이 쓰는 대기업의 이익을 위해 전기 가격을 통제한다. 그러면 이중가격 현상이 생긴다. 수요-공급의 원리에 따라 형성되는 가격과 공식적인 가격이 다른 것이다. 그래서 생긴 게 갑작스런 정전, ‘블랙아웃’이다. 지난 2011년에 한국에서도 대규모 ‘블랙아웃’이 벌어졌다. 전기 가격이 지나치게 싸니까, 대기업은 절전 기술을 도입할 이유가 없다. 이런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블랙아웃’ 위험은 늘 따라다닌다.
노동 가격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능력을 갖고 있고, 똑같은 일을 하는데, 노동 가격이 각각 다르게 매겨진다. ‘대기업이냐, 중소기업이냐, 정규직이냐, 비정규직이냐’ 등에 따라 노동 가격이 달라진다. 그리고 그 차이가 너무 크다. 이건 단지 시장원리 문제가 아니다. 심각한 인권 침해다.
"망해야 할 중소기업은 망하게 해야 한다"
프레시안 : 기업을 창업해서 경영해본 경험이 있다. 이런 눈으로 볼 때, 역대 정부의 중소기업 정책이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다.
박창기 : 민주당 정부나, 새누리당 정부나 모두 중소기업 지원을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중소기업에 돈을 퍼주는 식의 정책은 잘못이라고 본다. 망해야 할 기업은 망하는 게 옳다. 그게 시장원리에도 맞다. 그런데 한국에선 망해야 할 기업이 망하지 않고 ‘좀비 기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들 ‘좀비 기업’은 덤핑 공세를 해서 멀쩡한 기업까지 발목을 잡는다. ‘좀비 기업’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이유가 있다. 정부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다. 이익이 나지 않아도 매출이 있으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좀비 기업’이 퇴출되지 않으면, 결국 기업 생태계 자체가 망가진다. 정부는 선의로 돈을 지원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결과를 낳은 셈이다. 최저임금을 올려야 한다. 그래야 직원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면서 연명하는 ‘좀비 기업’이 퇴출된다. 아울러 실업급여를 올리는 등 실업자에 대한 복지 역시 강화해야 한다.
연구개발(R&D) 지원, 시설 투자 지원 등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자금이 너무 많다. 이걸 줄이는 대신, 중소기업의 옥석을 가리는 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중소기업의 수가 줄어야 한다. 그래야 건실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 대기업으로 성장하는 길도 열린다. 요컨대 중소기업 정책은 중소기업을 줄이고 대기업을 늘리는 방향을 향해야 한다.
"다음 대선에선 6월 항쟁 이후 세대가 지도자 돼야"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이른바 486세대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1960년대에 태어나 1980년대에 대학에 다니며 민주화 운동을 했던 세대를 건너뛰고, 그 다음 세대가 한국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의 진보 담론이 주로 1980년대의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전통적인 진보 담론에 대해 거리를 둔 이번 책의 입장과 맞닿는 주장으로 읽힌다.
박창기 : 486세대는 가망이 없다고 본다.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이었던 그들은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공로가 있다. 그러나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고 본다. 1980년대에 형성된 사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이들이 많다. 여전히 이른바 민족해방(NL) 또는 민중민주(PD)의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이 많다. 이런 관성을 떨쳐 내지 못하는 한, 그들은 리얼리티를 확보할 수 없다. 예컨대 NL 출신은 여전히 민족 개념을 앞세운다. 거기에 너무 빠져 있다 보니, ‘국가’를 놓쳤다. 그 바람에 ‘애국’이라는 개념을 우파에게 뺏겨버렸다.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이미지를 대중에게 심을 기회를 놓쳤다. 또 PD 출신은 여전히 노동가치설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노동만이 가치를 창출한다는 믿음인데, 잘못된 생각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의 기득권을 깰 수 없다. 앞서 언급한 계층 구분에 따르자면, 침묵 대중 집단인 ‘G4’ 그룹과 극빈 소외 집단인 ‘G5’ 그룹이 한국 사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조합을 싸고도는 논리가 이들 눈에 어떻게 비치겠나. 그래서 그들 역시 대안이 되기 어렵다.
1987년 이후에 대학을 다닌 세대에서 다음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 2017년 대선이 치러질 때면, 486세대 역시 50대 나이가 된다. 그 아래 세대, 즉 40대 지도자가 나오는 게 옳다고 본다. 1980년대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세대에서 지도자가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외국 사례를 봐도, 비슷한 결론이 나온다. 보수 장기 집권을 무너뜨린 경험은 대부분 40대 지도자가 이룩했다. 미국의 빌 클린턴과 케네디, 영국의 토니 블레어 등이 그렇다.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니면서 읽은 책으로는 20대 청년의 대부분이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현실을 설명할 수 없다. 다음 대선에선 88학번 이후 세대에서 지도자가 나오길 기대한다.
프레시안 : 안철수 신당 세력에 대해선 어떻게 보나. 안철수 의원 역시 지난 대선에서 혁신경제를 이야기했다.
박창기 : 안철수 의원은 혁신경제가 왜 중요한지는 잘 알고 있다. 벤처기업인 출신인 까닭일 게다. 그러나 구체성이 없다. 그러니까 대중을 설득하는 힘이 없다. 혁신경제 개념은 이권경제 개념과 대비를 이룰 때, 설득력이 있다. 이권경제와 싸워야 혁신경제는 살아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없으니, 안 의원은 ‘혁신경제의 화신’이라는 말을 못 듣는다.
"이권집단 누적, 직접민주제로 막자"
프레시안 : 이번 책에서 ‘직접민주제’ 도입을 강조했다. 혁신경제를 강조하는 입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 주장인지 궁금해 할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박창기 : 민주주의는 영어로 데모크라시(democracy)인데, 번역이 잘못 됐다고 본다. 끝에 붙은 ‘주의’라는 말 때문에, 마치 민주주의가 이념의 일종인 양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민주주의 대신 자유민주주의를 써야 한다는 극우 세력의 이상한 주장도 그래서 나온 것이라고 본다. 데모크라시(democracy)는 데모스(demos), 즉 대중에 의한 ‘통치(kratos)’라는 뜻이지 이념이나 신념 체계가 아니다. 요컨대 데모크라시(democracy)는 제도다. 내가 직접민주주의, 간접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제, 간접민주제 등의 표현을 쓴 것은 그래서다.
나는 이권집단의 누적 현상이 우리 사회가 겪는 문제의 핵심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권집단의 누적 현상을 깨기 위해 꼭 필요한 게 직접민주제다. 동시에 이권집단의 누적 현상은 혁신경제의 적이다. 혁신경제를 강조하는 입장과 직접민주제 주장이 통하는 측면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가 창업한 지 얼마 지나고 나면 이권집단이 누적되는 현상이 생긴다. 이걸 막지 못하면 결국 나라가 망한다. 내부에서 혁명이 일어나거나, 외부 침략을 받거나, 이런 두 가지 선택이 있을 뿐이다. 조선도 마찬가지다. 건국 시기에는 양반이 소수였다. 그러나 그들은 꾸준히 증가했고, 기득권 집단이 됐다. 병역 및 세금에 대한 책임에서 자유로운 이권집단이 늘어나면 나라가 망하는 게 당연하다.
한나라 고조가 나라를 세울 때 ‘약법 삼장’이라고 했다. 그들이 무너뜨린 진나라의 옛 법을 모두 없앤다는 말이다. 기존의 법은 기존 기득권 세력의 이권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새로운 세력이 과거 누적된 이권집단을 무너뜨리려면 기존의 법을 없애야 했다. 국가가 창업하는 시기에 옛날 법을 없애는 절차가 꼭 있었던 것은 그래서라고 본다.
이권집단이 꾸준히 늘어가는 건, 자연 현상처럼 막을 수 없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역사를 돌아보면 크게 세 가지 방법으로 이권집단의 누적을 막을 수 있었다.
하나는 시장 경쟁이다. 현대사회에선 선거를 통해 권력자를 교체한다. 일종의 경쟁원리가 작동하는 셈이다. 최고 권력을 세습하는 왕조국가와 비교하면, 이 방식이 이권집단의 누적을 막는데 유리하다. 두 번째는 개방이다. 성문을 열고 외부와 교류하는 순간, 성안에 기득권을 쌓았던 이권집단의 힘은 약해진다. 세 번째는 민주제도다. 권력이 대중에게 넘어가면, 이권집단의 힘이 어느 선을 넘기가 어렵다.
하지만 간접민주제는 한계가 있다. 이권집단이 관료와 정치인을 구워삶기란 어렵지 않다. 여기에 성공하면, 간접민주제 하에서도 이권집단의 누적은 계속된다. 내가 직접민주제를 강조하는 건 그래서다. 흔히 직접민주제를 이상적인 주장이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스위스를 보자. 대표적인 직접민주제 국가다. 스위스는 연방이 성립한 후 지난 160년 동안 직접민주제를 잘 유지해 왔다. 그동안 독재가 이뤄진 적도, 내전이 터지거나 외침을 받은 적도 없다. 또 세금이 낮은데 비해, 복지 수준은 높다. 각종 통계 자료에 드러난 국민 행복도는 최고 수준이며, 범죄율은 최저 수준이다. 직접민주제가 지닌 힘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스위스 직접민주제의 핵심은 크게 세 가지다. 첫째는 국민 10만 명 이상이 18개월 안에 발안을 하면 전 국민이 국민투표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국민 5만 명 이상이 100일 안에 서명을 하면 국회가 통과시킨 법안을 검증하는 국민투표를 하는 제도다. 셋째는 헌법 개정과 국제조약 비준과 같은 국가의 중대사를 국민투표로 정하는 제도다. 이 세 가지는 연방 국가 단위의 국민투표이고, 지방정부 별로 다양한 직접민주제가 있다.
스위스 국민은 1년에 대략 100건 정도의 법안에 투표를 한다. 이 가운데 열 건은 연방정부 단위의 투표이고, 나머지는 지방정부 단위의 투표다. 분기별로 모아서 1년에 네 번, 일요일에 한꺼번에 투표한다. 대부분 우편과 인터넷을 이용해서 투표한다. 직접 투표소에 가는 사람은 전체 투표자의 2% 남짓에 불과하다. 또 투표를 하루에 끝내는 게 아니고, 마감 전 한 달 또는 석 달 안에 아무 때나 투표할 수 있다.
스위스에선 관료나 정치인의 요구로 국회에서 통과된 법률 가운데 약 10~20%는 국민의 요구로 다시 검증된다. 이 가운데 30~40%는 부결된다. 한국에서처럼 다수당이 수많은 법안을 한꺼번에 날치기 통과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한 차이다. 날치기 통과가 이뤄지는 조건에선 이권집단을 견제하기 어렵다. 이권집단이 관료와 정치인을 포섭하면, 다수 대중이 막을 길이 없다. 직접민주제가 작동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설령 이권집단이 정치인을 구워삶아서 법안을 통과시켰다 해도, 대중의 힘으로 이를 다시 검증하고 막는 게 가능하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관료나 정치인 역시 스스로 조심하게 된다. 소수 이권집단의 이익을 위한 법안을 통과시켰다가, 국민투표로 취소된 경험을 하게 되면 자신들에게도 불리해지니까 말이다. 국민이 반대하는 법을 반복해서 만드는 정치인이 선거에서 이길 리는 없지 않은가.
"4대강, 세종시, 직접민주제로 결정했더라면…"
프레시안 : 스위스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꼽을 때면, 늘 최상위권에 속했다. 그런데 최근에는 기업 임원의 급여를 통제하는 법안을 놓고 국민투표가 이뤄졌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에서 기업 임원의 급여를 통제하자는 목소리가 높았던 게 인상적이다.
박창기 : 그게 직접민주제의 힘이다. 지난해 3월에 ‘도적질 반대’ 시민단체가 발의한 국민청원 국민투표가 있었다. 경영진의 임금을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에서 결정하는 법안이, 유권자의 68%가 찬성한 가운데 통과됐다.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들인데 그 대리인인 이사들이 자신들의 급여를 높게 정하는 건 잘못이다. 그러나 이런 부당한 행위가 관행적으로 이뤄져 왔는데, 여기에 제동이 걸렸다. 수백 년 주식회사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라고 본다.
게다가 스위스 기업에서 줄 수 있는 최고임금을 최저임금의 열두 배 이내로 제한하자는 ‘1대 12’ 원칙에 관한 법안도 발의됐다. 비록 부결됐지만 의미 있는 시도였다고 본다.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면, ‘좌파 아니냐’라거나, ‘대기업이 해외로 떠날 것’이라는 등 난리가 났을 게다. 그러나 스위스를 보면, 여전히 기업하기 좋은 나라다. 숱한 다국적 기업이 스위스에 본사를 둔다. 이들 기업이 직접민주제와 그로 인해 통과된 법안들 때문에 이전하려 한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왜 그럴까? 직접민주제가 지닌 순기능 때문이다. 직접민주제로 인해 투명성이 높아지니까 부정부패가 줄어든다. 기업 입장에선 반가운 일이다. 또 갈등 비용 역시 적다. 그러니까 사회가 더 안정된다. 역시 기업하기 유리한 조건이다.
물론, 직접민주제를 하면 의사결정에 시간이 더 걸리는 건 사실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낭비가 더 적다. 예컨대 한국에서 4대강 사업의 추진 여부를 국민투표로 정한다고 생각해보자. 선거에서 이긴 세력이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것과 비교해서 갈등비용이 훨씬 줄어든다. 또 세종시 이전 문제를 국민투표로 정했다면 어땠을까. 어떤 결과가 나오건, 사회적 낭비는 훨씬 적었을 게다. 어떤 사람들에겐 국민투표를 앞두고 다양한 목소리를 내는 이들이 논쟁을 벌이는 게 낭비처럼 여겨지겠지만, 다수가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여서 생기는 낭비에 비하면 훨씬 낫다.
양극화 문제 역시 직접민주제를 통해 해법을 찾을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계층 구분상으로 침묵 대중 집단인 ‘G4’ 그룹과 극빈 소외 집단인 ‘G5’ 그룹은 전체 국민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다수임에도 불구하고, 현행 정치 체제에서 제 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그러나 직접민주제가 도입되면, 이들 계층에게 절실한 복지의제가 제기될 통로가 열린다.
내가 스위스를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직접민주제를 도입한 사례는 꽤 있다. 예컨대 미국의 경우도 캘리포니아 주는 1990년대 이후 직접민주제를 상당히 도입했다. 우리도 이제 직접민주제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간접민주제가 대표할 사람을 뽑는 것이라면, 직접민주제는 대중이 직접 정책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뽑는 것만으로는 이권집단을 견제할 수 없다는 게 명확해졌다.
한국은 1987년 체제를 통해 상당히 공평한 질서가 짜여졌다. 적어도 개인 대 개인 사이의 질서에선 불공정한 경우가 줄어들었다. 그러나 집단 대 집단 사이의 질서는 그렇지 않다. 어떤 집단은 부당한 힘을 갖고 있으며, 다른 집단에게 불공정한 질서를 강요한다. 직접민주제 도입은 집단 대 집단 사이의 질서를 보다 건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도 ‘직접민주제의 화신’, 그러니까 직접민주제 도입을 자기 브랜드로 삼은 정치인이 빨리 나타나길 바란다.
프레시안 : <혁신하라 한국경제>에 이어 새로운 책을 냈다. 이유가 궁금하다.
박창기 : 나는 기본적으로 사업가다. 그래서 ‘까칠한 책’을 써서 사업하는 데 방해받는 것 아니냐는 말도 많이 듣는다. 그러나 세상을 설명하는 일반 이론을 만드는 건 내 오랜 꿈이었다. 아인슈타인이 도전했던 통일장 이론을 만드는 게 고교 시절의 꿈이었다. 대학에선 사회과학 책을 많이 읽었는데, 그때는 사회과학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고 싶었다. 제일제당에 취직해서 설탕 가격 예측하는 일을 할 때는 가격 결정을 설명하는 일반이론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하는 사업 역시 그때 했던 생각과 공부의 연장선 위에 있다.
독일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의 삶에서 중요한 질문을 마음속에 품고 살다 보면 언젠가 그 질문의 답 속에 살고 있는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다.” 내가 지금 그렇다. 내가 품었던 질문의 답 속에 내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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