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적 재일동포에게 등돌린 정부, 거드는 대법원

[기고] 재일조선인 역사, 50년 전으로 돌아가나

12일 대법원 특별3부(주심 대법관 박보영)는 원고인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 정영환 씨가 '임시여행증명서 발급거부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관여 대법관(재판장 대법관 민일영, 대법관 이인복, 주심 대법관 박보영, 대법관 김신)의 일치된 의견'이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4년 7개월을 끌어온 이번 결과에 개탄을 금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일제강점기의 역사에서 비롯되었고 해방 후 지금까지 지난 70여년 간 일본정부의 가혹한 차별과 탄압에 직면해왔던 재일조선인의 역사와 현실을 철저히 외면한 몰역사적인 판결이다. 또한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의 간절한 염원인 고향 방문과 자유로운 고국 방문을 가로막는 정권의 행태에 철저히 편승한 마녀사냥식의 정치적인 판결이다. 지난 2009년 국가인권위의 결정에도 미치지 못하는 이번 대법원 판결은 결과적으로 지난 독재 정권 시기, 일제강점기의 피해자인 재일조선인을 외교적 흥정거리로 전락시키며 자국 국민을 버리고 방치한 '기민(棄民) 정책'의 연장선상에 있고, 이후 파생될 역사적 파장은 이제 고스란히 정부와 사법부의 몫이다.

2009년 5월 25일 시작된 정영환 씨의 소송은,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주일한국영사관에서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는 과정에서 온갖 인신적 모욕과 함께 '국적 변경'을 명백히 강요받는 현실, 정부의 암묵적인 관행에 의해 '국적 변경'할 의사가 없다고 할 경우 임시여행증명서 발급을 거부당하는 현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동포들의 소박하고 정당한 고국방문의 기회를 보장받기 위함이었다.

지난 2002년 이 같은 유사한 내용의 국가인권위원회 진정 건에 대해, 정부(외교부)는 답변서(2004년 3월)를 통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 모든 조선적(朝鮮籍) 동포에게 여행증명서 신청 문호가 개방되어 있으며, 신원상 특이사항이 없으면 발급하여 주고 있으며 일반적으로 1주 이내에 발급하며 횟수의 제한은 없다. 현재 신원특이자가 아닌 경우 조선적 재일동포의 입국을 대부분 허용하고 있다. 지난 5년간 여행증명서 발급 실적은 1만1819건이며 그 동안 총 4건의 거부 사례가 있었고 거부한 사유는 간첩사건 연루, 친북활동 등이었다.' 외교부의 답변대로라면 1999년~2004년 초까지 1만2천여 명에 달하는 조선적 재일동포는 1990년 제정된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해 제한없이 고국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침해구제 제2위원회)는 2009년 4월 또 다른 조선적 재일동포가 진정한 사건 '재일조선인 국적 취득 강요에 의한 인권침해 사건'(사건, 09진인2583)에 대한 같은 해 12월 결정문을 통해, '조선적 재일동포인 피해자에게 입국하는 과정에서 국적선택을 조건으로 하거나 이를 직·간접적으로 종용하는 행위는 피해자의 정치적 신념이나 세계관에 반하는 행동을 강요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이러한 조치는 「남북교류협력법」 및 「여권법」 등의 문언과 취지에 부합되지 않는 처분으로서 「헌법」 제10조, 제14조에서 보장하고 있는 행복추구권 및 국적선택에 대한 자기결정권과 「헌법」 제19조의 양심의 자유를 침해한 행위라고 판단된다'며 '외교부장관에게 재외공관에서 조선국적의 재일조선인에 대한 여행증명서를 발급할 때 국적 전환을 강요, 종용하거나 이를 조건으로 하는 관행을 시정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할 것을 권고'하고 '향후 이러한 유사한 인권 침해 사례가 발생하지 않도록 피진정인(외교통상부 및 주일한국총영사관)에 대한 자체 교육을 실시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2009년 12월 31일, 서울행정법원 제14부(사건 2009구합34891)는 '피고(주일오사카총영사관 총영사)가 2009년 5월 25일 원고에 대한 여행증명서 발급거부 처분을 취소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주일오사카한국총영사관의 이번 임시여행증명서 발급거부는 그 처분 사유가 존재하지 않거나 합리적인 재량권의 범위를 일탈, 남용한 처분이므로 위법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이로써 겉으로는 '국가의 안전보장, 공공질서, 위험 행위' 등을 들먹이며 실제로는 암묵적인 국적 변경 요구 수용 여부에 따라 여행증명서를 발급하고 있는 소위 '정부 재량권' 남용에 사법적 재갈을 물렸다. 또한 조선적 재일동포의 역사와 인권적 현실을 세상에 드러내고, 고국방문의 기회를 보장해달라는 원고의 정당한 호소를 적극적으로 인정했다.

▲ 임시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서류.
2010년 9월 28일 서울고등법원 제1행정부(재판장 김용덕, 현 대법관, 사건 2010누3536)는 피고 오사카총영사의 항소를 인용 1심 판결을 뒤집었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무국적자'이기 때문에 오사카총영사는 여행증명서의 발급에 관해 광범위한 재량권을 가지는데, '재외동포NGO대회'에 참석하여 한통련 부의장과 회합하였고, 일본의 조선대학교 재학 중 방북한 사실이 있으므로 정영환 씨에 대한 오사카총영사의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처분은 정당했다는 것이다.

고등법원은 조선적 재일동포의 특수한 지위를 간과하고 이들을 단순 '무국적자'로 취급하였다. 조선적 재일동포는 1945년 해방 후 일본에 살고 있는 재일조선인 가운데 대한민국 국적이나 북한의 국적을 가지지도, 일본에 귀화하지도 않은 동포들이다. 사실상의 '무국적자'인 이들의 지위는 일본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 및 해방이후의 분단체제라는 역사적 상황, 일본 정부가 47년 외국인등록령 실시와 함께 강제로 일본 국적을 박탈한 데 기인했다. 또한 고등법원은 정영환 씨가 2006년 서울에서 진행된 '재외동포NGO대회'에 토론자로 참석하였다는 사실만을 근거로, 대회에서 한통련 부의장과 회합하였다고 포장 해석하였고, 2006년 정영환 씨가 한국에 입국하였을 당시에는 문제 삼지 않았던 99년 방북 사실을 근거로 신원증명이 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2006년 당시 열린 '재외동포NGO대회'는 각국 재외동포들이 참여해 거주국의 재외동포의 역사와 현실에 대해 토론하고 정부에 바람직한 정책 대안을 제시하는 성격의 행사였다. 또한 당시 이 대회는 일부 정부의 관련 재단 등의 후원을 받고 진행된 것이고, 대회 정책포럼 등에는 관련 분야의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외교부 법무부 등 정부의 핵심 실무책임자들도 직접 참석하여 발제를 진행하는 등 공개적이고 대중적이며 비정치적인 대회였다. 또한 당시 한통련 부의장을 포함하여 일본의 동포 참석자들의 입국도 모두 주일한국영사관으로부터 공식으로 임시여권이나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입국한 것으로 정부 스스로가 문제 삼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2심 재판부는 기본적인 이러한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전연 파악하지 않았고 정부 측의 일방적인 주장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또한 애초 소송의 본질인 조선적 재일동포가 주일한국영사관에서 받았던 인신적 모욕, 국적 변경 강제 등의 부당한 대우, 임시여행증명서 발급과 관련된 법의 심각한 절차적 위반 여부에 대해서는 아예 판단조차 하지 않은 그야말로 마녀사냥식의 '정권에 편승한 판결'이요 '정치적 판결'의 시작이었다.

▲ 2006년 <제3회 재외동포NGO대회> 자료 표지.
주일한국총영사관의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임시여행증명서 신청 및 발급 현황(2005년~2009년)을 보면 이러한 고등법원의 판결이 얼마나 정치적 판결이었는지 웅변해주고도 남는다. 아래 통계를 바탕으로 한다면, 적어도 2008년까지는 주일한국총영사관은 조선적 재일동포가 신청한 임시여행증명서를 대부분 발급해주고 있다가, 2009년 들어서자마자 발급 거부 건이 갑자기 280건으로 급증하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고등법원 판결이 있던 해 2010년 초부터는 아예 신청 및 발급 현황 통계조차 정리되지 않는 걸로 알려지고 있어, 2010년부터는 아예 여행증명서 발급이 전면 거부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2009년을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조선적 재일동포들이 「남북교류협력법」에 의해 주일한국총영사관으로부터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고향을 방문하거나 고국을 방문한 건수만 대략 2만4000여 건이 훌쩍 넘는다. 그럼에도 이들이 고국을 자유롭게 왕래하면서, 우리 사회에 어떤 해악을 미쳤다는 소식을 단 한 건 접해보지 못했다.

▲ 이 현황 자료는 언론에서 외교통상부 소관 '재외동포과'에 의뢰하여 받은 자료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2013년 12월 12일 대법원 특별3부(주심 대법관 박보영, 사건 2010두22610)는 '일본의 1947년 외국인등록령에 따라 국적 등의 표시를 조선으로 하였다가 그 후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도 않고 국적 등의 표시를 대한민국으로 변경하지도 않고 있는 조선적 재일동포는 구 남북교류협력법상 여행증명서를 소지하여야 대한민국에 왕래할 수 있다고 봄이 타당하다'며 '원심(고등법원) 판결 이유 및 기록에 의하면, 원심(고등법원)은 그 채택 증거를 종합하여, 원고는 조선적 재일동포로서 피고에게 여행증명서 발급을 신청하였으나, 피고는 원고가 과거 조총련 산하 단체의 일원으로 방북하여 범민족대회 및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약칭 범청학련) 총회에 참석하여 친북활동을 하였고, 2차례 방한 당시 반국가단체인 재일한국민주통일연합 부의장과 회합한 점을 실질적인 판단 근거로 삼아 신원 증명이 되지 않았다는 것으로 여행증명서 발급 거부 처분을 한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이 사건 처분은 구 남북교류협력법 및 관련 구 여권법령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평등의 원칙에 위배되지 아니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 처분에 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위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위 관련 법령 및 기록에 비추어 보면, 원심(고등법원)의 이러한 판단은 정당하고, 거기에 상고이유 주장과 같은 법리 오해 등의 위법은 없다'며 지난 고등법원 판결 내용을 그대로 앵무새처럼 읊조림으로써 결국 '정치적 판결'의 대미를 장식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나라 '조선(朝鮮)'을 국적으로 하는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는, 대법원 판례와 최근 법무부의 조선적 재일동포의 국적 검토 의견에 근거해, 정부는 한국 국적자로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 판례 '조선인을 부친으로 하여 출생한 자는 남조선과도정부법률 제11호 국적에관한임시조례의 규정에 따라 조선국적을 취득하였다가 제헌헌법의 공포와 동시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였다 할 것이다(대법원, 1996.11.12. 96누1221)', 법무부 검토 의견 '「국적에 관한 임시조례」, 「제헌헌법」, 「헌법」 등 관련 규정을 종합 검토할 때 재일조선인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있음'이 그것이다. 일본 정부 또한 외국인등록원표의 국적란에 '조선(朝鮮)'이라고 기재되어 있든 한국으로 기재되어 있든 간에 이들 모두를 대한민국 국민으로 간주하고 있다.(일본 법무성, '개정 국적 실무 해석'편) 조선적 재일동포가 '무국적자'임을 전제로 한 고등법원의 지난 엉터리 판결에 대해서도, 한·일 양 정부의 조선적 재일동포에 대한 명확한 국적 해석과 관련하여서도, 대법원은 인용조차 하지 않은 채 외면해버렸다.

7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일본은 1945년 8월부터 국제적으로 전쟁이 종결된 1952년 4월까지 약 7년간 연합국의 점령하에 있었고 연합국총사령부(GHQ)의 지배를 받는다. 당시 일본에 남은 약 60여만 명의 조선인들은 GHQ에 의해 '<해방인민(Liberated People)>으로 <일본인(Japanese)>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과거 <일본국민(Japanese Subjects)>이었으므로 <적국민(Enemy Nationals)>이라는 이중의 취급을 당하게 된다. 말하자면, 1947년 5월 GHQ와 일본정부에 의해 공포·시행된 칙령(외국인등록령)에 의해 일본에 남겨진 모든 조선인들은 외국인등록증에 일률적으로 '朝鮮(조선)'이라는 기호를 표기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물며 일본정부조차도 눈엣가시 같은 조선적 재일동포가 과거 한반도로부터 유래한 특별한 이유있는 정주집단임을 인정해 특별영주구건을 부여하고 일본내 출입국을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2013년 12월 12일' 오늘은 조선적(朝鮮籍) 재일동포의 지난한 역사와 인권에는 애써 등 돌린 채 정권의 '신 기민(棄民)정책'에 면죄부를 던져준 날, 일본정부의 차별과 탄압에 맞선 수만 명의 동포들을 상대로 고국의 사법부가 또 다시 날카로운 칼날을 그들의 가슴 속에 들이댄 '부끄럽고 치욕스런 날'로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재일조선인 역사의 시계추는 다시 50여 년 전으로 되돌려지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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